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옛 선배와 전화 통화를 했다. 옛 친구들과 다른 선배들의 소식을 들을까 무척 기대했는데, 이 선배는 다짜고짜 하소연부터 했다. 선배가 털어놓은 사정은 이렇다.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난 그는 할머니에게서  큰 돌선물을 받았다. 어떤 은행의 30년짜리 정기예금을 받은 것이다. 정기예금은 30년 뒤 연 17% 복리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도록 설계돼 있었다. 선배의 할머니는 당시 아주 큰돈이던 100만원을 이 예금에 넣었다. 애초 설계대로라면 1990년대 중반에 1억원을 받게 되는 셈이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선배가 그 은행에 찾아가서 자기 명의로 된 정기예금 통장과 해묵은 정기예금 설명서를 보여줬다. 그런데 은행 담당자들의 대답은 엉뚱했다. 그사이 이 상품에 대한 이자율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은행 쪽은 원래 약정한 금액인 1억원 대신 연 3% 이자율로 계산해 2500만원을 지급해주겠다고 했다.
2500만원도 분명 작은 돈은 아니다. 그러나 선배가 억울한 것은 그 상품에 대한 어떤 변경 내용을 사전에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은행 쪽은 2500만원이라도 받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는 태도였다. 나는 이 은행이 비윤리적 기업이라는 선배의 의견에 동조했다. 하지만 선배에게 해줄 조언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선배의 경험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어놓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와 닮았다는 것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난 정황을 분석하는 여러 가지 시각 중 하나가 바로 ‘금융기관의 책임 회피’다.
특히 부동산 대출을 한 금융기관들은 채무자에게 대출하고 생긴 채권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거대 금융기관들이 우량 채권과 부실 채권을 한꺼번에 섞은 뒤, 이 채권들을 다시 쪼개어 팔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금융기관들은 채권자로서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었고, 자신에게 돈을 투자한 이들에게도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했다. 또한 이 금융기관들에서 돈을 대출받은 채무자도 누가 채권자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게 되었다.

은행의 적반하장식 태도
요약하면, 금융기관들은 투자자와 채무자에게 자신의 활동을 명확히 알리지 않은 것이다. 1960년대와 2000년대, 그리고 한국과 미국이라는 장벽을 넘어서 두 사례 모두 금융기관의 책임에 관해 중요한 점을 보여준다. 금융기관이 다른 사람의 자산을 관리할 때 이 자산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면 당연히 그 주인에게 알려야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는 무엇이 있을까?
먼저 금융산업의 특징을 살펴보자. 다른 산업들과 달리 금융산업은 타인의 자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게 주 업무다. 이를 ‘신탁’이라고 한다. 쉬운 예로 은행을 보자. 은행은 여유 자산이 있는 사람들(위탁자)의 금융자산을 모아(수탁) 금융자산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준다. 이때 돈을 빌려간 사람에게 이자를 받는데, 일부는 은행이 수수료로 받고, 일부는 위탁자들에게 돌려준다. 이는 은행을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우리가 은행에 계좌를 터서 계좌번호 받고 통장 만드는 일 자체가 신탁 업무에 관한 계약이 된다. 금융산업에서 일어나는 활동들은 대개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보험상품을 살 때, 위탁자는 현재 자산을 보험료라는 명목으로 위탁자에게 맡기게 된다. 이때 보험 가입자는 미래에 불확실한 상황을 맞거나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일정한 수익을 더해 그 자산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다. 주식에 투자하는 경우도 투자자는 자산을 기업 활동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맡긴다. 투자자가 개인이거나 대형 연금기관이거나 마찬가지다. 이렇듯 금융 활동은 신탁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위탁자와 수탁자 간 계약이 중요하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물건에 흠이 있으면 교환하거나 되물릴 수 있다.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거나,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택시나 지하철을 탈 때도 우리가 지급한 비용에 대한 반대급부, 곧 음식·물건·운송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 활동과 관련된 계약에서는 반대급부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일단 위탁자가 자산을 수탁자에게 맡기게 되면 이후의 일들은 계약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특히 신탁 계약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위탁자가 자산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저 ‘손해는 없겠지’ 하고 믿는 수밖에.
여기서 금융산업의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이 상황이 바로 경제학에서 말하는 ‘정보 비대칭성’(Information Asymmetry)에 기인한 ‘주인-대리인(Principal-Agent) 문제’에 해당한다. 위탁자는 주인으로서 자산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수탁자로서 은행 또는 금융기관은 대리인으로서 위탁자의 자산을 적절하게 운용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위탁자가 수탁자에게 제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위탁자가 개인일 경우, 신탁자인 금융기관의 무책임을 감시할 수 있는 장치가 별로 없다. 이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의 실패’(Market Failure)다.
시장을 연구·분석하는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를 ‘시장의 실패’라고 지칭한다. 경제학자들은 수요자와 공급자가 합리적 과정을 통해 적절한 균형가격을 만들어내는 것이 시장이라고 상정한다. 그러나 이 기제가 생각대로 잘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수요자와 공급자 간 정보가 원활하게 교환되지 않는 것이다(물론 이 외에 경쟁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 외부성이 발생하는 경우, 공공재가 존재하는 경우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부산저축은행과 대전저축은행이 금융 당국으로부터 6개월 영업정지를 당한 2월18일 부산2저축은행 해운대지점 예금자들이 예금인출을 위한 번호표를 받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시장의 실패와 기업윤리
따라서 경제정책에서는 위탁자가 수탁자를 감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경제학에서 잘 다루지 않는 면이 있는데, 바로 기업 활동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가치체계에 관한 내용이다. 이를 ‘시장 실패에 대한 기업 책임과 전략에 관한 접근’이라고 하며, 크게 세 가지 범주가 있다.
첫째, 기업이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일을 할 때다. 예를 들어 인신매매를 하거나 장기를 매매하는 일이 해당된다. 금융 활동에서 보면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거나, 독재정권이 들어선 국가에 투자를 하는 경우다. 1960~70년대 미국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편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투자하는 기업들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또 다른 예로 지나친 고리대금업을 들 수 있다. 위탁자 처지에서는 높은 이자가 매력적이겠지만, 일정 이자율을 넘어서는 상품은 금융기관에서 어떤 식으로든 무리한 활동을 한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이것의 대안으로는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분야에 투자를 하는 경우가 있다. 최근 비화석연료를 개발하는 분야나 친환경 산업에 투자하는 금융 활동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윤리적 또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금융 활동은 미국 투자자들에게 호평을 받아 지난해 3조달러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체 금융 투자액의 12%에 해당한다.
둘째, 사회복지에 꼭 필요한 분야를 시장에 맡길 때다. 인간의 존엄에 꼭 필요한 분야를 시장에 맡기는 경우 경제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침해받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사회보장제도와 의료보험인데, 이는 사회 구성원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를 시장에 맡기다가는 제대로 된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미국 오바마 정부가 의료보험에 관여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같은 보험산업이지만 자동차나 부동산 관련 보험에는 오바마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데, 이 보험들은 생존권과 직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그동안 사기업에 맡겨놓았던 미국의 의료보험료가 전세계에서 가장 높고, 약 17%에 이르는 성인은 의료보험과 관련해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다. 이 때문에 사회 구성원의 생존에 관련된 부분을 시장에만 맡길 수 없는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유누스 교수를 통해 유명해진 ‘마이크로크레디트’(Microcredit·무담보 소액대출) 사업은 또 다른 사례다. 정부가 간과한 부분을 시민사회가 기업과 협조하거나 자발적으로 시장에 개입한 독특한 사례다. 마이크로크레디트를 통해 영세사업자들에게 활동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적으로 경제활동인구를 더 많이 창출하게 돼, 결국 건전한 경제 공동체를 만드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셋째, 경제활동 과정이나 이를 통해 얻은 이득을 분배할 때의 공정성이다. 이는 정해진 규칙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금융 활동에서 보면 이 점들은 더욱 부각된다.

금융기관의 책임 있는 자세 필요
미국 사회에서는 2000년대 중반 금융기관들이 대출 조건을 한없이 낮춘 때가 있었다. 은행에서는 대출자의 신용등급과 관계없이 부동산 담보 대출을 원하는 만큼 해주었고, 부동산 가격 또한 치솟았다. 부동산 거품이 꺼져가는 지금 집값이 폭락하자, 대출자는 담보로 맡긴 자신의 집을 팔아도 빌린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었다. 경제 상황마저 악화되자 많은 대출자들이 일자리를 잃어 월 상환금도 갚지 못하게 되었다. 이를 단지 대출자들의 안일함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꼼꼼하게 신용을 따지지 않은 금융기관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이렇듯 금융 활동에서 중요한 과정을 공정하지 않게 처리할 때 시장원리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금융기관은 정해진 규칙이나 기준을 세심하게 지킬 필요와 책임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선배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무엇보다 은행 쪽에서 정기예금 상품에 대한 변화가 있음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았다는 점이 큰 잘못이다. 게다가 변경 내용은 단순하고 무시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 이자율에 관련된 것으로 이 상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감시기관이 소홀하니 법률을 강화해야 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은행의 책임감 있는 자세다. 은행의 잘못한 점을 나열해보자.
첫째, 높은 이자로 고객을 유혹했다. 둘째, 상품의 변경 내용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았다. 이는 고객의 분노뿐 아니라, 금융기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사회적 신뢰를 떨어뜨린다. 마지막으로 고객에 대한 책임 있는 활동을 등한시했다. 은행 쪽에서 여러 가지 변명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처럼 주민등록제도가 잘 갖춰진 사회에서 조금만 발품을 팔면 정기예금 가입자의 변경된 주소나 연락처를 알아내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신용카드 남발이나 무분별한 부동산 대출로 인한 신용불량자 양산, 제2금융권 부실 사태 따위의 불미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어찌 보면 그동안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은 땅 짚고 헤엄치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들의 원인을 따져보면 고객에게 지나친 위화감을 조성하거나, 사회적 신뢰를 파괴하거나, 법이나 규칙의 절차를 무시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를 단지 ‘시장의 실패’라고 무책임하게 강변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시장의 실패 원인을 금융산업의 기회로 탈바꿈할 수 있는 혁신적 자세가 필요하다. 경제학적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사회적 책임을 일깨우는 투자를 하거나, 사회 공동체를 개발하는 소액투자대출을 하거나, 정해진 규칙을 세심하게 따른 미국 금융기관들을 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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