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볍씨를 담그는 마음
[이순원의 마음쉼터]
[13호] 2011년 05월 01일 (일) 이순원 economyinsight@hani.co.kr

   
 
마당에 커다란 독과 함지가 나온다. 부엌의 물동이와 작은 바가지까지 집 안에 물을 푸거나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모두 마당으로 나온다. 곡간 한쪽에 잘 보관해두었던 볍씨 가마니도 아버지와 일꾼 아저씨가 마주 들고 내온다. 지난해 가을 할아버지가 어느 자리의 알곡이 가장 결실을 잘했는지 봐두었다가 벼를 벨 때 그 논의 것을 따로 베어 보관해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볍씨 가마니 안에 들어 있다 해서 그 속의 알곡이 모두 볍씨가 되어 못자리에 뿌려지는 것은 아니다. 마당에 나온 저 크고 작은 그릇들이 다시 한번 그들을 시험한다. 커다란 함지에 물을 가득 퍼 담고 그 속에 우리 집 씨암탉이 오늘 아침에 막 낳은 달걀 하나를 띄운다. 당연히 달걀이 가라앉는다.
“소금을 넣어라.”
할아버지 말씀에 따라 아버지는 소금을 조금씩 조금씩 흘려넣으며 물을 젓는다. 소금이 녹으면서 밑바닥에 가라앉은 달걀이 위쪽으로 떠오른다. 달갈이 절반쯤 물 밖으로 떠오르면 거기에 볍씨를 붓는다. 볍씨들에게 이 시험은 옛날 무사들의 진검승부만큼이나 가혹하고 엄격하다. 그냥 맹물이면 맨 밑바닥에 가라앉을 볍씨도, 그래서 못자리에 뿌리면 아무 일 없이 싹을 틔울 볍씨도 이 소금물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물 위로 떠오르고 만다.
“건져내라.”
할아버지가 엄혹한 판관처럼 한마디 하면 아버지는 물 위에 뜬 볍씨를 건져낸다. 예전 과거시험장의 분위기가 아무리 엄격했다 한들 볍씨들이 시험을 치르는 봄날 마당의 분위기만큼 엄숙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도 진지하고, 말을 따르는 아버지와 일꾼 아저씨도 진지하고, 물 시중을 드는 어머니도 진지하고, 구경하는 우리도 진지하다.
“한 번 더 휘저어.”
잠시 전엔 가라앉았는데 밑바닥까지 막대를 넣어 휘저은 물의 부력과 물살을 타고 다시 떠오르는 볍씨들이 있다. 할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지 않아도 가차 없이 조리에 담겨 다른 그릇으로 옮겨간다.
그러길 두 차례, 이런저런 시험에 올라 이제 출세길 열렸다고 건방 떠는 사람들도 이 마당에 오면 절로 몸을 낮추게 될 것이다. 자신은 배운 것이 많고 아는 것이 많다고 자랑하는 사람들도 이 자리에 오면 저절로 겸손해질 것이다. 이제 어느 못자리에 뿌려도 튼튼한 모로 자랄 속이 꽉 찬 볍씨들만 남았다.
“이제 액막이를 해라.”
마지막으로 볍씨에 부정 타지 말라고 볍씨 담근 독에 금줄을 두른다. 금줄 새끼는 오른쪽으로 꼬는 것이 아니라 반대인 왼쪽으로 꼬아야 한다. 힘들게 꼰 왼새끼 사이사이에 꿰놓은 창호지 조각이 마당을 지나가는 바람에 나부끼고, 햇빛은 그 위에 제 이름을 새긴다.
볍씨 담그는 일은 단순히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일로서만이 아니라 성스러운 의식이며 기도였다. 책 만드는 일 역시 그럴 것이다. <이코노미 인사이트> 창간 1주년을 축하드린다. 어느 모판에서나, 또 어느 논에서나 큰 수확을 거두는 볍씨 같은 잡지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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