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
　
우리나라 현행 퇴직연금의 운영 및 관리 구조는 개별 계약형 구조로서, 연금 관리를 금융회사에 일괄 위탁하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퇴직연금의 관리 및 운용 주체는 제도적으로는 운영기관과 관리기관으로 이원화돼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퇴직연금 사업자가 운용관리와 자산관리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그 결과 다양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퇴직연금 운영 및 관리 과정의 중요한 의사결정에서 노동자의 참여는 제한적이며, 실질적 의사결정 권한은 경영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현실이다. 확정급부형(DB)은 기업이 의사결정의 전권을 행사하며, 그 책임 또한 기업에 귀속되기 때문에 기업의 권한과 책임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확정기여형(DC)은 의사결정 권한이 노동자에게 집중돼 선택과 책임이 모두 노동자에게 귀속됨에도 실제 결정 과정에서는 기업의 의사가 중요하게 반영되고 있다. 이는 노동자의 퇴직연금에 대한 정보 부족, 자산 운영과 관련된 지식과 경험의 부족 등이 그 원인이며, 중요한 내용과 관련된 정보가 연금 사업자에게 집중돼 있다.
　
노동자, 연금 관련 정보 부족해
퇴직연금 사업자들에 대한 감시와 감독은 금융감독원의 역할이다. 즉, 퇴직연금 운용과 관련된 감독은 자산운용 및 관리기관인 금융기관들을 대상으로 하며 감독은 금융감독원이 독점한다. 그러나 다수 사업자의 신의·성실 여부와 도덕적 해이 등을 감시하면서 수많은 상품의 건전성 또한 금융감독원이 홀로 감독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퇴직연금의 도입 및 설정, 상품의 선택 및 운용, 결과에 대한 책임 배분 과정에서 핵심 이해관계자인 노동자, 노동자 대표 및 노동조합의 권한과 책임이 제도화되고 의사결정 참여가 실질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현재의 개별 계약형 구조에서 퇴직연금은 노사 합의 아래 도입·설정하게 제도화돼 있고, 유형(DB형, DC형 또는 DB/DC 혼합형)의 선택 또한 노사 합의를 전제로 한다. DB는 연금의 운영과 결과에 대한 책임이 전부 기업에 귀속되기 때문에 연금 운용과 관련한 의사결정의 전권을 기업이 가지는 반면, DC는 연금기금 운영 결과를 노동자가 전부 부담하기 때문에 관련 의사결정의 전권이 노동자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DC 플랜 아래서 이렇듯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노동자에게 연금자산의 선택 및 운영에 관련된 정보와 지식이 부족한 상황이다. 따라서 사용자와 사업자의 의사가 불가피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다.
개별 계약형 연금 지배구조 아래 연금 가입 주체와 운용 및 책임에 관련된 의사결정의 권한은 DB/DC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먼저 DB 플랜은 선택·운용·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이 노동자와의 합의를 전제로 사용자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용자의 전권이 행사될 수 있는 제도적 특징이 있다. 사용자가 운용의 책임을 지고 예정된 결과를 노동자에게 지급하더라도 몇 가지 측면에서 대리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사용자가 연기금 운용 과정에서 손실 입을 때 손실 보상을 위해 노동자의 임금을 축소하거나 관련 비용을 보전하려 손실을 외부화하려는 시도 등을 들 수 있다. 연기금 운용의 책임은 기업이 부담해야 함에 따라 손실이 발생할 때 기업이 100% 책임져야 함에도, 이를 노동자 및 외부에 전가하려는 행위는 전형적 도덕적 해이이자 대리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DC는 연금 플랜의 선택과 운용의 책임이 노동자에게 귀속됨에 따라 책임소재가 분명하기 때문에 대리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수 있으나, 현실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DC에도 연금상품의 선택·운용·결과 관리 차원에서 노동자의 정보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사업자 또는 상품의 선정 과정에서 사용자 의견이 지배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사용자는 노동자의 대리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음에 따라 사용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의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될 경우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급여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대기업 퇴직금, 관련 금융계열사 수탁 줄여야
퇴직연금 수탁자인 사업자들의 사익 극대화 추구에서 비롯되는 대리인 문제는 여러 차례 논의돼왔다. 우선 특정 퇴직연금 사업자에게 퇴직연금 수탁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은 위험 분산과 사회적 효율 차원에서 재조정을 위한 제도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제도로서 수탁 상한을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므로, 인위적으로 시장점유율을 제한하는 방식보다는 사업자의 건전성 규제(위험투자 비율 등 감독)를 강화하는 방법과 불공정거래에 대한 페널티(퇴출, 영업정지 등)를 두는 방식의 ‘규율·감독’ 강화 방향이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다. 즉, 수탁 집중에 따른 대리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관련 부문에 대한 규율과 감독으로 해결해야 한다.
아울러, 대기업의 경우 관련 금융계열사를 사업자로 선정하는 관행을 규제해야 한다. 특히 일부 거대 기업의 퇴직연기금이 퇴직연금 사업자인 자기 금융계열사에 수탁되고, 이것이 지배구조 강화를 위해 다시 해당 기업에 투자되는 행위는 불공정거래 행위로서 철저한 관리·감독 대상이 돼야 한다. 요컨대, 내부거래 성격이 있는 사업자의 선정이나 운용 및 자산 관리는 독립적 기능을 갖는 기구에 의해 규제·감독해야 한다. 은행이 퇴직연금 판매에 덧붙여 ‘꺾기’ 등을 활용한 불공정거래를 하는 문제 또한 대리인 문제의 극단적인 사례로 보아 제도적으로 제재해야 한다.
퇴직연금의 기능이 안정적 노후소득 보장에 있다는 점에 공감한다면 자산 운용 또한 중·장기적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 즉, 퇴직연금 투자 의사 결정을 할 때 ‘환경·사회·지배구조’(ESG·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에 기반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려를 의무적으로 전제할 필요가 있다. 즉 전체 상품 가운데 ‘사회책임투자’(SRI) 비중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투자를 유도해야 하며, 이는 대리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방법이 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시스템은 운용관리기관과 자산관리기관을 분리하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이는 기금 자산관리와 운용관리를 통합해 운영할 경우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고, 이 경우 수탁자에게 손실이 발생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연금 사업자는 현재 시스템 운영상의 비용·비효율 문제를 제기하며 통합 운영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자산관리와 운영관리의 통합 운영은 수탁자의 이해를 반영한 관리보다는 사업자(자산관리기관+운용관리기관)의 이해만 고려한 대리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고, 그 비용은 가입자에게 그대로 전가할 수 있다. 따라서 자산운용기관과 자산관리기관을 분리하고 가입자의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제도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현행 개별 계약형 연금 지배구조 아래서는 연금 선택 및 운용과 관련된 의사결정에서 경영자 및 연금 사업자의 영향력이 지배적이다. 노동자는 퇴직연금 정보 부족, 자산 운영과 관련된 지식과 경험의 부족 등 때문에 연금 관련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적다. 연금제도의 도입, 설정, 운용 및 사후 관리의 전 영역에 걸쳐 관련 지식과 정보는 사업자와 사용자에게 집중됐으며, 의사결정의 권한 또한 사업자와 사용자에게 위탁된 것이 현행 구조다. 이런 지배 및 운영 구조의 현행 퇴직연금은 여러 가지 차원의 대리인 문제와 거래 비용을 수반함에 따라 노동조합의 역할 또한 이런 운영 및 지배구조의 개선과 감시, 감독에 초점을 둬야 한다. 현행 퇴직연금 지배구조 및 운용구조가 갖는 문제점을 관리·감독하고 노동자의 이해를 반영하기 위한 방법은 크게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어버이날인 지난 5월8일 오후 서울 종묘공원에서 노인들이 햇볕을 피해 그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연금이사회’ 등 내부 감시 장치 활용해야
첫째, 사적 연기금의 지배구조상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내부 감시 장치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연금이사회’이며, 이는 우리나라 사례에도 적용할 수 있다. 연금이사회는 기업연금의 제도 설계 및 운용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을 결정한다. 해당 이사회에 노동조합이 참여해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다.
둘째, 현행 계약형 제도 아래서도 ‘퇴직연기금펀드’(뮤추얼 펀드) 등을 조성해 운용하면 연금 가입자인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주주 자격으로 연기금 펀드 지배구조에 참여할 수 있다. 즉 투자, 수익 배분 등 전반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제도적 참여가 보장된다. 이 경우 노동조합 또는 노동자는 중요한 의사결정 단위에 참여하게 되며, 아울러 투자 대상을 결정할 때 노동자의 철학과 가치를 반영한 투자 대상을 결정할 수 있다.
셋째, 연금 지배구조에 노동자가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다. 이는 사업주별·사업자별 ‘퇴직연금관리위원회’의 도입을 통해 할 수 있다. 사업장별로 ‘퇴직연금관리위원회’가 설치되면 노동조합 및 노동자 대표 또는 그 대리인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해 노동자 이해 대변인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넷째,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의 도입이다. 선진국은 대부분 계약형과 기금형이 병존해 있는데, 미국이나 유럽 국가의 경우 대규모 연금플랜은 기금형이 주류를 이룬다. 따라서 퇴직연기금을 독립 운영하는 기금형 제도를 설정하고, 연기금의 지배 및 운영 과정에 노동자 대표가 참여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사용자가 갖는 일방적 책임을 경감시키고 노동자의 의사가 연기금의 지배와 운영에 반영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현행 계약형 퇴직연금 제도 아래 퇴직연금 제도에 관한 교육, 연금 자산의 선택 및 운용에 관한 정보의 제공 등은 연금 사업자들이 독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직연금의 선택 과정에서 연금 사업자와 관련 지식이 상대적으로 많이 축적된 사용자의 이해가 일반적으로 관철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퇴직연금 관련 지식 및 정보 역량을 강화하고 연금 가입자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퇴직연금의 설정, 선택, 운용 및 수익 관리 등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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