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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타나모의 고문, 빈라덴 ‘추적 열쇠’
[Focus]미국과 빈라덴의 끝나지 않은 전쟁
[14호] 2011년 06월 01일 (수) 토마스 다른슈타트 외 economyinsight@hani.co.kr

토마스 다른슈타트 Thomas Darnstadt
클레멘스 회게스 Clemens Höges
한스 호잉 Hans Hoyng
마르크 후예르 Marc Hujer
발터 마이르 Walter Mayr
코르둘라 마이어 Cordula Meyer
얀 풀 Jan Puhl
마티유 폰 로르 Mathieu Von Rohr
마르셀 로젠바흐 Marcel Rosenbach
브리타 잔트베르크 Britta Sandberg
그레고르 페터 슈미츠 Gregor Peter Schmitz <슈피겔> 기자

오사마 빈라덴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결정적 정보 중 하나는 하필 빈라덴 스스로 선택한 한 남자에게서 나왔다. 모하메드 알카타니는 빈라덴이 직접 9·11 테러에서 20번째 항공납치범으로 선택한 사람이었다.
함부르크 테러리스트 그룹의 리더이던 모하메드 아타가 그를 올란도 공항에서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입국 심사원이 사우디아라비아인 알카타니의 입국을 거절했다. 그 후 알카타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웠고, 2001년 12월15일 파키스탄 군인들이 그를 체포해 미군에 넘겼다.
그는 관타나모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굴욕적인 심문을 겪어야 했다. 브래지어를 착용해야 했고, 개처럼 끌려다녔다. 미군의 고위층은 알카타니를 군사법원에 세우는 것도 거절했다. 그의 진술은 고문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법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가 밝힌 정보는 몇 가지 흥미로운 세부 사항에 불과하지만, 빈라덴 추적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중무장한 미 해병대 병사들이 지난해 2월17일 아프간 서남부 헬만드주 마르자의 텅 빈 거리에서 군견까지 동원해 수색작전을 벌이고 있다.

브래지어 차고 개처럼 끌려다녀
그는 “미국으로 파견되기 전에 9·11 테러의 주모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가 아부 아메드 알쿠와이티라는 남자에게 컴퓨터를 배우게 했다”고 말했다. 이는 알카에다에 대한 가치 없고 모순되는 수천 개의 정보 중 하나로 작은 모자이크 조각일 뿐이었다. 빈라덴 추적은 조사관들이 너무 늦어서 또 다른 테러를 막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며 진행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퍼즐이었다. 이 공포가 그들을 채찍질했다.
조사관들은 알쿠와이티가 알카에다 내부의 중요 인물 중 한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시작점이었다. 조사관들이 폴란드에 위치한 미 중앙정보국(CIA)의 비밀감옥에서 셰이크 모하메드에게 알쿠와이티에 대해 묻자, 그는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을 알지만 그 사람은 알카에다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다. 이것이 조사관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더 상세히 심문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야 첫 번째 퍼즐 조각에 맞는 다른 퍼즐 조각이 나타났다. 2004년 1월23일 이라크와 이란 국경 가까이에 배치된 쿠르드 군대가 알카에다의 전령 하산 굴을 체포했다. 아마 굴도 폴란드의 CIA 비밀감옥에 수감돼 심문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관타나모 파일에 그의 진술이 다시 나타난다. 문서에는 ‘알카에다 관계자 하산 굴은 알쿠와이티가 오사마 빈라덴과 같이 떠났다라고 말했다’고 쓰여 있다. 알쿠와이티와 빈라덴의 관계를 증명하는 두 번째 증거였다. 알쿠와이티는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의 후계자로 알카에다 서열 3위인 아부 파라치 알리비의 오른손이기도 했다. 이 또한 굴이 말했다. 미국 정부의 한 관리는 이와 관련해 “하산 굴이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조사관들은 알쿠와이티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아내려 애썼다. 이 사람이 아직 살아 있나? 2008년 1월 한 대테러요원은 관타나모 파일에 ‘아부 아메드 알쿠와이티는 알카에다의 수뇌부의 이동을 돕고 수뇌부와 그 가족들을 위해 안전 가옥을 조달하는 중간급 요원’이라고 적었다. 나중에 알카에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숨기게 될 남자에 대한 정확한 묘사였다.
2008년 10월30일 미국의 대테러요원들은 좀더 정확한 사실에 도달했다. 비밀문서에는 ‘그는 칸다하르 KU 10024가 칸다하르에서 운영하는 알카에다 하우스에서 일하며, 전령 임무를 맡고 있다’고 써 있다. ‘KU 10024’는 셰이크 모하메드의 번호다. 동일한 문서에 ‘알쿠와이티가 토라보라에서 목격됐으며, 당시 빈라덴을 따라 그곳에 갔을 수도 있다’고 쓰여 있다.
2005년 5월 당시 알카에다 서열 3위이던 아부 파라치 알리비가 체포됐다. 처음에는 CIA가 비밀감옥에서 그를 심문했고, 나중에 그는 관타나모로 이송됐다. 알리비도 2003년 7월 빈라덴의 전령에게서 파키스탄으로 오라는 편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아보타바드로 갔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아보타바드’라는 지명이 최초로 언급됐다. 미국 비밀정보부가 연관성을 파악하게 될 때까지 몇 년이 더 걸리기는 했지만 포위망은 점점 좁혔다.
알리비가 아보타바드에서 빈라덴의 요새 건설을 준비했을 수도 있다. 그는 2004년까지 그곳에 있었다. 요새 건설은 2005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2007년 미국은 빈라덴의 전령 중 한 사람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한 것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알쿠와이티일 가능성이 높다. 2009년 그들은 처음으로 알쿠와이티와 그의 형제가 활동하는 지역을 알아낼 수 있었다.
지난해 중반 알쿠와이티는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미국의 감시를 받고 있는 사람과 통화한 것이다. 2010년 7월 CIA를 위해 일하는 파키스탄인들이 페샤와르에서 커브를 돌고 있는 흰색 스즈키 자동차 한 대를 쫓고 있었다. 그들은 번호판 번호를 기록했다. 자동차에는 알쿠와이티가 타고 있었다.

   
은둔 중인 상태에서 자신과 관련한 뉴스 화면을 보고 있는 오사마 빈라덴의 모습.

CIA, 빈라덴 전령 차 추격 끝에 “유레카”
추적자들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알쿠와이티가 눈치채면 안 됐다. “우리는 복잡한 방식으로 그를 감시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그를 철책에 둘러싸인 건물까지 쫓아갈 수 있었다.” 한 미국의 고위급 관리가 말했다. 그곳은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졌다. 먼저 국경도시 아보타바드로 가서 북쪽으로 난 산맥 쪽으로 이동한 뒤, 카라코룸 고속도로를 지나 샛길을 따라 군사 아카데미와 가까운 곳에 있는 비포장도로 끝까지 왔다.
“유레카를 외치는 순간이었다.” 그곳에는 몇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집이 있었다. 대문에는 보안 게이트가 있었고, 바깥에서는 창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2층 테라스에는 2m 높이의 가리개가 세워져 있었다.
그 관리는 “처음 그곳을 봤을 때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 요새를 보자마자 비밀요원은 그곳이 단순한 전령이 사는 집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비싼 집이었다. 중요한 인물의 은신처로 지은 집임을 확신했다. 정원에는 위성방송 수신기가 있었다. 미국의 전자첩보활동기관인 국가안전보장국(NSA·National Security Agency)은 이 집에는 전화도 설치되지 않고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쓰레기도 내놓지 않았다. 거주자들은 담 안에서 쓰레기를 소각했다. CIA 국장 리언 패네타는 부하들에게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라고 재촉했다. 그 결과 전령과 그의 형제가 가족과 함께 그 집에 산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들 외에 제3의 가족도 살고 있었다. 이 폐쇄적인 은신처에 살고 있는 좀 이상한 사람들과 몇 번 만난 것으로 추정되는 유일한 이웃은 소년 암자드였다.
 
소년, “수염 난 할아버지 만나” 진술
가까운 곳에서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이 11살 소년은 일주일에 한두 번 그 집에 갔다. “거기서 부인이 2명인 수염 난 노인을 만났어요. 부인 중 한 사람은 아랍어를 하고, 다른 사람은 우르두어(인도대륙에서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인도·아리안계의 인도·유럽어족의 하나, 파키스탄 공용어)를 했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셋 있었어요. 여자애 1명과 내가 만나러 갔던 남자애 2명. 그 사람들은 친절했어요. 나한테 토끼도 두 마리 줬어요.” 수염 난 할아버지가 그 집에서 얼마나 살았는지 아느냐고 묻자, 소년은 어깨를 들썩이며 기억을 못하겠다고 말했다. 4월 마지막 주 수요일 두 번째 만남에서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웃들의 말에 따르면, 소년은 그의 가족 모두와 함께 파키스탄의 정보부 요원들에게 연행됐다고 한다. CIA는 빈라덴이 안전을 이유로 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빈라덴은 전령을 통해서만 소통했고, 전령을 쫓는 것이야말로 빈라덴을 찾아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테러리즘 전문가 피터 버겐은 말했다.
2010년 9월 CIA는 미 대통령 오바마에게 아보타바드의 이 특이한 집에 대해 보고했다. 그들은 알카에다의 수뇌부 중 한 사람이 그곳에 살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나중에 CIA 국장 리언 패네타는 오바마, 부통령 조 바이든, 외무장관 힐러리 클린턴, 국방부 장관 로버트 게이트를 만났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한 정부 관리는 “모두 흥분했다”고 <뉴욕타임스>에 이야기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를 추적했는데 갑자기 그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요원들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패네타는 사진을 원했다. 국립지리정보국(NGA)에 빈라덴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감시 사진을 촬영해달라고 요구했다.
지난 2월 패네타 국장은 합동특수작전사령관인 미 해군중장 윌리엄 맥레이븐을 랭글리의 CIA 본부로 불렀다. 그는 맥레이븐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건물 사진을 보여주었다. 맥레이븐은 패네타에게 △헬리콥터로 코만도 부대를 투입하는 방법 △B2 폭격기를 이용한 공중 폭격 △파키스탄 정보부와의 공동 작전의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2002년 1월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수감자 한 명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3월14일 오바마가 소집한 국가안보위원회에서 패네타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공중폭격을 선택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전문가들은 32개의 폭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계산했다. 하지만 폭격을 해도 빈라덴이 탈출할 수 있는데다, 그가 사망하더라도 그의 주검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었다. 오바마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헬리콥터를 이용한 작전이 가장 적합해 보였지만, 이 계획은 즉시 초강대국이 겪은 가장 큰 굴욕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1980년 4월24일 지미 카터 당시 미 대통령은 헬리콥터에 기술적 문제가 많아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의 미국인 인질들의 구출 작전을 중단해야 했다. 거기에 헬리콥터가 비행기와 충돌해 양쪽 모두 폭발했다. 단 1명의 인질도 구출하지 못하고 미군 8명이 사망했다.
결국 빈라덴을 처치하는 임무는 네이비실의 팀 식스에게 주어졌다. 이들은 미 해군의 대테러 작전 및 인질 석방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부대 그룹이다. 네이비실 부대만 해도 지원자 중 80%가 탈락한다는 지옥 주간에서도 살아 남은 강한 특수부대이지만, 팀 식스는 그 이상이었다. 강한 병사들만 받아들여 만든 이 부대는 200여 명으로 이루어졌다. 이 부대의 공식 명칭은 ‘미해군특수전개발그룹’(Naval Special Warfare Development Group)이지만 버지니아에 위치한 댐넥의 본부에서는 줄여서 ‘데브그루’(Devgru)라고 칭한다. 미 정부는 이 특수부대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데브그루 부대는 컨테이너 선박 ‘머스크 앨라배마’의 선장을 소말리아 해적의 손에서 구출해내는 동시에 3명의 해적을 동시에 사살한 특수부대다. ‘실’(Seal)은 영어로 ‘물개’를 뜻하지만, 동시에 ‘바다’(Sea)와 ‘하늘’(Air), ‘육상’(Land)을 의미하기도 한다. 약 2천 명의 네이비실이 미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
 
백악관 귀빈 초청 행사 모두 취소
4월에 데브그루의 한 팀이 아보타바드 공격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빈라덴의 집과 똑같은 집을 짓기도 했다. 그들의 목표물의 코드네임은 ‘제로니모’로 붙였다.
4월26일 화요일 CIA 국장 패네타는 전문가 15명을 요청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작전 준비가 완료됐다. 4월27일 수요일 오바마는 그의 출생신고서를 공개했다. 그는 자신의 국적에 대한 논란을 끝내기 원했다. 그는 이런 ‘바보 같은 일’이 다른 중요한 일을 방해한다고 비판했다.
4월28일 목요일, 그는 다시 한번 국가안보위원회를 소집했다. 위원회는 더 확실한 증거를 기다릴지, 아니면 지금 작전을 시작할지에 대해 상의했다. 결정은 대통령이 내려야 했다.
오바마는 좀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다고 했다. 금요일 아침 8시, 그는 3명의 핵심 참모들을 백악관의 외교실로 불러서 말했다. “합시다.”
그 뒤 오바마는 가족들과 함께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앨라배마주로 날아가 피해자들을 위로했다. 보좌관들은 계속 군사작전을 계획했다. 기상 상태가 나빠서 작전은 일요일로 미뤄야 했다.
다음날 백악관에서는 백악관 출입기자들의 연례 만찬이 열렸다. 워싱턴 정가에 중요한 날이다. 오바마는 전통적인 연설을 준비했다. 그는 준비하는 동안 맥레이븐 중장에게 행운을 빌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 오바마는 스모킹을 입고, 연설을 하고, 공화주의자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 농담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자리에 모인 워싱턴의 정치 기자들 중에 단 1명도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예측한 사람이 없었다.
일요일 워싱턴의 날씨는 맑았다. 오바마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골프를 쳤다. 하지만 18홀이 아닌 단 9홀뿐이었다. 골프화를 신은 채로 그는 오후에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백악관에서는 귀빈들을 위한 관람이 모두 취소된 상태였다. 백악관은 귀빈이 미국의 모든 안보 관련 정치인들이 모여 있는 것을 우연히 보고 그 소식을 전세계에 트위터로 알리는 것을 막으려 했다. 백악관의 한 직원이 슈퍼마켓에서 음식과 음료를 조달했다. 칠면조 밀쌈과 새우, 그리고 콜라를 앞에 두고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과 미 합참의장 마이크 멀린이 기다렸다. 부통령 조 바이든은 묵주를 손에 쥐고 있었다. 뒤편 왼쪽 구석에 오바마가 돌처럼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랭글리의 CIA 본부에서는 패네타 국장이 6층의 한 창문 없는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백악관과 직접 연결된 상태였다. 오후 2시 패네타 국장은 백악관에 모인 이들에게 다시 한번 작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설명했다. 1시간 뒤 네이비실 특수부대원 24명이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에서 출발한 두 대의 블랙호크 헬리콥터 안에 앉아 있었다. “이제 파키스탄에 왔다”고 패네타 국장이 말했다. 특수부대는 파키스탄 영공 감시를 속여야 했다. 패네타 국장이 본부로 전송하는 화면에서는 많은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현재의 진행 상황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몇 분 동안은 작전 현장과 연결이 끊기기도 했다. 가장 큰 사고는 작전 시작 직후에 일어났다. 헬기 중 한 대가 이상 상태를 보여 조종사는 빈라덴의 집 안 대지에 동체 착륙을 해야 했다. 병사들이 헬기에서 내려 집 현관까지 도달하는 데 3~4분이 걸렸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알쿠와이티가 침입자들에게 총을 쐈다. 그는 문 뒤에 몸을 숨겼지만, 특수부대원들은 빠르게 반응해 그와 곁에 있던 그의 아내를 사살했다. 계획에 따르면, 헬기 중 한 대는 담 안에 착륙하고 두 번째 헬기에서는 전투원들이 지붕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첫 헬리콥더의 동체 착륙 뒤 두 번째 헬리콥터도 땅 위에 착륙했다. 패네타 국장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를 안심시킨 것은, 우리 팀이 이날 밤에 한 작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미 두세 번 연습해봤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경험이 있었고 잘해냈다.”
병사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모든 방을 수색했다. 계단에서 그들은 빈라덴의 아들 칼리드를 사살했다. 그들은 20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중에는 어린아이도 많았다. 1층에서 병사들은 알카에다 전령을 사살했다. 한 여성이 총격전 중에 사망했다. 맨 마지막으로 2층에 올라갔다.
 
빈라덴, 최후까지 항복 낌새 없어
   
18년간 빈라덴 추격 작업을 벌인 미 CIA 내부 모습.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패네타 국장은 “목표에 도달했다”라고 말했다. “제로니모가 보인다.”
빈라덴은 비무장 상태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사후 보고에 따르면, 손이 닿는 거리에서 특수부대원들이 칼라슈니코프와 마카로프 타입의 권총을 발견했다고 한다.
빈라덴은 혼자가 아니었다. 현재 그와 함께 살던 다섯 번째 부인이자 가장 젊은 부인인 아말 압 알파타(29)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한 예멘인 가족이 그녀가 아직 10대일 때 그녀를 빈라덴에게 선물했다. 그녀는 빈라덴의 수많은 자녀 중 세 아이의 어머니다.
그녀가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빈라덴을 보호하려는 것 같았다. 총 한 방이 그녀의 다리에 맞았다. 오바마의 보좌관은 빈라덴이 항복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무기를 손에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특수부대원들이 총을 두 방 쐈다. 한 방은 그의 가슴에, 다른 한 방은 왼쪽 눈 위의 이마에 맞았다.
총알은 그의 두개골 일부를 부수었다. 나중에 조사관들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빈라덴은 언제라도 즉시 도주할 준비를 갖추었던 것 같다. 그의 옷에는 현금 약 740달러가 꿰매어 있었고, 두 개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었다. 병사들은 서둘러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플라스틱으로 된 수갑을 채우고 필요해 보이는 모든 것을 모았다. 그들은 하드디스크 10개와 컴퓨터 5개, CD 100개, 그리고 DVD와 USB를 모았다. 공격이 시작되고 40분이 지난 뒤 병사들은 아직 남아 있는 헬기 한 대와 급히 다시 부른 치누크 타입 헬기에 올라탔다. 파키스탄 공군이 외국기가 영공을 침범한 사실을 발견하고 제트기를 출격시켰다. 하지만 미군의 헬리콥터는 제때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왔다. 병사들은 이미 빈라덴의 주검을 헬리콥터에 실었다. 오바마는 죽은 빈라덴의 사진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전리품을 과시하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 Der Spiegel·번역 황수경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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