[시각] ‘시장 키즈’들의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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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키즈’들의 독재

[시장 들여다보기]YS 키즈와 시장 키즈

[16호] 2011년 08월 01일 (월)

조계완

economyinsight@hani.co.kr

조계완 부편집장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최근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YS 키즈(아이들)다”라고 했다. 요즘 정치권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는 여러 인물이 YS 키즈라고 한다. YS가 공천해 정치에 입문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홍 대표의 말을 접한 뒤, 두 경제학자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케인스주의가 휩쓸던 1960년대 중반, 시장주의 경제학의 거두인 밀턴 프리드먼조차 “어떤 면에서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이고, 어떤 면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케인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자유시장의 사상적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1944)에서 “지금 이 나라의 사태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의 견해를 볼 때 ‘우리는 지금 모두 사회주의자다’라는 사실은 명백하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 시대의 한국인들, 특히 관료·학계·재계의 엘리트들은 ‘시장 키즈’에 가깝다. 시장과 경쟁에 대한 믿음이 신념처럼 강한 사람들 일색이다. 국내외 대다수 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은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을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시장을 확대해가는 과정’으로 설명해왔다. 근대 서구의 ‘시장’ 개념을 받아들여 정착하는 과정이 곧 경제성장과 생활 수준 향상을 가져온 원동력이었다는 말이다.
“한국 경제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두 가지 극단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한다. 그 하나는 외환위기 이후 유행하는 시장맹신주의다. 학계, 재계, 언론계, 관료 모두 뭐든지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 있다. 한국에서 무슨 문제를 놓고 논쟁할 때 상대방에 대해 ‘시장 원리를 모른다’ ‘반(反)시장적이다’라고 비난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공격도 없다.”(<불평등의 경제학>, 이정우 교수)

태양의 흑점과 주식시장의 미인대회
종교가 과학 이전에 우선 ‘믿음’을 전제하듯 시장 역시, 비록 경제학자들은 ‘시장 과학’을 주창하지만, 우선 믿음의 영역이다. 사람들의 기대가 스스로 작동해 결국 현실로 나타나는, 이른바 ‘자기실현적 기대’가 대표적이다. 고대 사회에는 태양에 흑점(Sunspot)이 나타나는 해는 큰 풍년 혹은 흉년이 든다는 미신이 있었다. 흑점 모양을 보고 풍년이 들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면 실제로 그해 풍년이 찾아왔다. 미신을 믿고서 너도나도 농사짓기에 나서고, 또 풍년을 확신하면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경제 펀더멘털이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상태였으나 외환위기로 나라 전체가 갑자기 부도에 빠지는 경험을 한 몇몇 국가도 마찬가지다. 시장의 환투기 세력이 통화가치 폭락을 예언처럼 퍼뜨리면서 실제로 외환시장이 대혼돈에 휩싸여 결국 부도 위기에 직면하기도 한다.

지난 7월6일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한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

“시장의 힘에 맞서 싸우는 정치가 중요한 때다.” 금융위기 이후 유럽 각국의 재정위기 국면에서 유로존을 지키는 독수리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독일 메르켈 총리가 늘 하는 말이다. 환율과 국채에 투자한 시장의 거대 투기세력들이 투기 차익을 노리고 불안을 조성하면서 유로 흔들기를 주도한다는 말이다. 물론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발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경우 각종 시장 지표의 변동이 실물경제 상황을 실시간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보는 반면, 유럽은 시장은 투기와 거품이 판칠 수밖에 없는 제도라고 여기면서 ‘사회’를 강조한다. 이른바 ‘사회적 유럽’이다. 메르켈의 말은 시장을 바라보는 나름의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 자리잡고 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위대함은, ‘시장은 그 자체로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는 믿음을 현실 시장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 여지없이 무너뜨렸다는 데 있다. 그는 “주식 투자자의 행동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가장 예쁜 미인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투자자들의 성미에 가장 잘 맞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을 고르는 미인대회와 같다”고 했다. 진정한 가치가 아니라 대중의 심리 파도와 인기에 따라 시장 결과가 좌우된다는 말이다. “투자는 신경과민증이라든지 히스테리증이라든지, 심지어 소화불량과 날씨에 대한 반응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 유명한 ‘야성적 충동’은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장래에 대한 막연한, 동물적인 기대가 경제와 시장을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시장 키즈’인 한국의 엘리트들은 ‘경쟁을 통해 돈도 벌고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꿈의 영역’으로 시장을 설파해왔다. 저마다 선호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행동, 그리고 자신이 쏟아부은 노력에 합당한 보수와 성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시장경제라고 찬양했다. 시장은 ‘선택할 자유’를 보장하는, 인류가 발명해낸 최선의 제도인 것이다. 그러나 누구는 한여름 도서관에 앉아 경제원론 책을 펴놓고 고시 준비하고, 또 누구는 불볕더위에 등록금 1천만원을 벌기 위해 막노동을 하고 있을 때, 이는 과연 자유로운 선택인가? 책을 펴놓은 학생은 공부에 열정이 있고 재능까지 갖춰서 도서관에 있고, 막노동하는 친구는 공부에 경쟁력이 없어서 합리적으로 선택한 것인가? 경제학자들은 이런 행동에 대해서조차 ‘1＋1＝2’라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수학의 옷을 씌워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강변해왔다. 그러나 요즘의 ‘행태 경제학’ 유행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저마다 오직 효용과 이윤극대화를 추구한다고 가르쳐온 전통적인 경제원론 책은 점차 도서관에서 켜켜이 먼지 쌓이는 수모를 당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동안 한국에서 시장은 기회와 공정의 다른 이름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독재’였다. 한 예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공간’이라고 일컫는 인터넷에서조차 시장의 힘은 오히려 불평등과 독점적 지대를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매매 거래는 실물을 보지 못한 채 결제해야 한다는 리스크를 안고 있다. 따라서 구매자는 판매자가 누군지, 상품 제조업체가 어딘지 하는 브랜드 가치에 더욱 기댈 수밖에 없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시장 평판과 명성에 더욱 기대게 마련이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구입한 상품일수록 구매 위험이 낮다고 생각한다. 즉 자동차든 책이든 과자든 옷이든 장난감이든 많이 팔린 상품일수록, 또 대기업 브랜드일수록 더 많이 팔리게 된다. 승자독식이다. 이런 유통·판매 양극화는 그 상품을 생산·공급하는 기업에 속한 노동자들의 임금과 성과급에서 큰 격차를 초래하게 된다.

닫혀버린 ‘인생 역전’
인생 역전의 기회를 준다는 측면에서 볼 때, 시장의 역동성은 한국에서 오래전에 그 문이 닫힌 건 아닐까? 1987년 민주화 대투쟁 이후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은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체제였다. 사회적 힘의 크기에 따라 경제적·사회적 배분 몫이 바뀔 수 있었다. 그래서 기업관계, 노사관계, 시민사회의 각 영역은 배분과 제도 구축을 둘러싼 쟁투가 벌어진 각축장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시장이 질주하면서 열려 있는 공간은 닫히기 시작했다. 참여정부의 등장과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은 혹시 그 각축의 마지막 불꽃이 아니었을까? 독점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는 이제 양극화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립돼 구조화·고착화되는 단계에 와 있다. 시장 독재가 질주하면서 시장이 보장하는 꿈과 기회는 오히려 닫혀버리는 역설이 작동하는 셈이다. 노동시장에서의 비정규직은 ‘고용의 어두운 측면’을 넘어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함정이 되는 반면, 정규직 일자리는 그 자체가 기득권 ‘자산’으로 강화되고 있다. 중소기업이 ‘시장을 통해’ 중견기업·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꿈도 닫혀 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어디선가 “어떤 상황에서는 최고의 생산량을 기록한 노동자에게 상을 주기보다는 최악의 생산량을 기록한 노동자를 벌주는 것이 최적의 유인구조”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시장은 ‘시장 키즈’가 말하는 기회의 공간이 아니라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며 벌주는 채찍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자유시장이란 제도는 오직 시장에서 가격에 따라 ‘교환’되는 것만 고려할 뿐 그 상품이 생산되는 영역, 즉 공장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공화주의자·사회주의자, 흑인·백인 그 누가 빵을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유명한 말이 이를 보여준다. 현대자동차의 오른쪽 바퀴는 정규직이, 왼쪽 바퀴는 비정규직이 만들어내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는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현대차의 가격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선명하게 적혀 있는 공장 내부로 들어가보자”고 말했다. 시장을 벗어나 공장 안으로 들어가면 이제 자본과 노동의 ‘관계’, 이른바 ‘사회적 관계’가 드러나면서 누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가치를 생산해내는지 확연하게 모습을 나타낸다. 시장에서는 계급도 계층도 없다. 노동자도 자본가도 없다. 우리 모두 오직 생산자 아니면 소비자로 등장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노동자로, 또 자본가로 살고 있다.

‘도덕적 해이’에 시달리는 시장

지난해 11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 가치 있고 훌륭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시장은 가치를 제대로 분별해내지 못한다. 예컨대 500만 명에 이르는 우리나라 자영업자들의 부실과 폐업 문제에 대해 국가가 제도적으로 개입해 구제해주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몰락하는 수많은 치킨집 주인 중에 누구는 열심히 일해도 아이들 교육할 돈도 못 버는 선량한 사람이고, 그 옆 치킨집 주인은 서울 강남에서 술집을 함께 경영하는 깡패 출신일 수 있다. 이처럼 ‘도덕적 해이’에 끊임없이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게 시장이다.
시장 키즈는 오히려 가치를 판단할 정보는 시장가격에 이미 모두 포함돼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가격은 과거와 미래의 가치를 모두 반영한다는 것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황석영은 어디선가 “글은 자신이 살아온 꼭 그만큼만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역사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와 달리 시장주의자는 과거의 역사를 철저하게 무시한다. 실제로 상당수 경제학자들은 경제학계의 ‘살아 있는 고전’을 거의 읽지도 인용하지도 않는다. 이에 대해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는 로저 백하우스가 쓴 <경제학의 역사> 추천사에서 “미국의 젊은 경제학자들은 ‘5∼10년 전에 쓴 글은 읽을 필요가 없다. 현재 시점에서 발표된 글만 읽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과거의 모든 훌륭한 경제학자들의 통찰력과 분석이 요즘 쓴 글에 전부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현재’가 가장 최선의 상태라는 것으로, “지금의 시장 구조가 모든 사람들에게 최적”이라는 보수적 시장 이데올로기의 바탕을 이룬다.
서구의 시장을 수입해 지식 보따리에 싸서 사회에 퍼뜨려온 시장 키즈의 생각과 달리, 시장은 각국의 역사적·사회적·문화적 토양 속에서 자기 고유의 모습을 만들어가야 한다.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에는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지정학적 공간 속에서 그 나라의 사회와 기술, 경제성장 수준 등이 결정된다. 산이 없고 평지라서 고속도로가 직선인 독일은 시속 200km 고속주행이 가능하도록 자동차 브레이크 제동능력을 발달시킨 반면, 길이 구불구불해 고속주행이 어려운 한국의 자동차는 브레이크 성능 개선에 주력할 필요가 별로 없었다.
‘어떤 시장이냐’에 따라 다양한 자본주의 시장경제 유형이 존재한다. 물론 ‘시장이냐 정부이냐’의 대립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 문제는 △정부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느냐 △무엇을 시장에 맡길 것인가 △정부의 개입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가이다. 지금 한국에서 시장 키즈의 대표 격은 대통령 자리에, 또 경제부처 장관 자리에 취업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이들이 날마다 출근해 책상에서 펼쳐 보는 각종 보고서 한 귀퉁이에 ‘이제 우리는 모두 더 이상 시장 키즈가 아니다’라고 선명하게 써넣을 때가 올 것인가? 과연 ‘YS 키즈’들이 그런 날을 만들 수 있을까?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