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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 앞에 선 ‘1인 3각’
[Special Report]유럽,시장과의 전쟁
[2호] 2010년 06월 01일 (화) 페트라 핀츠러 Petra Pinzler <차이트> 기자 economyinsight@hani.co.kr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5월21일 하원에서 열띤 유로화 회생 구제금융안 토론을 마친 뒤 반대표를 던지고 있다.
유럽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고 유럽연합(EU)의 정체성은 시험대에 올랐다. 유로존이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던 지난 5월 초 유럽 각국의 정부 수반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위기 상황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위기의 유로화를 회생시키기 위한 사상 초유의 구제금융안에 합의했다. 이제 EU의 정체성이 어떤 방향으로 재정립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EU가 진정한 동맹으로 거듭나려면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과 유럽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다.
유럽 지도자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유로화가 촉발한 금융위기로 인해 유로화에 대한 신뢰가 추락했고, 그 결과 유로화의 새로운 자리매김이 불가피해졌다. 평소 침착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조차 “유로화의 위기로 유럽은 실존이 걸린 실험대에 서게 되었다”며, “유로화가 실패하면 유럽이 실패하고, 유럽이 실패하면 유럽 통합의 꿈이 실패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2 재정위기 땐 유로화 붕괴
현재로서는 재정위기가 극복되지 않았으므로 실패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통화연맹은 제2의 재정위기로 붕괴될 위험을 안고 있다. 유로화의 붕괴가 불러올 재정적 여파는 한마디로 예측 불가능하다. 심지어 EU가 정치적으로 와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를 막으려면 재정위기에 처한 EU 회원국에 대한 7500억유로 상당의 지원금도 시작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위기에 처한 유로화를 회생시키기에는 지원액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한 이유에서 유럽은 이제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지속 가능한 유럽 통합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와 있다. 
새로운 유럽을 실현하기 위한 대안에는 EU 주도형 유럽, 독일 주도형 유럽 그리고 프랑스 주도형 유럽의 세 가지 모델이 있다.
첫째 모델인 EU 집행위원회가 주축이 되는 EU 주도형은 중앙집권적이며 관료주의적이다. 둘째 모델인 독일 주도형은 규제를 기반으로 한 안정 기조를 지향한다. 마지막 모델인 프랑스 주도형은 강한 국가를 기조로 하며 정치적 색채가 강하다. 정치 및 경제적 이해관계가 뒤얽힌 세 모델 사이에는 물론 접점과 타협의 여지도 있다. 하지만 언론에 비친 세 모델은 온갖 전선의 대립 구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세 모델은 국가적 민주주의와 유럽의 효율성의 대립이자 국가와 연합의 대립 구도다. 또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 EU와 유럽 개별 국가의 대립, 신자유주의자와 케인스주의자 및 각 정파의 정치인의 대립이기도 하다. 해당 모델을 뒷받침하기 위한 각 진영의 견해와 근거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관료적인 EU의 아전인수
미래의 유럽 모델을 유럽의 향방에 관한 철학을 다루는 공허한 논의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미래의 유럽 모델은 실제 투기 세력과 실제 국가와 실제 유럽인의 운명이 걸린 사안이자 동시에 유럽인의 돈과 직결된 문제이다.
유럽의 향후 모델에 관한 논의에서 핵심 사안이 기본적으로 복잡다단한 것은 아니다. 첫째 민주주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통화동맹의 재정을 어떻게 감독할 것인가, 둘째 경제 회복을 어떻게 신속하게 해낼 것인가, 셋째 향후 다시 위기 상황에 봉착할 경우 유럽에 필요한 안전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구제금융 지원으로 최악의 그리스 재정위기 상황을 일단 진정시킨 그 다음주에 제일 먼저 입장을 표명한 사람은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이었다. EU 집행위원장은 유럽 각 정부의 구제금융 지원금을 무엇보다 자신과 EU 집행위원회의 역할이 강화되는 새로운 희망의 출발점으로 해석했다. “유럽이 정치 및 경제적으로 혈맹이 아니라면 화폐동맹은 존속할 수 없다”고 말한 EU 집행위원장의 속뜻은 결국 새로운 유럽을 가장 잘 관리·감독할 수 있는 곳은 바로 브뤼셀에 본부를 둔 EU 집행위원회라는 것이다.
EU가 유럽 통합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창하는 사람은 EU 집행위원장이 처음도 아니며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EU를 가장 훌륭한 해결책으로 신봉하는 유럽 통합주의자들은 EU에 최대한 많은 역량을 중앙집권적으로 결집하려 한다. 실제로 EU에 역량을 집중함으로써 유럽 각 국가의 국경이 열렸으며, 유럽 내수 시장이 창출됐고, 특히 동유럽 국가가 EU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등 수십 년 동안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리스 재정위기에 직면한 EU는 회원국의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인한 금융위기를 조기에 감지하고, 다른 회원국으로 위기가 확산되는 걸 막으려 회원국 예산을 엄격하게 감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EU는 회원국을 신속하게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자체적인 감시하에 구제기금을 장기적으로 확대하려 한다. 물론 EU의 기준을 잘 따르는 회원국에 한해 말이다.

‘부채동맹’ 거부하는 독일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린 효율적인 조직 구조를 갖춘 EU는 재정정책에서도 독일의 안정 지향 기조와 상당히 근접해 있다. 하지만 EU는 심각한 수준으로 기계적·관료주의적 조직이기도 하다. 통화동맹이 출범하기 전부터 독일연방은행은 기계적이고 관료적인 EU에 줄곧 반대해왔다. 통화동맹 출범 전 독일연방은행은 ‘대관식 이론’(Coronation Theory·1970년대 화폐동맹이 처음 논의됐을 때 독일연방은행 등 독일 관료 중심의 경제론자는 화폐동맹을 구성하기에 충분한 여건이 형성된 뒤 환율을 영원히 고정하자는 입장이었으며, 언제 그러한 조건이 형성될지 알 수 없으므로 명확한 통합 일정을 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충분한 여건을 갖춘 뒤 환율을 고정하는 과정이 왕이 오랜 준비 끝에 왕관을 부여받는 것과 유사하다고 해 경제론자의 주장은 대관식 이론으로도 불린다-역자)을 근거로 통화동맹에 이어 정치동맹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유럽에서 통화동맹이나 정치동맹을 원하는 국가는 단 한 곳도 없으므로 어떠한 동맹도 출범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러한 형태의 EU를 독일연방은행만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유럽 통합의 오랜 옹호론자들도 이에 반대하고 있다. 유럽외교위원회의 토마스 클라우는 “EU 집행위원회는 유럽 회원국이 예측할 수 없는 자국의 선거 판도와는 무관하게 재정정책을 펼칠 수 있으며, 또한 EU 관료에게 재정정책을 맡길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프랑스의 자유주의적 좌파 성향의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임명직인 EU 관료가 자주권을 가진 각 회원국을 감독하는 것은 ‘경찰 정권’이 하는 짓과 마찬가지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물론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이는 분명히 EU의 약점이다. 구제금융 지원 이후 EU의 일방적 지시에 대해 그리스 시민의 분노가 들끓고 있음을 요즈음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리스가 이럴진대 EU의 중앙집권적 규정에 스스로를 맞춰야 하는 신흥 가입국은 과연 어떻겠는가. 미래의 유럽은 통합을 추구하면서 정직한 경제활동과 실질적 긴축정책, 건전한 예산을 정착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각 회원국의 정치인과 국회를 배제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참여시켜야 하지 않을까? 또한 국경을 초월한 정책적 논의가 더 활성화돼야 하지 않을까?
과거에 독일 총리청은 EU 주도형 모델에 줄곧 반대해왔다. 메르켈 총리가 향후 국가 예산을 놓고 기도 베스터벨레 외교부 장관이나 독일 국회가 아닌 EU 관료와 싸워야 하는 것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또한 독일에서는 부채동맹의 현실화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하다. EU 집행위원회에 더 많은 힘을 실어주고 더 많은 구제기금을 조성하는 것은 독일이 향후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독일 총리청이 구제기금을 더 이상 조성하지 않고 없애려는 것도, EU가 통화동맹에서 (부채를 이전시키는) 부채동맹으로 변모하는 것이 독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어느 국가보다 독일이 재정적으로 유로화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으므로 독일이 그만큼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작 독일에서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독일 주도형 유럽은 어떤 모델인가? 볼프강 샤우블레 재무장관은 이미 독일 주도형 모델의 세부 사항을 설계 중에 있다. 독일 주도형 유럽은 명확한 규정, 엄격한 권리, 긴축재정과 더불어 회원국의 부채를 지원하지 않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한 독일 주도형 모델에서 EU는 재정적자를 기록하는 회원국에 한해서만 선별적으로 감독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래서 독일 주도형 모델에서는 향후 회원국에 재정위기가 재발하더라도 유럽은 위기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재정위기에 휘청거리는 회원국에는 아직은 머나먼 미래의 꿈이지만 ‘유럽통화기금’이 구제금융을 통해 지원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엄격한 조건이 뒤따른다.
반면 프랑스는 이러한 과도한 제재를 최대한 지양하려 한다. 프랑스의 이런 태도는 얼마 전 수십억유로에 달하는 기금에 합의한 브뤼셀 EU 정상회담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날 밤 조용히 귀국했지만,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가운데 브뤼셀 정상회담 결과를 적극 알리며 승리의 쾌재를 불렀다. 그날 밤은 온전히 사르코지 대통령의 자축연이었다. 몇 달 전부터 밀어붙인 구제금융기금을 드디어 탄생시킨 사르코지 대통령은 향후 그 규모를 확대해나가려 한다. 이를 통해 사르코지 대통령은 시장보다 우위에 있는 ‘유럽합중국’이라는 숙원에 마침내 한 발자국 가까워지게 되었다.
프랑스 주도형 유럽 모델에서 최종 결정권은 각 회원국 정부에 있다. 프랑스 모델에서 어차피 다른 형태는 상상할 수 없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말하는 “유럽이 경제적으로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은 EU에 권한을 주자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유럽 회원국이 EU를 창구 삼아 협력을 강화하되, 각 정부가 지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는 유로존을 단일화폐 사용 국가의 집합체로 간주하면서, 유로존에서 자국의 주도적 역할 수행을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프랑스 주도형 모델에서는 각 회원국이 조기에 상호 제동을 걸 수 있어야만 기강 해이에 의한 재정위기를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 회원국에 재정위기가 오기 전에 빨리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국가 간 상당한 문화적 충돌이 불가피하다. 
프랑스 정부는 독일식 경제철학, 국가와 경제의 분리, 엄격한 규정, 인플레이션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과 수출 지향 기조에 최근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모든 국가가 수출 강대국이 될 수 없으며, 경기침체의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긴축재정을 부르짖는다고 시장을 자동적으로 안도시킬 수 없다는 것은 프랑스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프랑스에서 “독일처럼 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라는 말은 비웃음만 살 뿐이다. 프랑스 주도형 모델에서 유럽은 필요하다면 자본을 대거 투입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산업 및 경제 정책을 추진하되, 시장을 적극적으로 감독하게 된다.

시장과 전쟁에서 승리한 5월로 
브뤼셀 EU 정상회담이 실패할 위험 요소는 곳곳에 널려 있다. 어떤 유럽의 미래 모델도 다른 모델의 지지자들에게까지 두루 확신을 심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 전체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간 재정위기의 충격은 여전히 깊이 남아 있다. 이러한 규모의 재정위기는 유럽이 힘을 모아야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에는 적어도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러한 공감대에 힘입어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구제금융 지원이 순식간에 타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 국가는 헤지펀드의 규제안을 깜짝 개편할 예정이다. 그리고 예상보다 빠르게 남부 유럽 회원국은 속속 ‘독일식 안정화’를 정책 기조로 삼고 있다. 그리스와 스페인, 포르투갈은 긴축재정안을 가결했고, 프랑스조차 긴축재정안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추락한 유로화의 신뢰성을 회복하는 데 역부족이다. 그래도 일단은 모든 이가 희망을 품게 되었다. 언젠가는 접어올렸던 소매를 걷어내리며 유럽이 시장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5월을 회상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말이다.
ⓒ Die Zeit
번역 김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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