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예랑 <한겨레> 경제부 기자

10년 전 그는 모든 것을 걸었다.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으로 받은 회사 주식과 살고 있던 아파트까지 처분해 20억원의 전 재산을 털었다. 그의 나이 51살. 은퇴를 생각할 나이였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세 아이에겐 “앞으로 너희 학비를 못 댈지도 모르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모든 것을 걸고 사들인 건, 20여 년간 몸담은 회사인 쌍용중공업의 주식이었다. 그는 월급쟁이에서 회사 오너로 변신했다. 10년 뒤인 2011년, 그는 재계 순위 12위(공기업 제외)인 그룹의 총수가 됐다. STX그룹 강덕수 회장 이야기다.

강덕수 STX그룹 회장이 지난 5월29일 중국 다롄에 있는 ‘STX 다롄 조선·해양종합생산기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그룹 출범 10돌을 맞은 소감과 2020년까지의 경영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강덕수란 사람은 27년 동안 ‘쌍용맨’으로 근무한,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동대문상고를 나온 그는 1973년 쌍용양회에 평사원으로 입사했고, 쌍용그룹 계열사의 경영관리·기획직 등을 거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뒤 1992년 쌍용중공업 관리담당이사로 승진했다. 여기까지는 여느 샐러리맨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이었다.
하지만 그가 쌍용중공업 최고재무관리자(CFO)로 있던 2000년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쌍용중공업이 외환위기 뒤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퇴출 위기에 놓인 것이다. 쌍용그룹은 쌍용중공업 지분을 외국계 컨소시엄에 넘겼다. 강 회장은 최고경영자(CEO)로 발탁됐다. 그때 그는 ‘직접 회사의 주인이 되겠다’는 인생 최대의 결단을 내린다. 평소에 “나는 나를 월급쟁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몸담은 회사이니 내 회사라는 오너의 자세로 일했다”고 말해온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2001년 5월2일, 경남 창원에 있는 당시 쌍용중공업 공장에선 ‘STX’의 출범을 알리는 선포식이 열렸다. STX란 회사 이름은 ‘System Technology eXcellent’, 시스템과 기술이 훌륭한 회사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지었다. 우선 쌍용중공업의 선박용 엔진 부품사업 부문을 떼어내 STX엔파코를 세웠고, 차례로 2001년 STX메탈, 2004년 (주)STX와 STX중공업, 2005년 STX건설을 설립했다.

모험심 강한 기업가

중국 다롄의 STX 조선소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선박 건조 작업을 하고 있다.

공격적인 투자를 통한 기업 인수·합병으로 덩치를 키웠다. 2001년 대동조선(현재 STX조선해양), 2002년 산단에너지(현재 STX에너지), 2004년 범양상선(현재 STX팬오션), 2007년 아커야즈(현재 STX유럽) 등이 STX그룹이란 ‘우산’ 아래 들어왔다. ‘조선기자재-엔진-선박 건조-해운-에너지’로 이어지는, 완벽한 수직계열화 뼈대를 갖춘 셈이다.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2011년 4월29일, 중국 다롄의 STX 조선·해양 종합생산기지에서 STX그룹의 1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2000년 쌍용중공업 시절, 2605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은 지난해 26조5천억원으로 100배 이상 늘어났고, 848명이던 직원 수는 6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13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한국뿐 아니라 중국·유럽 등 8개국에 조선소를 보유한 세계적 기업이 된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STX그룹이 이처럼 무섭게 성장할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은 뭐니뭐니 해도 강덕수란 인물의 힘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에 참석하는 그룹 총수 가운데, 자신의 힘만으로 회사를 일군 창업 1세대는 강 회장이 유일하다.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이후 이렇다 할 성공 신화가 없던 재계에서 강덕수 회장이 주목받는 이유다. 기업가정신이 사라진 시대에, 새로운 기업가의 전형으로 강 회장을 꼽는 이들도 있다. 평범한 직장인에게 강 회장은 막연하게나마 희망을 품게 하는 ‘성공 모델’이다. 그는 어떤 특별함이 있기에 ‘샐러리맨의 성공 신화’가 될 수 있었을까?
강덕수 회장은 모험가다. 기업 총수가 된 지금도 그의 행보는 거침없다. “지금 바그다드로 들어가는 건 위험합니다. 체결식을 미루는 게 어떨까요?” STX 임원들은 지난해 1월 이라크 바그다드로 향하던 강 회장을 만류했다.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총리와 만나 이라크 남부 바스라주에 연간 300만t 규모의 일관공정 제철단지와 가스복합화력발전소를 짓는 양해각서(MOU)를 맺기로 약속했는데, 며칠 전 바그다드 시내에서 연속 폭탄 테러가 일어나 수십 명이 숨진 터였다.
하지만 강 회장은 임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그다드로 향했다. 굵직한 프로젝트를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강 회장의 면모가 잘 드러난 에피소드다. 강 회장은 한 해 넉 달 이상을 외국에 머문다. STX그룹의 매출 90% 이상이 외국에서 나오는 만큼, 발로 뛰며 사업확장에 앞장선다. 아프리카 가나에서 100억달러 규모의 초대형 건설사업 프로젝트를 따낸 것도 강 회장이 존 아타밀스 가나 대통령을 만나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한 덕분이었고,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과도 만나 협력 방안을 의논했다.
또한 강 회장은 욕심이 많다. 특히 사람과 다른 기업에 대해서 그렇다. STX그룹의 덩치가 오늘날처럼 커진 데는 ‘미다스의 손’이라고 불리는 강 회장의 안목이 큰 역할을 했다. 조선(STX조선해양)과 해운(STX팬오션)에 이어 국내에선 처음으로 크루즈선을 건조할 수 있는 조선소(STX유럽), 풍력발전기 제조회사(STX솔라) 등을 인수·합병했고, 이 기업들은 STX그룹 품 안에서 알짜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룹 내 중책은 인수·합병한 회사 인물들에게 믿고 맡겼다. 그룹의 해운 및 무역 부문을 총괄하는 이종철 부회장과 홍경진 STX조선해양 부회장 등은 모두 범양상선 출신이다. “인재 말고는 길이 없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이 부족하다.” 강덕수 회장의 인재 욕심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 장관을 에너지 부문 회장으로 영입하는 등 유명 인사에 욕심낼 뿐만 아니라, 매년 신입사원 공채 면접을 직접 챙길 정도로 젊은 직원에 대한 애정이 깊다. 강 회장 스스로 2005년 첫 그룹 공채로 신입사원 440여 명을 선발했을 때를 ‘기업인으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을 정도다.
한 20대 그룹 임원은 “STX는 요즘 재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기업”이라며 “유동성 위기설 등에 끊임없이 시달리는데, 강 회장이 이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물론 질투 섞인 시선도 있다. 회사 성장 속도가 빨랐던 만큼, 체질이 허약해 외부 충격에 쉽게 흔들릴 위험 요소를 많이 안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실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룹 주력인 조선·해운업의 침체로 구조조정 위기를 맞았고, 지난 3월엔 STX건설 부도설이 증권가에 급속도로 퍼지기도 했다. 한 경쟁업체 관계자는 “STX가 강 회장의 개인 리더십에 기대고 있어, 거품이 빠지면 위태로워 보인다”고 말했다. ‘강덕수 신화’의 그늘이다.
강 회장은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고 있다. 강 회장은 그룹 출범 10주년 기념행사에서 “누구나 STX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제 우린 과거 영광에 연연하지 않겠다”며 “STX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자리는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미래 10년은 자원·에너지 분야에 주력해, 2020년 매출 30조원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조선·해운업에 집중된 매출 구조를 플랜트 건설, 친환경 엔진, 에너지 등으로 다변화할 방침이다. 시장과 업종을 두루 살펴, 또 다른 기업의 인수·합병에 나설 뜻도 내비쳤다. 그룹 내 미래기획위원회를 두고 1년 동안 미래 먹을거리를 고민해 내놓은 결과물이다.
‘강덕수호’의 미래에 대한 걱정 못지않게, 요즘 부쩍 떠오르는 이슈는 경영권 승계와 지배구조 개선이다. 강 회장은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대신,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겠다는 뜻을 평소 여러 차례 밝혀왔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의 어떤 재벌기업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애플의 사례에서 보듯, 결국 세계적인 기업을 지배하는 건 자본가(오너)가 아니라 유능한 경영자다. 유럽과 브라질만 해도 100년 정도 된 기업 가운데 한국처럼 한 사람이 주식을 갖고 지배하는 기업은 별로 없다. 유럽의 유명한 기업 오너들은 ‘최대주주’(Main Shareholder)라고 쓰인 명함을 갖고 다닌다. 우리나라도 머지않은 장래에 그렇게 될 거다. 지배구조란 극히 한국적인 생각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기업지배구조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

아슬아슬한 강덕수 ‘원맨쇼’
경영권 승계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강 회장이 길게 늘어놓은 대답이다. ‘딸이나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말인가’라고 재차 물었을 때도, 그는 “경영능력이 없는데 자식이란 이유로 회사를 물려주면 수만 명의 일자리가 온전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지분은 물려줄 수 있으되, 경영권은 별개 문제라는 대답이었다.
강 회장은 두 딸과 아들이 하나 있는데, 셋 다 아직 공부 중이다. 그렇다고 딱 잘라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경영능력을 잘 키운다면 달라질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 회장의 두 딸은 비상장 계열사인 STX건설의 지분 50%를 나눠갖고 있다.
최근 시민사회단체들이 강 회장과 STX에 눈을 홉뜨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강 회장과 두 딸이 지분 75%를 가진, 사실상 개인회사나 다름없는 STX건설이 자주 도마 위에 오른다. STX건설은 중국 다롄조선소 건설 등 계열사들이 일감을 몰아주면서 급속도로 외형이 커진 회사다. 이 회사의 계열사 매출 비중은 80%가 넘는다. 일부에선 강 회장 일가가 최대주주인 STX건설을 상장시켜 경영권 승계 발판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의심한다. 비상장사를 통한 전형적인 ‘부의 대물림’ 방식이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지난 3월 STX건설의 부도설이 증권가에 퍼진 뒤 “STX건설과 자회사의 유동성 위기를 그룹 비상장 계열사에 떠넘길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계열사들이 STX건설과의 거래를 더 확대해 간접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는 경고다. 채이배 회계사는 “최근 STX 계열사들이 전체적으로 유상증자를 하고 있는데, 강덕수 회장이 책임져야 할 유동성 위기를 다른 계열사로 떠넘길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제기에 이어 최근 경제개혁연대는 STX중공업이 지난 5월 1천억원의 유상증자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최대주주(지분율 94.06%)인 STX조선해양이 불참하고 그룹 지주회사 격인 (주)STX에 실권주식을 제3자 배정한 것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STX중공업이 곧 상장을 앞두고 있어 상당한 차익이 예상되는데도 STX조선해양이 주식을 실권한 이유가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경제개혁연대는 또 “신주 발행가액이 주당 2500원인 것도 저가 발행에 해당한다”며 “발행가액 산정 근거를 밝히라”고 STX 쪽에 요구했다. 이 유상증자가 끝난 결과, STX조선해양의 STX중공업 지분율은 57.5%로 낮아졌고, (주)STX는 지분율 35.1%의 2대 주주가 됐다. 문제는 이후 STX중공업이 주식시장에 상장될 경우 (주)STX 지분을 가진 강덕수 회장과 다른 계열사(강 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비상장 정보기술(IT) 계열사인 포스텍)들은 이익을 보는 반면, 실권한 STX조선해양과 그 주주들은 손해 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재벌의 구태 따라하나
STX그룹 쪽은 “조선해양이 올해 설비투자를 재무투자보다 우선순위에 뒀기 때문”이라며 “그룹사 전체로 유상증자와 실권, 제3자 배정 등을 결정한 게 아니라 계열사들이 자체 판단한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STX조선해양이 중공업 지분을 94%나 갖고 있었기 때문에 리스크 해소 차원에서 지분율을 낮출 필요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지주회사 격인 (주)STX를 중심으로 기업지배구조를 재편하려는 움직임과 맞닿아 있다. (주)STX는 앞서 2050억원의 유상증자를 실시해, STX중공업의 지분 확보에 필요한 ‘곳간’을 채워뒀다.
STX그룹이 계속 기업지배구조 이슈에 노출되는 데 대해, 이석제 미래에셋증권 연구위원은 “STX 자체가 굉장히 조심스러운 기업이라, 지배구조 문제로 인한 무리수를 두진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연구위원은 “이번 STX중공업 유상증자 건만 하더라도, 고객사인 중동 발주처에서 자본금이 2500억원밖에 되지 않는 STX중공업 쪽에 자본금을 확충할 것을 계속 요구해왔기 때문”이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의 판단은 조금 다르다. STX그룹 역시 앞서 삼성이나 현대가 그랬듯이, 재벌 체제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STX그룹은 외환위기 이후 성공적인 전문경영인 출신의 최고경영자(CEO)가 등장한 유일한 재벌 기업이다. 강덕수 회장은 새로운 그룹 문화를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STX그룹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고 재무상태가 나빠지면서, 최근 부쩍 강덕수 회장이 ‘석연치 않은 거래’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게 시민사회단체들의 우려다. 김 교수는 “강 회장이 과거 부정적 재벌 경영모델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또한, STX그룹은 30대 대기업 가운데 내부거래 비중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안았다. 경제개혁연대가 지난해 STX건설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를 조사해달라고 요청해,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가 진행 중이다.
강덕수 회장은 과연 ‘샐러리맨의 신화’를 넘어, 한국 재벌사에 기록될 만한 또 다른 ‘신화’를 써내려갈 수 있을까. 그 신화의 첫 페이지는, 강 회장이 기업지배구조와 경영권 승계라는 어려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미 그룹 총수 일가가 최대주주로 있는 비상장사 설립, 일감 몰아주기 등 기존 재벌과의 ‘닮은꼴’ 행보로 흠이 갔지만, 2세가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는 경영권 승계 방식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 될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는 대신 미래에 주목하겠다”는 강 회장의 다짐이, 사업계획뿐만 아니라 회사의 미래 지배구조까지 포함한 것이길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성공 신화를 남긴 기업인은 많지만, 존경받을 만한 기업가정신을 남긴 기업인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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