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 상무

우리 경제의 잉여 유동성 규모에 관해 여러 추정이 있다. 적게는 150조원 정도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많게는 600조원에 달한다는 얘기도 한다. 어떤 기준을 적용하든 최소 200조원 이상의 자금이 떠돌아다닌다고 보는 것만은 분명하다.
잉여 유동성 증가의 시발점은 외환위기 직후였다. 외환위기 극복과 경기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금리를 낮추고 유동성을 공급하는 정책을 펴면서 1차 잉여 유동성이 형성됐다. 당시 돈의 공급 강도는 30%에 육박하던 시중금리를 사상 최저치인 7%까지 끌어내릴 정도로 강력했다. 적절한 시기에 돈을 흡수하지 못한 것도 유동성이 늘어나는 요인이었다. 1999년 경기가 회복된 뒤 유동성 흡수 정책을 시작했어야 하는데 대우 사태로 기회를 놓쳤고, 신용카드 대란 등을 겪으면서 규모가 오히려 더 커지고 말았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는 잉여 유동성 확대의 결정판이었다. 한국은행이 2%까지 정책금리를 내리면서 많은 돈을 공급했고, 선진국은 더 극단적인 정책을 폈다.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EU)이 정책금리를 각각 0.25%, 0.1%, 1.0%까지 내린 것만 봐도 당시 유동성 공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정책은 중앙은행이 직접 자금을 공급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일본에서 시행된 양적 완화가 선진국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도 경기회복에 맞춰 유동성을 거둬들여야 했는데 실패했다. 계속되는 위기증후군과 유동성 흡수가 또 다른 경기침체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금을 줄여야 할 때 반대로 선진국이 2차 양적 완화를 통해 추가 유동성을 공급하면서 또다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과잉 유동성은 경제 전반에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우선 최근 인플레이션 문제의 근원에 유동성이 자리잡고 있다. 유동성은 투기적 수요에 따른 원자재 가격 상승을 촉발했고, 소비 확대 과정을 통해 물가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앞으로도 원자재 가격은 이머징 마켓의 수요 증가와 맞물려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다. 과잉 유동성에 의한 가격 상승은 이번만의 문제가 아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부동산을 대상으로 유동성에 따른 후유증이 나타났는데, 9·11 테러 직후 세계적으로 저금리 정책이 시행되면서 그 효과가 2~3년 뒤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나타났다. 미국 금융위기는 과잉 유동성이 극단적인 상황에 도달하면서 나타난 파국적인 결말이었다.

점진적 금리 인상, 자산 거품에 유의

지난 1월19일 서울 여의도 대우증권 객장 시황판에 코스피 지수가 사상 최고치인 2115.69를 나타내고 있다. 이날 삼성전자는 장중 100만원을 돌파했다.

지금도 과잉 유동성 공급은 국내외 여러 자산에 거품을 형성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채권’이다. 미국의 경우 금리가 주식 배당 수익률에 훨씬 못 미칠 정도로 낮다든가, 정크본드를 포함해 신용등급과 관계없이 채권 수익률이 내려가는 이상 현상을 보이고 있다. 채권에 가장 먼저 거품이 형성된 것은 이번 정책 목표가 금리에 맞춰져 있는 만큼 당연한 결과다. 그 강도는 미국의 시장금리를 2%대 초반까지 밀어낼 정도다. 지금 미국 채권시장은 30년 동안 진행된 강세 시장의 끝 무렵에 도달해 있다. 채권에 거품이 형성되고 약해지는 과정은 우리가 부동산이나 주식 거품에서 흔히 겪는 고통보다 약할 수 있다. 상품 성격상 채권은 원리금이 보장된 상품이기 때문에 거품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오는 충격이 줄어들 수 있지만, 향후 진행 과정에서 또 다른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채권 이후 거품은 ‘상품시장’에서 형성됐다. 이미 면화와 고무를 비롯해 구리 등 1차 상품 가격 대부분이 금융위기 이전 고점을 훨씬 넘어섰다. 이머징 국가들의 수요 증대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당분간 개선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상품 가격의 정점은 유가가 전 고점에 육박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원자재 가격이 올라가는 동안, 그리고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동안 이것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피하기 힘들다.
다음은 ‘주식’이다. 2월 경제지표가 둔화되고 1분기 기업 실적이 예상에 못 미칠 전망이지만,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외국인 매수가 중심이 된 유동성 유입이 시장을 끌어올리고 있다. 유동성에 의한 자산 가격 상승은 실물경제에서 인플레이션만큼 다루기 힘들다. 채권과 상품은 이미 거품화된 상태고, 주식도 위험이 커지는 등 자산 가격 움직임이 우려된다. 이를 해결하려면 일반 물가를 잡기 위한 것과 똑같은 정책을 쓸 수밖에 없다.

부동산, 경기 활성화 도구 경계해야
정책은 경제의 ‘방향 전환’과 ‘속도 조절’ 두 가지를 목표로 한다. 과잉 유동성이 문제여서 유동성을 줄여야 한다면 이는 방향을 바꾸는 행위다. 유동성을 줄이되 어떻게 할 것인지, 즉 급격하게 할 것인지 천천히 할 것인지는 속도와 관련한 문제다. 좋은 정책은 경제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있게 올바른 방향 전환과 속도 조절이 이뤄지는 경우에 해당한다.
과잉 유동성을 관리하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점진적이지만 꾸준한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 지금은 낮은 금리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돼, 사람들은 저금리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 많은 경제 행위가 현 수준의 금리를 정상으로 생각하면서 이뤄지고 있다. 이것이 고착화하면 금리를 조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금리 조정 과정에서 많은 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다. 미국 금융위기가 지나치게 낮은 금리를 오랫동안 시행하고, 이를 빠르게 현실화하겠다는 조급증이 빚어낸 결과라는 점, 그리고 일본이 너무 오랫동안 0% 금리를 시행해 이제는 금리에 손댈 수 없는 상황이 된 점 등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 유동성 수준에서 부동산·채권·주식 등 각종 자산에 거품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특히 부동산에 주의해야 하는데, 경제 활성화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유혹을 항상 느끼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부동산에 의해 촉발됐기 때문에 새로운 거품이 형성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이 한번 불붙으면 통제하기 어려웠던 전례를 볼 때 미리미리 관리해야 한다.
유동성이 흐를 수 있는 많은 통로를 개척하는 것도 필요하다. 1990년대 일본에서 과잉 유동성이 문제가 됐을 때 미국 국채 투자를 비롯해 금융자산 국제화가 적극 추진됐다. 이 정책은 당시 일본 내의 낮은 금리와 맞물려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는데, 지난 3월 일본 대지진 이후 자금 흐름에서 보듯 국내 경제가 어려울 때 국제화된 자산이 환류하면서 경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개인이 금융기관 등에서 빌린 돈이 최대 1천조원에 육박했다. 사실상 개인 부채가 국내총생산 규모와 맞먹는 수준까지 높아진 셈인데, 잉여 유동성을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개인 부채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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