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정 우리금융지주 수석연구위원 　

지방이 혈관벽에 쌓여 혈액의 이동을 방해하는 동맥경화는 대표적인 현대인의 병으로 협심증과 심부전뿐 아니라 돌연사를 일으키기도 한다. 단기간에 압축성장을 해 전세계 경제발전의 성공 모델로 인정받던 한국 경제에도 동맥경화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수출을 늘려 외화를 많이 벌어도 내수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성장을 해도 고용은 별로 늘어나지 않는다. 고소득층의 지갑이 두툼해져 씀씀이가 커져도 저소득층의 생활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윗그릇에 물이 가득 차서 넘치면 아랫그릇도 채워지는 일명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가 약해진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경제의 혈관이 지방으로 막혀 혈액순환이 잘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경제 흐름에 동맥경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자산과 부채 같은 스톡(Stock) 변수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득·소비·저축 같은 플로(Flow) 변수보다 자산과 부채 같은 스톡양이 급증하면 경제의 활력뿐 아니라 정부의 다양한 경제정책도 효과가 떨어진다. 1989년에 발간된 일본의 <연차경제보고서>는, 자산과 부채가 팽창한 결과 스톡 변수가 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높아지는 현상을 ‘경제의 스톡화’라고 지적했다. 일본은 스톡 경제화 과정에서 부동산 거품의 형성과 붕괴가 일어나 경제 전체에 큰 후유증이 발생했다. 우리나라 경제도 가계·기업·정부 등 주요 경제주체들의 스톡화 현상이 점차 뚜렷해지면서 경제 흐름의 선순환 고리가 약해지고 있다.
가계 부채에 대한 우려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더 많이 논의된다. 특히 가계 부채가 지난해 말 기준으로 800조원에 육박하면서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리스크로 지적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의 가계는 소비를 줄이면서 부채를 줄여나가는 반면, 우리나라는 경제성장률이 0.3%로 하락했음에도 오히려 가계 부채가 증가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여기엔 위기 극복 과정에서 형성된 저금리 기조와 풍부한 시중 유동성, 가계수지 악화에 따른 가계의 자금 수요 증가, 가계 대출을 중심으로 한 금융회사들의 대출 경쟁 등이 가계 부채 증가의 주원인이었다.
대출 수요자인 가계 처지에서 보면, 2000년대 들어 집값 급등 현상을 경험하면서 ‘무리해서라도 집을 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심리가 가계의 차입 수요를 증가시켰다. 차입 수요 증가는 인구구조 변화와 결합돼 경제 전체적으로 가계 부채를 급증시켰다. 2000년대 들어 우리나라 가계 부채가 급증한 원인에는 베이비붐 세대가 주축이 된 인구구조 변화 같은 구조적·환경적 요인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부채 수요가 많은 35~54살 연령대 가구주 수가 급격히 늘어난 점에 주목해야 한다. 2000년 우리나라 35~54살 연령대의 가구주 수는 732만 명에서 2010년 862만 명으로 10년 만에 130만 명이나 늘었다. 연평균 13만 명이 늘어난 것이다. 부채 수요가 많은 가구주 수가 급증한 점이 2000년 267조원 규모인 가계 부채가 2010년 말에는 795조원으로 3배 증가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개별 소비자에게 ‘빚이 왜 이렇게 많이 있느냐’고 탓하기도 어렵다. 개별 소비자 처지에선 집값이 오르기 때문에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뿐 아니라, 저금리와 금융사의 대출 확대로 빚을 얻기 좋은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자신의 여건이나 환경, 미래에 대한 기대 등을 통해 개별 소비자들은 합리적 의사결정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합리적 의사결정을 했지만, 인구구조 같은 환경 변화 등의 영향으로 거시경제 전체 차원에서는 문제가 된 것이다.

2006년 12월 금융감독원이 수도권 지역 아파트에서 수거해 공개한 주택담보대출 관련 불법 전단지.

부동산 등 거시경제 변수 급변동 줄여야
현 시점에서 가계 부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향은 부채 증가 속도를 가계소득 증가율보다 상당 기간 낮게 유지해 부채 상환 능력을 계속 높여나가는 것이다. 금리 변화나 경기변동에 따른 고용 사정, 무엇보다 부동산 시장 등 거시경제 변수의 급변동을 줄이는 안정적 경제정책 운용이 중요하다.
기업 부문은 돈이 묶여 있다. 정보기술(IT) 같은 노동창출 효과가 낮은 부문에만 투자가 늘어날 뿐, 고용 흡수력이 높은 부문엔 좀처럼 투자되지 않는다. 지난해 국내 10대 그룹들의 유보율은 1219%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업의 잉여금이 늘어난 근본적 원인은 기업이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돈을 안 썼다는 뜻이다. 기업 처지에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 잉여금을 쌓아두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의 이런 태도는 고용을 위축시켜 가계의 성장을 제한해 경제에 동맥경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일부에서는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 적자 비율이 선진국에 비해 낮기 때문에 재정 확대가 별문제 없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국민연금을 받는 사람보다 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국민연금 적립기’에 있는데다 사회 안전망이 상대적으로 취약해 향후 재정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어, 재정 적자 비율을 선진국과 단순 비교할 수 없다.
글로벌 차원에서 보면 재정 적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과거 북유럽·중남미 경제 위기, 일본의 장기 불황, 아시아 경제 위기 등은 국지적인 위기였기에 위기 극복 과정에서 발생한 재정 적자 문제는 다른 국가들이 어느 정도 흡수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는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발생한 충격’인데다 대부분 국가가 국채 발행 등을 통해 재정지출을 늘렸기 때문에 재정 악화는 범지구적 문제로 대두할 것이다. 한 국가에서 적자가 발생하더라도 다른 나라에서 국채를 매입하거나 자본 유입 등을 통해 적자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이번 전세계적인 재정 악화는 ‘화성인, 금성인과 같은 우주인’이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결국 지구촌은 장기적으로 ‘재정 적자의 대복수’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글로벌 재정 적자는 세계경제 잠재성장률 하락 요인으로 작용해, 우리나라 경제성장세가 둔화될 수 있다. 재정 적자의 복수를 피하는 길은 세입 증가율보다 낮은 세출 증가율을 상당 기간 지속해 재정을 건전화하는 방법밖에 없다.
주요 경제주체들의 스톡화에 슬기롭게 대응하려면 각 경제주체가 과거의 경제적 상식에서 벗어난 패러다임 변화에 잘 대응해야 한다. ‘부동산 불패’ 신화는 스톡 경제화와 함께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고, 그 자체가 지속 불가능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경제의 스톡화가 진행될수록 금융정책이 중요해진다. 특히 유동성 과잉에 따른 부동산 거품 발생을 억제하려면 고통스럽더라도 금리를 정상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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