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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와 역사주의의 전쟁
[경제사 산책]
[14호] 2011년 06월 01일 (수) 홍기빈 economyinsight@hani.co.kr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경제사는 지금의 경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어떤 소용이 있을까. 혹은 별 소용 없는 것일까. 아무래도 오늘날 경제학의 대답은 후자에 가까울 듯하다. 미국을 필두로 한 대부분 국가의 대학 경제학과에서는 경제사 과목의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예 전담 교수가 한 명도 없는 경우가 더 많다. 남아 있더라도 경제사란 과거의 사료와 여러 정황에서 각종 데이터를 추계해 주류 경제학의 기법으로 구성된 모델에 투입하는 작업이 대부분이다. 이론적으로 구성된 경제모델을 공간적으로 이 나라 저 나라에 적용하는 작업을 그저 시간축으로 바꾸어 과거의 이 시대 저 시대로 옮기는 것에 불과한 셈이다.
 
경제사는 쓸데없는 영역인가?
오늘날 경제사란 현대 경제학을 동원해 분석할 ‘대상’이지, 그것을 활용해 경제 이론을 비판ㆍ반성하든지 새로 구성하는 경제 이론의 원초적 ‘모태’로 여겨지지 않는다. 경제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오롯이 경제학의 영역이며, 경제사는 그렇게 이해되고 설명되는 경제 현실의 한 영역일 뿐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조지 소로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의 주도 아래 새로운 경제학을 표방하며 영국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에서 창립된 ‘새로운 경제사상 연구소’(INET) 홈페이지.

실제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고 투명하지 않다. 현대 경제학이 댐과 다리를 짓는 토목공학처럼 경제 현실을 정확하게 예측ㆍ분석ㆍ설계ㆍ통제해주면 이런 식의 태도도 널리 인정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세계 금융위기처럼 예측은커녕 원인 분석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위기에 처하게 되고 대신 인류의 오랜 버릇인 역사적 회고가 다시 발동해 담론의 전면에 등장할 것이다. 어느새 세계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과 예후를 놓고서 역사학자에 ‘불과한’ 니얼 퍼거슨이 감히 노벨경제학상에 빛나는 폴 크루그먼과 맞서서 논쟁을 벌이는 진풍경이 등장한 지 오래다. 순수 경제학 이론을 활용하는 능력에서야 어찌 전자가 후자를 따르랴만, 과거 여러 금융위기에 대한 온갖 역사적 지식으로 무장한 전자의 입심은 가공할 만하다. 게다가 가만히 들어보면 후자라고 해서 철저한 연역적 추론이라든지 구체적 데이터의 계산처럼 크게 별쭝난 논리나 지식에 근거한 것 같지 않다.
상황은 주식시장에서도 그러하다. 세계 주요 주식시장의 유수한 투자자들은 어느새 난다긴다하는 예측 모델은 뒤로 제치고 기업들의 당기순이익 발표를 기다렸다가 여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식의 주식 매매 행태를 보이고 있다. ‘과학주의’ 시대가 가고 급기야 ‘역사주의’ 시대가 도래한 형국이다.
경제학이 흘러온 길을 돌아보면, 연역적 논리 구성에 기초한 과학주의와 실제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역사주의 사이의 갈등이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으며, 그 갈등은 오늘날까지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경제 현실을 이해하는 효과적인 방법의 자리를 놓고서 경제학과 경제사가 계속 다투어왔다. 그 다툼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예로서 19세기 말 독일의 경제학자와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사이에서 벌어진 ‘방법론 전쟁’(Methodenstreit)을 들 수 있다.
애덤 스미스 이후 데이비드 리카도를 거치면서 확립된 영국의 고전파 정치ㆍ경제학은, 19세기 중반에 프랑스를 교두보로 삼아 유럽 대륙 전체로 확산되면서 ‘주류’(Orthodoxy) 경제학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프러시아 혹은 독일에는 이에 심한 반감을 가진 경제학자가 많았다. 이들이 보기에 영국식 주류 경제학은 한마디로 아무런 알맹이가 없는 추상적 말장난에 불과하며, 구체적 현실을 이해하고 설계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영국식 경제학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계산해 행동할 줄 아는, 이른바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전제에서 출발해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초역사적 진공 상태에나 존재할 ‘합리적 개인’이란 역사상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다는 것이 이들의 불만이다.
인간은 항상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일원으로만 살아왔으며, 그 집단은 또 구체적으로 주어진 역사적 조건 속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 및 생활 형태를 만들어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형태 또한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하게 된다. 장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 시대마다 나타난 다양한 경제생활 형태를 먼저 세밀하게 연구하고, 각종 제도들이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어떻게 근대의 가장 중요한 인간 집단이라 할 ‘민족경제’(Volkswirtschaft)까지 구성해왔는지를 보는 것이 경제학의 중심 과제라 생각한다.
1843년 빌헬름 로셔가 처음으로 이 방법론을 제출하면서 이른바 ‘독일 역사학파’가 시작된다. 이 학파가 가진 추상적 이론에 대한 거부와 역사적ㆍ경험적 방법으로의 지향은 한 세대 아래로 내려가면서 더욱 강해진다. 그 세대의 지도자인 구스타프 폰 슈몰러는 통일된 독일의 모든 대학에서 “저 어리석은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나 가르치는 영국식 경제학을 추방해야 한다”고 교육부에 강력하게 건의한다. 대신 이들은 그때까지 여기저기 다른 학문 분야로 흩어져 있던 경제사 연구 영역을 하나로 통일하고, 방대한 양의 역사적 데이터와 통계 자료를 수집ㆍ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연구 방법론에 중대한 혁신을 가져온다.

   
‘독일 역사학파’의 지도자로 불리는 경제학자 구스타프 폰 슈몰러(왼쪽)와 경제학에서 ‘한계주의 혁명’을 주도한 경제학자 카를 멩거.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방법론 전쟁
근대적 학문으로서 경제사를 정립한 것은 독일 역사학파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추상적 이론을 배제하고 구체적 역사 자료를 꾸준히 축적해나가면, 현재 독일 민족경제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현실에 처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어떤 정책과 제도의 입안이 필요한지 구체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독일 역사학파에 대한 경제 이론 쪽 반박 화살은, 영국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문화적·언어적으로 이들과 같은 뿌리를 공유한 오스트리아제국의 빈에서 날아들었다. 당시 빈대학의 신예 학자로서 ‘한계 혁명’을 주도하는 이론적 저작으로 이름을 날린 카를 멩거는 1883년 발표한 긴 논문에서 독일 역사학파의 귀납적ㆍ역사적 편향에 대해 전면적 공격을 가했다. 흔히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멩거는 경제 현실의 분석에 역사적 연구의 중요성을 조금도 폄하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제기한 문제는, 순수한 경제 이론이 구축돼 있지 않으면 역사적 연구도 뻗어나갈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생각해보라. 동사무소 창고에 쌓여 있는 퀴퀴한 종이더미에서 무언가 ‘경제’와 관련 있다 싶은 것들을 모아서 끈으로 묶어놓으면 그게 ‘경제사’인가. 경제 현실에서 발생하는 데이터 양은 실로 압도적이다. 따라서 그것들을 일별하고 각각의 의미와 중요성을 밝혀내어, 그 경중에 따라 분류하고 논리적 연관 관계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경제사 구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구성된 경제 이론이 필수라는 것이 멩거의 주장이었다. 멩거가 보기에 독일 역사학파는 이런 최소한의 준비조차 갖추지 않고 문서더미로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슈몰러는 멩거의 비판에 노발대발해 역사적 방법의 우월함을 강변하는 지극히 공격적인 글을 출간한다. 독일 신역사학파의 지도자인 슈몰러와 오스트리아학파의 비조인 멩거 사이에 시작된 논쟁은 이후 각 학파의 신진학자들에게 대를 물리면서 19세기 말 심지어 20세기 초까지 길게 이어진다. 단지 이론적 논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언어, 비슷한 문화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들은 상대국에서 교수직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면서 조폭처럼 제 구역을 놓고 ‘전쟁’(Streit)을 벌였다.
이 논쟁은 어느 학문에나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귀납적 방법과 연역적 방법 사이의 긴장을 화해 불가능한 갈등 관계로 만들어버리는 부정적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경제 이론을 혐오하는 경제사 학자들과, 경제사에 거의 무지한 경제 이론가들이 경제학을 찢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런 식의 대립 구도가 비생산적임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역사적 귀납적 방법과 이론적 연역적 방법을 다시 결합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이론 틀을 만들어간 이들도 있었다. 막스 베버는 ‘독일 역사학파의 아들’이었음에도 양쪽 진영 모두에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유명한 ‘이념형(Idealtypus) 방법론’을 만들어낸다. 또 오스트리아학파의 일원인 조지프 슘페터는 ‘순수 이론’의 한계와 테두리를 의식하면서 특유의 경제사회학의 틀을 발전시킨다.
전체 흐름으로 볼 때, 두 경제학은 논쟁을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이 갈라서고 만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다시 연역적 경제 이론 쪽이 주류 경제학의 자리를 탈환하게 되자, 경제학의 상태는 ‘방법론 논쟁’이 벌어지기 전보다 더 심한 절뚝발이가 된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영국 쪽 경제학에 경제사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흐름이 분명히 내재해 있었다. 애덤 스미스의 저작은 말할 것도 없고, 앨프리드 마셜의 저작에서 경제사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전제로 이론을 구성함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을 거치면서 경제학과 경제사가 서로 ‘추방’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자, ‘경제사 없는 경제학’이 차츰 대학을 지배하게 되었다.
 
경제학과 경제사의 긴장
   
2008년 11월6일 연이틀 주가가 폭락한 뉴욕증권거래소 객장에서 한 증권브로커가 힘들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현재의 세계경제 위기가 경제 현실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우리 고민을 방법론 전쟁이 시작된 시점으로 되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두 방법 중 어느 하나가 다른 쪽을 밀어내는 것도, 양쪽이 어설픈 화해와 융합을 이루는 것도 원치 않는다. 어느 학문에서나 두 방법은 항시적 긴장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서로를 발전시키게 되는 ‘양쪽 날개’와 같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지난 몇십 년간 구축돼온 경제 이론의 적실성은 근본부터 의문에 처하고 있다. 그동안 경제학자보다는 역사학자의 영역이 된 경제사 연구는 현재의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한다는 의미에서 사회과학 방법론으로서의 성격이 많이 퇴색됐다. 그 결과 ‘1930년대에는 이랬다더라’는 식의 ‘교훈적 역사’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하는 실정이다. 별 능력도 없는 내가 어쩌다가 <이코노미 인사이트>에 이 지면을 격월로 맡겠다고 덜컥 수락했는지 돌이켜보니, 정치ㆍ경제학과 경제사의 긴장 속으로 조금이라도 머리를 들이밀어보겠다는 이기적인 공부 욕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tentandavia@naver.com

[경제사 산책]은 이번호부터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교수와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이 번갈아가며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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