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주 <한겨레> 경제부 기자
　
미국은 2006년 우리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시작하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선결조건’으로 내걸었다. 그 뒤 5년이 지난 2011년, 미국은 한-미 FTA가 발효되면 쇠고기 시장 전면 개방을 요구할 방침을 공식화했다. 왜 한-미 FTA와 쇠고기 시장 개방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됐을까?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에 걸린 소가 발견된 뒤 우리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액은 연간 8억6천만달러로, 우리나라는 미국의 3대 쇠고기 수출국이었다. ‘황금시장’을 잃은 미국은 다급한 마음에 우리나라와 FTA 협상을 시작하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협상 개시에 목말랐던 우리 정부는 세계동물보건기구(OIE)가 30개월령 이하 소의 살코기에 대해선 교역자유화 규약을 채택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재개했다.
그러나 첫걸음부터 삐걱거렸다. 한 달 만에 미국산 쇠고기에서 뼛조각이 발견돼 전량 반송되더니, 2007년 10월에는 갈비 등뼈까지 나와서 결국 수입 검역이 중단됐다. 우리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검역주권을 활용해 사실상 수입 금지 조처를 내린 것이다.
미국은 포기하지 않았고, OIE에서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를 인정받았다며 되레 쇠고기 시장 전면 개방을 요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쇠고기를 먼저 풀면 우리 국회가 한-미 FTA를 비준할 때 큰 장애를 겪을 것이라며 ‘선 비준 후 협상’ 전략을 세웠다. 그러자 미국도 한발 물러섰다.
정권이 바뀌자 전략도 바뀌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4월 첫 한-미 정상회담에 나서면서 미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선물’을 건넨 것이다. 미국이 ‘강화된 사료 조처’를 이행한다고 공표하면 월령 구분 없이 쇠고기 수입을 전면 재개하고, 검역주권도 미국에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이 대통령은 협상 결과를 보고받고는 “한-미 FTA의 걸림돌이던 쇠고기 문제가 합의됐다”며 만족스러워했다.

2008년 5월30일 시민들이 서울시청 광장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를 연 뒤 거리행진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촛불시위’로 상징되는 대규모 저항이 불붙었고, 대통령의 사과와 한-미 쇠고기 재협상이 이어졌다. 그 결과 ‘미국 쇠고기에 대한 한국 소비자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서는 수입을 제한한다’는 수입 위생 조건이 민간 수출업자의 자율규제로 도입됐다. 언제 다시 꿰맨 자리가 터질지 모르는 ‘불완전한 봉합’이었다.
‘채권자’가 된 미국 정부는 이명박 정부가 2008년 4월 약속한 애초의 ‘쇠고기 합의서’를 내밀며 쇠고기 수입 확대를 한-미 FTA와 연계해 끈질기게 압박했다. 우리 정부는 겉으로는 쇠고기 협상이 한-미 FTA와 별개의 사안이라고 주장하지만, 미국에 이미 건넨 ‘선물’을 물릴 수 없는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특히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의 한국에 대한 수출액이 전년보다 140%나 늘어난 5억1800만달러로 수입시장에서 32%의 점유율을 보이자, 미국은 한국 소비자의 신뢰가 회복되고 있는 ‘신호탄’ 이라며 압박 수위를 높여갔다.
올해 초 한-미 FTA 비준 절차가 본격화하면서 미국 쪽은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밀어붙일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30일 ‘2011년 나라별 무역장벽보고서’와 ‘2011년 위생검역 보고서’를 발표해 “미국산 쇠고기가 제한 없이 들어가도록 한국 시장을 전면 개방하는 일이 올해의 최우선 과제”라고 밝혔다. 그리고 지난 5월4일 론 커크 무역대표부 대표는 한-미 FTA가 발효된 뒤 한국에 쇠고기 시장 전면 개방을 요구할 방침을 공식화했다.
미국이 쇠고기 협상을 한-미 FTA 발효 뒤로 늦춘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해 2008년 4월의 ‘학습효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두 나라가 예전처럼 쇠고기 시장 개방에 덜컥 먼저 합의했다가 비판 여론이 몰아치면 우리 국회에서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을 미국 쪽이 받아들였다는 해석이다.

국민과의 약속 vs 미국과의 약속
지난해 12월 타결한 한-미 FTA 재협상에서 얻은 자동차 분야의 성과를 고려하면 한국의 쇠고기 시장 개방을 다소 늦추더라도 한-미 FTA를 빨리 발효하는 게 미국 쪽에 유리하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재협상에서 미국은 한국산 승용차에 대한 관세(2.5%)를 4년간 유지하고, 미국의 안전 기준을 통과하면 우리나라에서 바로 판매할 수 있는 미국산 자동차 수량도 기존 6천 대에서 2만5천 대로 4배나 늘렸다.
미국산 쇠고기의 한국 수출이 ‘고공행진’을 벌이는데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 관세 40%가 15년간 단계별로 철폐돼 그 행진에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도 미국의 ‘선 비준 후 협상’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미 농무부는 지난 4월 발간한 ‘통상협정이 미국 농업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한-미 FTA가 발효되면 미국 농산물의 한국 수출이 연평균 19조3300만달러가량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관세가 철폐되면 연평균 5억6300만달러가량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액(5억1800만달러)을 웃도는 수치다. 30개월 미만 쇠고기만 계속 수출하더라도 한-미 FTA 효과로 미국산 쇠고기는 두 배나 많이 우리 식탁에 올라올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 정부는 늘 그렇듯이 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가 한-미 FTA 발효 뒤 쇠고기 재협상을 공식화했는데도 정부는 “기존 입장과 달라진 것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점(.)이든 콤마(,)든 협정문에 다시 찍는 일은 없다’고 공언하다가 지난해 12월 한-미 FTA 재협상에서 협정문의 뼈대인 자동차 관세까지 변경하던 전례가 자꾸 떠오르는 이유다.
미국 쪽이 쇠고기 협상을 요청하면 우리 정부는 이를 거부할 권한조차 없다. 수입 위생 조건 제25조를 보면, 한-미 두 나라 가운데 한쪽이 수입 위생 조건의 적용 또는 해석 문제에 관해 협의를 요청할 수 있고, 이 요청이 제기되면 7일 안에 상대방이 이를 응해야 한다고 돼 있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 농축산 위생검역위원회가 설치돼 두 나라는 쇠고기 문제를 상시로 논의할 수 있게 된다.
특히 한-미 FTA에 포함된 투자자-국가제소제(ISD) 덕분에 미국 축산업계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중재를 신청해 배상을 받아낼 수도 있다. 지난해까지 ICSID 등에서 종결된 197건의 투자자-국가제소 사건 가운데 투자자가 승소하거나 합의해 상대국에서 보상받은 경우가 60%에 이른다.
2008년 5월 정운천 당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국회의 ‘쇠고기 협상 청문회’에서 “일본·대만·중국이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에서 한국보다 조건이 더 유리하게 타결하면 미국에 재협상을 확실히 요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은 20개월 미만, 대만은 30개월 미만의 미국산 쇠고기만 수입하며, 중국은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아예 전면 금지하고 있다. 정부가 국민과의 약속과 미국과의 약속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지 지켜볼 일이다.
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