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우리는 ‘지구화’(Globalization)와 ‘초국적화’(Transnationalization)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이전의 세계경제와 비교할 때, 일국 경제의 경계선을 초월하는 경제활동의 장이 이후 폭발적으로 팽창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현상을 한 나라라는 공간적·제도적 틀이 유명무실해지고, ‘국내’와 ‘국제’를 하나로 통합한 지구적 경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서술하는 건 현실과 거리가 먼 이념적·정치적 선전 혹은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분명 전 지구적 범위에서 영리 활동을 펼치는 기업과 자본이 금융으로나 산업적 관계로나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 결과, 1990년대 이래 ‘초국적 경제’ 영역이 확립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 지구의 경제주체와 그들의 활동 가운데 이 영역과 관계를 맺거나 통합된 비중은 과장하면 안 된다. 자본과 물자의 흐름에서 소외된 낙후 지역만이 아니라 심지어 서방세계의 국가로 가보아도 초국적 경제 영역의 ‘간택’을 받은 지역과 인구 비중은 절대로 크지 않고, 그러지 못한 지역과 인구는 오히려 불균등 발전 논리로 더 큰 불평등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쏟아지는 선전과 수사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인적·물적 이동을 통해 전 지구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그 혜택이 고루 미치는 ‘지구적 경제’라는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따라서 ‘국민경제’라는 틀은 현실에 엄존했고, 이를 정치적 정당성의 장으로 삼는 국가를 둘러싼 정치세력은 어떤 형태로든 ‘성장전략’을 정치적 구호로 내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전의 고전적 산업 정책과 재분배 정책은 이미 시장주의로 전환된 국내외 조건에서 가능한 선택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에 ‘금융 서비스 주도형 성장전략’ 모델이 생겨난다. 대략 이런 줄거리다. 국내의 금융 체제를 공격적으로 개혁하고, 여기에 되도록 많은 양의 자금이 흘러들게 해서 각종 자산 시장을 꾸준히 상승시킨다. 국내의 산업 및 사회 구조에서도 금융 및 자산 시장을 중심으로 한 각종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이 융성할 수 있게 과감한 규제 철폐 등을 시도한다. 이렇게 되면 국제적인 자금 흐름을 국내로 끌어들이면서 각종 자산 가격 상승을 계속 떠받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국민소득이 늘어나게 되면 이들의 소비를 원동력으로 각종 서비스업이 활성화돼 일자리가 창출된다. 
김대중 정권은 1997년 외환위기의 후폭풍 속에서 이전 한국 경제의 틀을 시장주의로 전환하는 계기였지만, 아직까지 이런 의미에서의 본격적인 금융 주도형 성장 모델을 도입한 시기였다고 보기는 힘들고, 그 국민경제의 대책은 벤처기술 투자 등 신성장 동력 발굴에 맞춰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노무현 정권 중반기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이 방향으로의 전환을 국가경제 차원에서 전략으로 추진해왔음이 분명하다. 이른바 ‘금융 허브(중심지)’라든지 ‘제조업에서 지식서비스 산업으로의 전환’ 등 굵직한 이름도 그러했고, 각종 자산시장으로 꾸준히 자금이 흘러들게 하는 정책도 그러했으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급박한 추진 또한 이 맥락에서 조명해야 한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수출 지향 대기업을 중심으로 ‘초국적 경제’ 영역으로 들어가는 기업 및 부문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의 부작용이 ‘고용 없는 성장’과 ‘양극화’였다. 예전의 국내 산업 연관 관계가 약화된 상황에서 대기업의 성장은 국내 경제 활성화로의 연결이 미약해졌다. 각종 자산시장에 대한 참여 정도에 따른 빈부 격차가 커졌으며, 산업구조 변화는 좀처럼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저간의 상황은 비슷한 성장전략을 취한 많은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2004년 12월 '21세기 번영의 길 동북아 금융허브 세미나'에서 연설하는 이헌재 부총리.

금융위기와 금융 주도 성장전략의 종언
2008년 금융위기로 금융 주도형 성장전략은 현실성을 잃게 되었고, 몇몇 나라에서는 악몽으로 변했다. ‘지속적인 세계경제와 국내 자산시장의 성장’이라는 꿈을 영구적 상태인 양 여기며 이 전략을 취해온 나라들은, 2008년 지구적 자본시장의 구조적 변화로 자금 흐름이 크게 바뀌면서 하루아침에 국가적 재앙을 맞기까지 했다. 아이슬란드나 아일랜드처럼 이 전략을 일찍, 그리고 전력을 다해 추구한 나라일수록 충격이 컸다. 하지만 자산 (특히 부동산) 거품 붕괴와 이로 인한 금융체제 전반의 부실화,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다시 지방과 중앙 정부의 재정 구조를 압박하고, 이것이 전체 경제의 침체와 사회적 갈등 격화로 이어지는 순환 고리는 정도 차이는 있어도 여러 나라에서 비슷하게 나타났다.
2008년 이후 세계경제의 진행 양상은 우리에게 지난 몇 년간 야심차게 진행해온 금융 서비스 주도의 성장전략을 하루빨리 선회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은 최소한 아직까지는 급박한 상황 전개의 소용돌이로 들어가지 않고 2008년 위기의 여파를 견뎌내고 있다. 중국과의 긴밀한 산업 관계도 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전략을 선택하고 실행한 시간이 아직 그다지 길지 않은 것이 중요한 원인으로 보인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한국의 지배층이 이 전략을 추진해온 속도와 기세의 강도를 감안하면 낙관할 상황은 아니다. 이미 부동산 및 건설 시장을 진원지로 해 금융 부문과 지방재정의 위기로 주고받는 악순환의 되먹임이 시작될 조짐이 보인다. ‘금융 중심지’ 기획은 비록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래 큰 모멘텀은 잃었지만, 그것과 긴밀히 연결된 금융체제를 둘러싼 각종 정책과 제도는 여전히 나아갈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또한 초국적 경제와 연결된 대기업 부문의 역동성은 투자로든 고용으로든 국민경제의 활성화와 연결 고리가 애매한 상태임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현재 세계경제의 구조적 변화 향방은 불확실성 속에 있고, 여기에서 국민경제 차원의 활로를 열어나갈 거시적·중장기적 전략을 만들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 작업을 위해서라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몇십 년간, 또 몇 년간 마치 ‘글로벌 스탠더드’인 것처럼 통용된 지구화에 대한 환상, 그리고 금융 및 서비스 주도의 성장전략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것이다. 절박한 현안이 산적한 현재 왜 이런 주관적 ‘믿음’ 문제를 시급한 것으로 내놓는가. 믿음의 문제가 바뀌고 해결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다 먼저 ‘맹신’을  버리기 전에는 산적한 현안에 대한 현실적 탈출구는 나오지 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돼 있다.
tentandav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