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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출근’ 기사 속 작아지는 저널리즘
[미디어 비평]
[15호] 2011년 07월 01일 (금) 이봉현 economyinsight@hani.co.kr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얼마 전 한 사진기자가 평소 취재원을 향하던 렌즈의 방향을 돌려 기자들 모습을 촬영한 몇 장의 사진을 보면서였다. 방송인 신정환이 귀국할 때와 그가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갈 때 김포공항과 서울경찰청 로비에는 취재와 사진, 방송 카메라 기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어 거대한 ‘만리장성’을 쌓는 사진이었다.
<연합뉴스>나 <뉴시스> 같은 통신사에서 취재하고 사진을 찍어 제공해도 별다를 것 없는 ‘토막 취재’ 현장에 그 많은 기자들이 몰려든 것은 일종의 병리 현상으로 보였다. 포털이란 뉴스 할인점에서 ‘낚시성 제목 장사’를 주업으로 하는 영세 온라인 매체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제법 큰 신문사와 방송사가 말초적 흥미에 영합하는 사이에 저널리즘의 가치가 파기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사진이었다.
최근에 그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은 이건희 삼성 회장의 출근과 관련된 기사를 보면서였다. 이 회장은 지난 4월21일부터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으로 아침에 출근한다. ‘회장이 자기 회사에 출근하는 것도 뉴스가 되느냐?’는 의문이 들지만, 국내의 모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이후 ‘두 번째 출근’ ‘세 번째 출근’ 등의 기사가 나오고, 한번은 이 회장이 해외 출장의 여독이 풀리지 않아 집에서 쉬자 ‘이 회장 출근 안 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이렇게 회장의 출근에 관심이 많다 보니 출근하는 날 사옥 앞은 기자들과 회장 보좌진, 삼성 홍보맨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를 묘사한 기사를 잠시 옮겨보자.
“때맞춰 현관 1층을 가로질서 처진 줄 밖으로 삼성그룹 출입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방송 카메라도 여러 대 설치됐다. 줄 안쪽으로는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팀과 삼성전자 홍보실 직원들이 기자들을 막아섰다. …같은 시간, 현관 안에서 커뮤니케이션 직원들이… ‘위에서 오늘은 기자들이 질문하지 않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오늘도 큰 소리로 질문을 하면, 다음부터는 회장 출근 때 기자들의 현관 출근을 차단하겠다’고 농담 섞인 엄포를 늘어놓기도 했다. …이 회장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취재수첩과 녹음기를 들고 이 회장의 ‘한 말씀’을 기대했던 기자들도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아침 식사 하러 갑시다.’ 현장에 나와 있던 커뮤니케이션팀 직원이 기자들을 향해 날린 서비스 멘트다.”(<한겨레> 6월14일치)

이 회장이 ‘툭’ 던진 한마디에 목매는 기자들
   
지난 4월 21일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서울 서초동 사옥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 사옥에서 매주 4차례(이 회장 퇴근까지 포함) 벌어지는 이런 형태의 취재를 ‘도어스테핑’(Door Stepping) 또는 ‘샷건 인터뷰’(Shotgun Interview)라고 한다. 인터뷰하기 어렵거나 꺼리는 유명인사에게 사전 약속 없이 기자가 기습적으로 하는 자터뷰를 말한다. 평소 만나기 어려운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이런 인터뷰는 잘하면 큰 기사를 건질 수 있다.
그래서 욕심 많은 기자는 장관 등이 공식 기자회견을 마친 뒤 명함을 건네는 어수선한 틈에 곁으로 접근해, 미리 준비한 질문을 지나가는 말처럼 묻기도 한다. 실제 “이명박 경제정책 낙제 면한 수준” 발언이나, “삼성그룹 전체에 부정부패가 퍼져 있다”는 발언 등은 이 회장의 동선을 따라다니던 도어스테퍼들에 의해 알려졌다.
이 회장의 이런 발언들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불쑥 나온 것일 수 있고, 커뮤니케이션 팀의 치밀한 조언에 따라 준비된 것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특정 유명인에 대한 기사가 도어스테핑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은 저널리즘 원칙에 견줘 정상이라 할 수 없다. 언론학에서 취재원과 기자의 관계를 ‘줄다리기’(Tug of War)에 비유하지만, 이런 경우는 취재원의 힘이 압도적이 됨으로써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라는 기자의 사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먼저, 평소 언론 노출이 적은 취재원이 벌떼처럼 몰려든 기자들에게 입을 열어 뭔가를 말했다는 상황은 언론의 원초적 책무인 기사 가치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그가 말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얘기를 했느냐는 다음 문제가 되어버린다. 영어로 ‘유명인’을 뜻하는 셀레브리티(Celebrity)란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란 말이 있는데, 이 회장이 유명하기에 다들 쓸 것이므로 우리도 지면을 크게 할애해야 한다는 ‘서로 보고 베끼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둘째, 기자로서는 취재원의 진의가 충분히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홍보맨이 불러주는 대로 소설을 쓸 가능성이 높다. 이 회장이 짧은 시간에 스치듯 한두 마디 던지고 떠나면 나머지는 온전히 기자의 몫이다. 물론 고민하는 기자에게 홍보맨들이 다가와 “회장님 말씀은…”이라며 이런저런 자료를 주고 부연설명을 해준다. 문제는 이런 설명을 통해 삼성은 평소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지면에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기자 처지에서는 그게 정말 이 회장이 말한 진의인지 확인되지는 않지만 받아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삼성으로선 회장님 관련 기사이니 크게 실릴 게 분명하고, 자신들이 내놓은 배경 설명이 스폰지에 물 스며들 듯 반영될 텐데, 이참에 원하는 ‘어젠다’를 만들어볼 욕심이 들지 않겠는가?
셋째, 애드벌룬 띄우기에 활용한 뒤 여차하면 부인해버릴 여지가 많다. 이렇게 되면 해설 기사에, 기자 칼럼에, 사설까지 쓴 언론만 ‘양치기 소년’이 된다. “정부의 경제정책이 낙제점은 아니다”라는 이 회장의 발언에 청와대가 발끈하자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언론에 떠넘긴 것이 대표적 예다.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하던 1990년대 초의 발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축구의 오심도 경기의 일부’가 되듯, 잘못 전달됐든 아니든 일단 대서특필된 발언은 생물처럼 살아서 현실을 어떤 식으로든 구성한다. 이런 일이 잦으면 사회의 언로가 혼탁해진다. 진의는 아니라는데 가만 보니 실제 의도한 것 같은 권모술수의 악취가 진동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대변하는 기자가 설 자리는 없다. 보통 사람들은 뉴스를 보면서 갖게 되는 의문을 어떤 기자도 질문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이 회장이 지난 2월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최근 “삼성에 부패가 퍼져 있다”고 했을 때, 언론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을 게 아니냐?”고 물어봤어야 한다.

이 회장이 싫어할 질문을 하는 기자는?
최근 마이크로소프트(MS) 설립자 빌 게이츠가 자신의 재산이 560억달러(약 63조원)쯤 되지만 세 자녀에겐 1천만달러(108억원)씩만 물려줄 것이란 내용의 기자회견을 영국 <데일리 메일>과 했다. 재미있었던 것은 기자가 “자녀들이 애플의 아이패드나 아이폰, 아이팟을 사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한 것이다. 빌 게이츠는 굳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지만 “MP3 플레이어 ‘준’ 같은 MS 제품을 사준다”고 대답했다.
MS가 애플과 앙숙인 것을 알면서 기자가 짓궂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당신의 권위에 주눅 들어 당신이 원하는 것만 묻지 않겠다’는 자기 다짐일지 모른다. 아무리 회장님의 ‘포스’가 강하더라도 기자의 자존심과 가치는 스스로 높여야 한다.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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