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아네 랑로크 쾨겔 Christiane Langrock-Kögel 전 <쥐드도이체 차이퉁> 기자

텅 빈 가게 안을 밖에서 들여다보니, 깨끗하게 청소된 콘크리트 바닥과 베이지색 벽이 눈에 띈다. 얼마 전만 해도 채소 통조림과 햄, 음료수 상자가 진열돼 있던 곳이지만 이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열대 과일을 담은 쟁반이나 치즈가 얹힌 고급스러운 나무 도마 등 동네 슈퍼마켓의 전형적인 모습이 사라졌다. 창문에 붙어 있던 ‘토마 슈퍼마켓’이라는 가게 이름도 떨어졌다. 400㎡ 크기의 텅 빈 가게는 독일 서부에 위치한 뒤렌시 그륀귀르텔 구역의 유일한 식료품 상점이었다.
 

도시설계자 위르겐 슈펠탄과 도르프 창시자 하인츠 프라이.

독일 니더작센주의 시골마을.

이 버려진 슈퍼마켓 주위의 도로명은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에서 따왔다. 괴벤 거리, 블뤼헤 거리, 룬 거리 등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19세기 프로이센 장군들이다. 2~3층짜리 벽돌집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지어졌다. 녹지로 둘러싸인 이 구역은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택지를 확대하는 대신 건물을 점점 높이 올렸다. 현재 뒤렌시에는 시민 9만 명이 살며, 그중 4500명이 그륀귀르텔 구역에 거주한다. 이 구역의 집들은 대부분 비영리 주택조합에 속해 있다. 주택조합은 슈퍼마켓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가게를 세우려고 한다. 이 가게는 과일과 채소를 파는 일 이상의 기능을 갖출 것이다. 문턱을 낮춘 상담 프로그램과 이웃끼리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도 제공한다. 주택조합 대표자 다그마르 룽게는 “그륀그뤼텔 구역 안에 새로 단장해 문을 열 이 상점이 지역사회의 구심점으로 커나가는 동시에, 이 구역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요즘 주택조합이 주택을 공급하는 일 외에 정성을 쏟는 사안이다.

식료품 가게 사라진 그륀귀르텔 구역
룽게는 새로운 식료품 가게를 열거나 주민이 모이는 공간을 만드는 것과 관련한 경험이 전혀 없다. 하지만 그녀는 20km 떨어진 마을인 바르멘이 이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진행시킨 사례를 알고 있다.
바르멘 주민은 몇 년 전 마을 안 상가들이 모두 문을 닫자, 가까운 거리에서는 아무것도 살 수 없고 의사 진료도 받을 수 없었다. 현금 인출도 불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 놓인 주민 1400여 명이 힘을 모았다. 그들은 ‘도르프(DORV) 센터’라는 공간을 마련했는데, 그곳에서는 우편 서비스와 은행 서비스가 가능할 뿐 아니라 병원과 약국까지 들어섰다. ‘도르프’는 ‘공공 및 민간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며(Dienstleistung), 사는 곳 근처에서 삶에 필요한 것을 모두 구할 수 있음(Ortsnahe Rundum Versorgung)’을 뜻하는 독일어 약자다. DORV는 또 독일어로 ‘작은 마을’을 뜻하는 ‘Dorf’와 발음이 같다. 2004년 바르멘 마을이 성공시킨 도르프는 곧 독일 전역에 퍼져나갔다. 도르프가 작은 마을과 시내의 상점을 되살리고 여러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성공적 모델이 된 것이다. 도르프 센터는 이제 아헨시 외곽의 프로이스발트, 베스트팔렌주 마을인 링하우젠 등지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곳 뒤렌시 그륀귀르텔 구역에서는 센터 개장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밖에도 독일 전역에서 10개 지역이 구체적으로 도르프 센터를 계획하고 있다.
독일의 작은 도시와 마을들은 왜 도르프 센터에 눈길을 돌리고 있을까? 도르프는 독일 전역의 가난한 마을들에서 우체국과 은행 지점이 철수하고, 빵집과 정육점 등 가게들이 문을 닫고 떠나버리는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일까? 작은 마을인 바르멘의 모델로 출발한 도르프 센터가 서비스가 낙후되기는 했지만, 시 단위의 뒤렌시 그륀귀르텔 구역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평생 산 마을에서 떠나지 않기
우선, 도르프 센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자. 도르프 센터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인 바르멘 마을 주민 하인츠 프라이(54)는 고등학교 교사이자 시의원이다. 그는 도르프 센터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발전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사는 마을을 구하고 싶었고, 자신과 이웃들이 작은 마을에서도 평생 잘살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노인들이 필요한 것을 마을에서 구할 수 있어서 평생 정든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젊은이들도 잠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마을을 떠나게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짙은 밤색 눈을 가진 프라이는 상냥한 인상이었다. 그는 쉬지 않고 움직일 정도로 하루 일정이 빼곡히 계획돼 있었다. “나는 농장에서 자랐기 때문에 하루 종일 바쁜 것에 익숙하다.” 그의 노력 덕분에 바르멘 주민은 도르프 센터에서 자동차를 등록하고, 현금을 인출하고, 여행상품을 예약할 수 있다. 편지와 소포를 부치고,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도 있다. 가정의학 전문의와 치과 의사의 진료를 받고, 약을 구입할 수 있다. 막 구운 빵과 신선한 고기, 채소, 그리고 일상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이웃 마을의 정육업자가 고기를 배달해주고, 지역 내의 빵집과 농장에서 빵과 채소를 가져다준다. 가루 수프나 밀가루 등 다른 물건들은 소단위 배달로 필요한 만큼 공급받는다. 도르프 센터의 카페에서는 곧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이다. 이 모든 것이 마을 중앙에 자리잡은 1960년대에 지은 소박한 벽돌 건물 안에서 이뤄진다. 센터 여기저기에서 동네 할머니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띈다. 할머니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센터에 들른다. 바르멘 마을의 도르프 센터가 보여주는 이런 모습이 뒤렌 주택조합의 룽게가 말하는 ‘지역사회의 구심점 구실’일 것이다.
바르멘 마을의 도르프 센터가 순항하자 여기저기서 긍정적 반응이 잇따라 나타났다. 이런 반응에 힘입어 바르멘 마을은 로버트커상과 ‘독일-아이디어의 나라’라는 지역 발전 프로젝트로부터 표창받을 수 있었다. 독일 서부에 위치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는 도르프를 주 시범사업으로 지정해 방송과 신문에 홍보했다. 다른 지역들이 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하인츠 프라이를 주목했다.

집집마다 돌며 주민 설득 작업 벌여
‘도르프 센터가 다른 지역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가?’ 자원봉사 형식으로 도르프 센터 운영을 맡은 하인츠 프라이는 이런 질문을 받고서야 바르멘에서 진행하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센터가 어떻게 바르멘에서 잘 작동할 수 있었을까? 거기에서 어떤 규칙을 끌어낼 수 있을까? 마을 주민에게는 어떤 기준을 충족시켜야 할까? 프라이는 이런 주제로 아헨 출신의 젊은 도시개발계획자이자 프로젝트 매니저인 위르겐 슈펠탄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에 따라 아헨시 외곽의 프로이스발트는 초기에 도르프 센터 시스템을 도입하게 됐다.
그때부터 그들은 함께 일하면서 바르멘 모델에 관심 있는 공동체들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분석했다. 이러는 동안 도르프 센터가 가능한지에 대한 사전 조사는 유료 컨설팅 서비스로 발전했다. 프라이 등은 일의 정도에 따라 최대 5천유로를 받고 있다. 프라이는 연방정부 건설부의 자문위원으로도 위촉됐다.
현재 도르프 센터를 지탱하는 5개 기둥은 모두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주민 간 소통 △공공 혹은 민간 서비스(우체국·은행·학교·식당 등) △사회복지 및 의료서비스 △생필품 구입 △문화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프로젝트 매니저인 슈펠탄은 “도르프 센터가 성공하려면 5개 기둥이 모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라이와 슈펠탄은 주거지 근방에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조달하는 것을 주제로 연구하는 사회학 교수와 도르프 센터에 대한 정관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도르프 센터는 마을이나 구역의 주민들이 이끌 때 잘 운영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민 의식 일깨우기’라고 명명된 첫 번째 단계다. 바르멘에서는 이것이 뒤렌시 그륀귀르텔 구역에서보다 쉬웠다. 작은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잘 알고 공동체 내 취미 클럽 등 활동이 더 활발하기 때문이다. 바르멘에서는 도르프 센터를 주도했던 마을 지도자급 인사들이 집집마다 설문지를 들고 방문했다. 그들은 도르프 센터에 대해 자세히 알리고 주민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했다. 그륀귀르텔 구역에도 주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주민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설문조사했다. 바르멘에서 진행된 것과 절차는 똑같았지만, 구역의 크기가 더 큰 탓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도르프 센터는 주민들이 원하는 바를 최대한 충족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 뒤렌의 도르프 센터 옆에는 신문 가판대가 있기 때문에 센터 내 상점에서는 신문을 팔지 않는다. 대신 세탁소는 꼭 필요하다. 도르프 프로젝트를 위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구역 주민들은 “보안이 유지되는 신고센터가 가장 필요하다”고 말했다. 바르멘에서는 도르프 센터에 경찰이 근무하는 것은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간병이나 노인 돌봄 서비스를 받게 하는 것이 중요한 테마였다. 바르멘의 도르프 센터에서는 마을에 의사를 다시 상주시키는 것이 중요한 안건이었던 반면, 뒤렌에서는 사회복지 서비스와 상담을 제공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로 드러나는 등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250유로어치 도르프 센터 지분 구입
바르멘과 뒤렌시에 설치하는 도르프 센터의 큰 차이는 운영 모델에 있다. 바르멘은 주민 참여 모델을 선택했다. 도르프 센터를 시작하려면 10만유로(약 1억5천만원)가 필요했다. 많은 주민들이 센터 지분을 250유로(약 37만원)에 샀다. 하인츠 프라이와 그 동료들은 바르멘 주민들을 설득해서 그들이 도르프 센터에 이자를 받으며 돈을 빌려주도록 했다. 센터의 많은 부분이 주민 손으로 지어졌다. 지금까지 카페는 공사 중인데, 프라이는 토요일 하루를 잡아서 주민들이 바닥재 교체 공사를 같이 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도 여전히 자원봉사직으로 도르프 센터 운영자 자리를 맡고 있다. 도르프는 정규직 2명과 미니잡(Minijob) 직원 6명을 고용하고 있다. 약 공급을 맡은 약국에서 수수료를 받고, 스파르카세은행은 현금인출기를 설치한 자리의 월세를 받는다. 도르프 센터는 손익분기점에 딱 놓여 있는데, 이는 굳이 흑자를 낼 필요가 없는 탓이기도 하다. 만일 이익이 생긴다면 센터에 재투자할 것이다.
뒤렌에는 다른 모델의 도르프를 세운다. 이 시에서 도르프 센터 지분을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지 않다. 그륀귀르텔 구역의 도르프는 사회 통합 모델로 세울 계획이다. 국제적 지원단체인 카리타스(Caritas) 재단의 산하단체인 ‘인 비아’(IN Via)가 이 센터를 이끌어갈 것이다. 인 비아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단체이다. 인 비아가 계획하는 사회 통합적 모델은 오랫동안 일자리를 갖지 못한 실업자나 심리적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카페나 가게에서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인 비아 운영자인 노베르트 쇨러는 이를 위해 유한책임회사를 설립 중이라고 밝혔다.
위르겐 슈펠탄과 하인츠 프라이가 함께 계산한 바에 따르면, 바르멘만 한 크기의 지역(인구 1400명)에서는 각 주민이 생필품의 12% 정도를 도르프 센터 내 가게에서 구입해야 도르프 센터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주민들이 나머지 88% 정도를 규모가 크고 세일을 많이 하는 대형 상점에서 구입해도 된다는 이야기다. 4500명이 거주하는 그륀귀르텔 구역은 이보다 여유가 있다. 다시 말해 주민들이 도르프 센터에서 생필품의 10% 미만을 구입해도 센터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민과 소통이 마을가게 생존 조건
바르멘의 도르프 센터 내 비영리 카페를 짓는 공사장에서 프라이는 센터 운영장으로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말했다. “우리는 주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는 센터를 스스로 만들 수 있게 주민들을 인도한다.” 사회적 문제를 낙관적으로만 보려는 자세로는 도르프 센터를 운영할 수 없다. 센터가 설립되는 길은 험난하며, 시민들과 긴밀히 협조해야 이뤄낼 수 있다. 슈펠탄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컨설팅 서비스를 하고 조금이나마 돈을 받는다. 이것이 주민들의 참여를 불붙게 한다”고 말했다.
슈펠탄과 프라이가 컨설팅할 때 내거는 조건은 센터 설립에 대한 컨설팅 단계를 모두 준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모임을 통해 주민들에게 단계별 진행에 대해 알려줘야 한다. 이런 광범위한 지지가 없는 곳이라면 도르프 센터 건립 계획은 철회될 수밖에 없다.
도르프 컨설팅은 이미 외부에서 의뢰한 20건에 대한 기초조사를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 컨설팅 작업에 변화가 생겼다. 슈펠탄은 ‘제넬라리 추쿤프트 기금’(Generali Zukunftsfonds)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려고 한다. 주민의 공동체 참여를 독려하는 데 관심을 둔 비영리 기금인데 옛 동독 지역 마을 4곳에 도르프 센터를 세울 수 있는지 조사하는 작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에펠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한 유럽연합 프로젝트도 도르프를 세울 파트너로 마을 4곳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프라이와 슈펠탄은 도르프 센터가 잘 유지되는지 평가하는 일도 한다. 이제까지 그들은 주로 센터 문을 여는 데까지만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초기화 단계가 지난 뒤에도 각 센터의 유지를 도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예를 들어 도르프 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거나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을 모니터닝하는 것이다. 도르프가 들어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기능이 잘 유지돼야 하기 때문이다. 슈펠탄이 말했다. “우리는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에 있다. 서둘러 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너무 갑작스럽게 여기저기서 도르프 센터의 5개 기둥에 대해 말하게 될지 모르니까.”
ⓒ Enorm(www.enorm-magazin.de)·번역 이상익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