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상훈 국민연금연구원 연구위원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고령사회에 대비해 중고령자의 ‘점진적 퇴직’(Gradual Retirement)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서구에서 논의되는 점진적 퇴직제도란, 정년을 전후로 일정 연령 시점 이후에는 근로시간을 부분적으로 줄이는 대신, 줄어드는 임금에 대해 고용보험이나 공적연금에서 부분연금 형태로 소득을 지원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는 경직적 정년퇴직제도를 유지하는 우리나라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은 서구 유럽 국가에서는 고령자의 자발적 조기은퇴가 경제·사회적으로 큰 부담을 주는 것이 현실이라면, 우리나라는 그와 반대로 중고령자가 본인의 의사와 반하는 강제 조기퇴직이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서구와 달리 국민연금제도가 미성숙 단계에 있고, 아직까지 국민연금 가입에 배제된 집단이 많은 게 문제다.  다행히 국민연금에 가입돼 있더라도 국민연금 수급 연령이 현행 60살에서 65살로 상향 조정돼, 현실적으로 정년이 65살까지 연장되지 않거나 이 기간까지 근로소득을 대체할 소득원이 없으면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이 높다. 이러한 이유로 현세대 중고령자들은 생애의 ‘주된 일자리’에서 바로 은퇴하기보다는 일정 기간 다른 ‘가교 일자리’(파트타임이나 영세 자영업 등)를 거쳐 생애근로를 마감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접할 수 있다. 이런 은퇴 과정은 노후에 대한 개인적 준비와 제도적 보호장치가 완전히 구축돼 있지 않은 현실에서 고령임에도 노후소득원을 마련해야 하는 고달픈 현실을 보여준다.
 

2007년7월 서울 여의도 공원에서 열린 민주노총의 국민연금 개악저지 및 기초연금 도입 촉구 집회.

　
은퇴자 절반이 55.2살에 생애근로 마감
지금까지 중고령자 은퇴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은퇴를 하나의 ‘사건’(Event)으로 취급하고, 노동시장 구조와 제도적 환경들에 대한 검토와 개선 방안을 제시하는 데 국한해왔다. 그러나 은퇴는 점진적 ‘과정’(Process)으로 인식해야 하고, 은퇴 이후 경제적 삶과 관련지어 논의해야 한다. 생애주기적 관점에서 보면 노동시장에서의 사회적 계급과 지위는 퇴직 과정에 차이를 가져오고, 이 과정에서 노후를 위한 저축과 자산 축적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과거 노동시장에서의 경험은 은퇴 이후 노년기 소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이는 한 개인의 노동경력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진 일자리에서의 퇴직 과정과 가장 가까이 연결돼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국민연금연구원에서 수행하는 ‘국민노후보장패널’ 자료를 이용해 중고령자의 은퇴 경로를 유형화하고, 은퇴 뒤 소득수준 차이를 유형별로 살펴보자. 우선, 은퇴는 생애근로 경험과 공적연금 수급의 관계 속에서 ‘생애근로를 그만두는 시점 이후’로 정의한다. 생애근로 경험이 있는 개인을 대상으로 생애근로를 그만두었는지 판별해 생애근로를 그만둔 개인을 ‘은퇴자’, 현재까지 소득활동을 하는 개인을 ‘미은퇴자’로 구분한다. 이후 은퇴자는 생애 마지막 일자리가 생애 주된 일자리와 동일한지에 따라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생애근로를 마감하는 ‘완전은퇴자’와, 생애 주된 일자리 이후 가교 일자리를 통해 생애근로가 끝나는 ‘점진적 은퇴자’로 구분한다. 그리고 공적연금 수급 여부에 따라 연금을 수급받는 집단과 수급받지 못하는 집단을 구분한 뒤, 연금을 수급받는 집단에서는 생애근로 경험과 공적연금 수급의 사건 발생 순서에 따라 이를 다시 분류한다. 이 방법에 따라 은퇴 경로는 모두 8가지 유형으로 나뉜다(<표> 참조).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생애근로를 마감하는 완전은퇴자는 전체 은퇴 경로에서 65.1%를 차지한다. 이를 다시 생애근로가 끝나는 시기와 공적연금 수급 여부 및 수급 시작 시기에 따라 구분하면, ‘유형1’은 생애 주된 일자리가 곧 생애 마지막 일자리인 근로자다. 이들은 평균 59.8살에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과 동시에 공적연금을 수급받으며 전체 은퇴 경로에서 3.6%를 차지한다. ‘유형2’는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생애근로를 평균 53.9살에 마감한 뒤 평균 61.4살에 공적연금을 수급받는 경우다. 이들은 전체 은퇴 경로에서 7.7%를 차지한다. ‘유형3’은 평균 59.1살에 공적연금을 먼저 수급받고 평균 65.0살에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생애근로를 마감하는 경우다. 이들은 전체 은퇴 경로에서 3.5%를 차지한다. ‘유형4’는 평균 55.2살에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생애근로를 마감하지만 공적연금은 수급받지 못하는 경우다. 이들은 전체 은퇴 경로에서 절반인 50.2%를 차지한다.
다음으로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한 뒤 가교 일자리를 통해 생애근로가 끝나는 점진적 은퇴자는 전체 은퇴 경로 가운데 34.9%를 차지한다. 이를 다시 공적연금 수급 여부와 수급 시작 시기에 따라 구분하면, ‘유형5’는 평균 48.4살에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한 뒤 가교 일자리를 통해 평균 61.2살에 생애근로를 그만두는 동시에 공적연금을 수급받는 경우다. 이들은 전체 은퇴 경로에서 1.0%를 차지한다. ‘유형6’은 평균 43.9살에 생애 주된 일자리를 그만두고 평균 55.5살에 가교 일자리를 통해 생애근로를 그만둔 뒤 평균 62.3살에 공적연금을 수급받는 경우다. 이들은 전체 은퇴 경로에서 3.3%를 차지한다. ‘유형7’은 평균 50.7살에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한 뒤 평균 60.1살에 공적연금을 수급받고 생애근로는 평균 64.7살에 마감하는 경우다. 이들은 전체 은퇴 경로에서 4.1%를 차지한다. 마지막으로 ‘유형8’은 평균 47.2살에 생애 주된 일자리를 그만둔 뒤 가교 일자리를 통해 평균 60.6살에 생애근로를 마감하지만 공적연금은 수급받지 못하는 경우다. 이들은 전체 은퇴 경로에서 26.5%를 차지한다.
은퇴 경로를 다양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은퇴 경로에 따라 은퇴 뒤 소득수준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그림> 참조). 다양한 은퇴 경로 가운데 은퇴 뒤 소득수준이 가장 높은 집단은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생애근로를 완전히 마감하고 동시에 공적연금을 수급받는 ‘유형1’이다. 이들의 개인소득은 평균 183만원이다. 그다음으로 개인소득이 높은 집단은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한 뒤 가교 일자리에서 생애근로를 마감하고 동시에 공적연금을 수급받는 ‘유형5’이다. 이들의 개인소득은 평균 116만원이다. 그다음은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고 공적연금을 수급받은 뒤 재취업을 통해 가교 일자리에서 생애근로를 마감한 ‘유형7’이다. 이들의 개인소득은 평균 90만원이다.
　
여성 및 저학력 은퇴자 빈곤 문제도 심각

2005년 11월 삼성증권이 개최한 퇴직연금 콘퍼런스.

이와 반대로 은퇴 경로 가운데 은퇴 뒤 소득수준이 가장 낮은 집단은,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생애근로를 마감하거나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한 뒤 가교 일자리를 통해 생애근로를 그만두었지만 공적연금을 받지 못하는 ‘유형4’와 ‘유형8’이다. 이들의 소득수준은 정부에서 공식으로 발표한 2008년 1인 가구 최저생계비보다 낮은 평균 30만원 내외다. 이들의 은퇴 뒤 소득수준은 소득이 가장 높은 ‘유형1’의 16%이다. 이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은퇴 경로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공적연금을 수급받지 못하는 은퇴자, 여성 은퇴자, 저학력 은퇴자의 빈곤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은 앞으로 이들에 대한 노후 대책이 정책적으로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들보다 조금 나은 집단은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나 가교 일자리를 통해 생애근로를 마감한 뒤 몇 년간의 시차를 두고 연금을 수급받는 ‘유형6’이다. 이들의 개인소득은 평균 62만원이며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생애근로를 마감한 뒤 시차를 두고 공적연금을 수급받는 ‘유형2’와, 공적연금을 수급받은 뒤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생애근로를 마감하는 ‘유형3’의 평균 개인소득은 각각 77만원과 76만원이다.
은퇴 뒤 소득수준은 가교 일자리를 통해 은퇴한 경우보다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은퇴한 경우가 높고, 이들 중에서 공적연금을 수급받는 집단의 소득수준이 높게 나타난다. 근로활동기의 소득 격차는 경제활동에서 퇴장한 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생애근로 경험을 통해 공적연금에 가입했는지, 그리고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 과정이 어떠했는지에 따라 은퇴 뒤 소득 격차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앞으로 은퇴에 대한 연구는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생애근로를 마감하는 완전은퇴와 더불어, 주된 은퇴 경로로 자리잡은 가교 일자리를 통한 점진적 은퇴를 감안해 진행해야 한다. 노동시장의 변화로만 인식할 것이 아니라 노후소득 보장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shseok@np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