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배 서울인베스트(주) 대표
　
한국 사회가 재벌 독재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알려주는 사례가 넘쳐난다. 영풍그룹 회장은 서른한 살의 딸이 운영하는 회사에 그룹 계열사의 일감을 몰아줘 무려 4500배의 수익률을 내도록 했다. 한국에서 기적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그의 자식들에게 내린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농담과 같은 기적을 서로가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주고받는다.
국내 최대 공기업 한국전력의 전 사장은 취임 뒤 모든 소모성 자재를 이전 근무회사인 LG그룹에 몰아줬다. 연봉은 국민기업에서 받으면서 충성은 LG 재벌 총수에게 한다. 이번 겨울올림픽 유치에 나선 전·현직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과 스포츠단체장 가운데 상당수는 각종 불법을 저질러 유죄판결을 받은 전과자다.

재벌을 무작정 좋아하는 사람들

박윤배 서울인베스트 대표는 얼마 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태광그룹 비리를 언론 및 검찰에 제보한 사람이다.

“대기업 하면 당장 떠오르는 단어는, 착취.” “이제 친시장 반재벌이 우리 당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대기업에 문제가 많다. 골칫거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
칼 마르크스의 말처럼 들리는 이 문장들은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를 비롯해 현재도 대기업을 소유한 전 한나라당 대표와 같은 당 소속의 젊은 국회의원이 한 말이다. 야당이나 좌파 ‘빨갱이’의 말이 아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이대로 계속 간다면 삼성도 망할 수 있고, ‘삼성 동물원’ 경제체제 때문에 한국의 위기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의 대다수 국민은 재벌을 좋아한다. 재벌 가까이 가지 못해 안달하며, 그와 비슷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재벌 대기업 유치에 관한 한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 완전히 저자세로 일관한다. 재벌 회장은 불법을 저질러도 감옥에 잘 가지 않고, 혹시 감옥에 가더라도 금방 풀려나거나 사면된다. 한국의 법은 미국 법에 가까워 시장질서 확립 의지만 있다면 크게 부족함이 없음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멀쩡한 오른손에 쥔 칼을 놔두고 쓸모가 전혀 검증되지 않은 왼손에서 그 무엇을 찾는다고 야단법석을 떤다.
삼성의 매출은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20%가 넘는다. 범삼성 일가로 확장하면 그 규모가 GDP의 30%에 이른다. 이건희 회장 일가는 초법적인 왕족처럼 행세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멀쩡한 주주총회가 있고 정관과 이사 임기와 이사회가 있는 회사에서, 법적 권한이 전혀 없는 미등기 삼성전자 회장이 어떻게 다른 회사의 대표이사 인사에 수시로 개입할 수 있는가?
삼성은 이미 일개 기업집단을 한참 뛰어넘어 국가와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 현상, 나아가 우주 만물에 미치는 중력처럼 거역하기 힘든 아이콘이 돼버렸다. 대통령의 말 무게와 이건희 회장의 말 무게는 참여정부 때부터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정치인과 관료는 누구의 편에 서야 자기 이익과 미래가 밝아오는지 잘 안다. 삼성의 지배구조는 삼성을 넘어 한국 사회를 지배한다.
한국 기업은 법과 이념에 따르면 분명 다수 주주의 회사이자, 더 넓은 의미로는 기업 활동의 근간이 되는 사회와 그 구성원의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최대주주 일가의 사적 소유물로 인식된다.
수천억원대 알짜 중소기업 세원정공 회장은 액면가 5천원짜리 주식을 10만원대로 만드는 동안 자신은 피땀을 흘려 노력했건만 주주들은 물 한 잔, 땀 한 방울 보태지 않은 주제에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괴롭힌다고 성을 낸다. 한국의 재벌 대기업이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와 불법을 일상화하는 동안 과연 중소기업은 일방적 피해자로만 존재해왔을까. 아니면 그들 또한 재벌 대기업과 비슷한 탈세와 배임·횡령의 첨단 기법을 열심히 따라하며 배우지는 않았을까.
대기업의 횡포와 등쌀에 못 견뎌 도태된 기업을 비롯해 억울한 중소기업이 많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상당수 또한 법과 시장경제의 원칙을 배척하고 오직 기업을 개인 소유물로 취급한다는 점에선 별반 차이가  없다.
한국 사회에서 기업지배구조란 말은 아직은 생소하다. 정치 분야에서 이미 익숙해진 ‘민주화’라는 말을 기업 분야에 적용한 것일 뿐인데, 일부 전문가들이 쓰는 전문용어쯤으로 이해되는 게 현실이다.
한국 기업의 대표이사 연봉은 국세청만 알 수 있는 정보다. 대통령 봉급도 공개되는 세상인데, 수만 명에 이르는 기업 사장들의 봉급은 비밀로 간주된다. 기업의 법적 주인인 주주가 대표이사의 연봉은 물론이고, 업무용 고가 자동차 구입 등으로 회삿돈을 낭비하는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다. 오직 별 의미도 없는 보수 한도만 공개된다.
특정 주주가 수천만원의 자기 돈을 들여 힘들게 소송을 벌여야만 겨우 국회가 정부에 요구해서 얻는 일상적 수준의 정보를 해당 기업에서 받아볼 수 있다. 감사나 사외이사는 견제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오히려 1년에 열흘 안팎에 불과한 회의에 참석하는 대가로 수천만원의 회사 재산을 축내는 양심불량 인사가 된 지 오래다.
주주 자본주의의 보루 주주총회는 어떤가? 한국의 기관투자자 대부분이 주주권 행사에 소극적이다. 공공적 연기금이나 민간 투자회사 가릴 것 없이 경영자의 경영 행위에 대한 건강한 견제 역할을 아예 포기하다시피 하고 있다.
한국의 유력 민간 투자회사 대부분은 재벌 계열사이거나 그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의 민간 투자회사들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다. 자신들의 억대 연봉은 한푼 두푼 모아준 일반 투자자에게 전적으로 의탁하면서, 투자자의 원금을 위협하는 최대주주 경영자의 배임, 횡령, 회사 기회 편취 행위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주주총회에서 일반 주주들은 천덕꾸러기 신세다. 한때 유행했던 주총꾼은 이제 거의 없다. 다만 회사가 심어놓은 ‘직원꾼’들에 의해 짜고 치는 일사천리식 의사 진행으로 대체돼 있을 뿐이다.
공공적 연기금이 주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관행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대주주나 주요 주주가 회사 가치에 영향을 줄 만한 정보를 공개하라는데, 해당 경영진이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긴 어렵다. 거부하면 법이 정한 주주권을 행사하면 된다.
공공적 연기금은 한국 자본시장의 최대 투자자가 돼 있다. 따라서 선진국에서처럼 자본시장의 격조를 높이는 역할이 절실함에도 도무지 그 존재감을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들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다. 2004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삼성전자 주총 모습.

좋은 기업이 절실한 사회
신도리코와 태광그룹의 실질적 지배권은 이제 막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한 대표이사의 아들에게 상속돼 있다. 이들은 어떻게 수천억∼수조원에 이르는 지배권을 갖게 됐을까? 한국에서 이들만 그랬다면 그 비법은 그들 가족 소수만이 독점하는 가문의 비밀로 밀봉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비법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실행하고 있다.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 즉 횡령, 배임, 회사 기회 편취 등이 그 비법이다.
한국의 기업지배구조를 말하면서 빠뜨리면 안 되는 게 있다. 신랄한 비판보다 중요한 건 좋은 기업의 출현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정직하지 않지만 돈 많은 사람을 흠모하고, 착하지만 돈 없는 사람은 배척한다. 마음 한쪽에선 이를 인정하길 거부하나, 다른 쪽에서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이 모순된 상황을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좋은 기업이 존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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