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

지난해 유럽의 PIGS(포르투갈·아일랜드·그리스·스페인) 국가가 재정위기에 봉착해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금융을 받게 되자, 국내 보수 언론은 이구동성으로 그 원인을 방만한 복지 지출에서 찾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주장하는 무상급식, 복지국가를 공격하는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무상급식, 복지국가를 하다가는 우리도 이 나라들의 전철을 밟는다는 것이다.
과연 이 나라들이 과도한 복지 지출 때문에 재정위기에 빠졌나? 아니다. 이 나라들은 유럽에서 가장 약한 복지국가다. 복지국가 때문에 재정위기가 온다면 복지국가가 더 발달된 북유럽(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이나 중부 유럽(독일·프랑스·벨기에 등)에서 먼저 재정위기가 와야 할 것이다. 재정위기에 빠진 남유럽 국가들은 유럽에서도 복지가 가장 약하고, 그 대신 강한 가족 복지 전통을 가졌다. 그러니 복지국가 때문에 재정위기가 왔다는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고, 이를 근거로 한국의 복지국가 건설을 반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올해 초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종전의 ‘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췄다. 이유는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다. 일본은 만성적 재정 적자를 국채 발행을 통해 메워왔기 때문에 국가 부채가 엄청나게 누적됐다. 1990년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 이후 국채 발행이 급증했다. 불경기를 타개한다는 명목으로 자민당 정권이 마구잡이로 도로·댐·교량 건설에 예산을 투입하는 바람에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것이다. 올해는 드디어 일본의 국가 부채가 1천조엔을 돌파하고, 국내총생산 대비 200%를 넘을 것으로 본다.
일본의 신용등급 강등에 대한 국내 보수 언론의 반응은 아전인수의 극치를 보여준다. 일제히 일본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려는 것까지는 좋은데, 일본 민주당 정부가 추진하는 아동수당, 무상 고교교육 등 복지정책에 책임을 돌리면서 한국에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무상급식 등 복지 강화에 화살을 돌리는 것은 지난해 PIGS 위기 때와 판박이다. PIGS 국가가 복지국가 때문에 위기라는 주장이 억지이듯, 일본이 과잉복지 때문에 위기라는 논리는 말이 안 된다. 민주당은 아직 복지 강화에 첫걸음일 뿐이므로 일본 재정위기의 원인은 복지국가가 될 수 없고, 진정한 원인은 토건국가다. 그리고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의 배후는 다름 아닌 ‘약한 복지’다.
일본은 대국 중에서 저출산, 고령화, 인구 감소에 직면한 세계사 최초의 나라다. 일본의 노동력은 1950년 5천만 명 수준에서 2000년 8700만 명으로 정점에 도달한 뒤 급속히 줄어들어, 2050년에는 다시 5천만 명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노동력이 이처럼 급격한 ‘역U자형’을 보인 나라는 선진국 어디에도 없다. 이를 메워줄 대체 인력인 여성, 노인, 외국인 어느 것 하나 여의치 않다. 문제의 핵심은 일본의 열악한 복지와 보수적 문화다.
한국은 이런 점에서 일본과 닮은꼴이다.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일본의 1.4명보다 더 낮은 1.2명으로 세계에서 끝에서 2등이다. 보고에 의하면, 우리나라 인구는 지금 4800만 명인데 현재의 저출산 추세가 계속되면 40년 뒤에는 4400만 명으로 줄어들 것이란다. 다른 추계는 이런 추세대로 가면 300년 뒤 한반도에는 사람이 사라진다는 공포스러운 시나리오도 보여준다.
우리나라 복지는 유럽에서 가장 약한 복지국가인 PIGS 국가보다 약하고, 선진국 중 가장 후진적 복지국가인 일본보다 열악하다. 우리가 일본의 전철을 피하려면 지금이라도 열악한 복지를 강화해 저출산·고령화를 막아야 한다. 우리의 출산율 꼴찌는 열악한 복지가 빚은 결과다. 한국의 가족정책 예산은 국민소득 대비 0.3%로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7분의 1밖에 안 된다. 가족수당, 육아휴직급여, 보육 서비스, 자녀교육 지원 등 예산이 다른 나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병원, 보육 시설, 학교, 어디를 가도 국가에서 도와주지 않으니 개인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게다가 나중에 과외 비용은 또 어떤가. 그러니 아이 키우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것이다. 그 결과가 결혼 기피, 출산 기피다. 젊은이들이 아이 키우기가 힘들어 ‘출산파업’을 벌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009년 11월 서울 여의도에서 예산안공동대응모임 회원들이 민생·복지·교육 예산 증액을 촉구하고 있다.

성장지상주의의 저주, 최저 출산율
저출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머지 않아 노동력이 부족해짐에 따라 경제성장이 떨어질 것임을 뜻한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동전의 앞뒷면이다. 우리나라의 고령화는 현재 세계 최고 속도로 진행 중인데, 주요 원인은 저출산이다. 저출산·고령화는 많은 나라에서 공통된 현상이긴 하지만, 그 속도에서 우리나라는 유별나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우리나라 경제성장 전망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서도 출산율을 대폭 높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젊은 부부들이 출산파업을 끝내도록 보육·교육·복지에 대폭 투자해야 한다.
우리나라 역대 정권은 복지와 분배를 무시하고 오직 성장지상주의에 매진해왔다. 지금은 복지·분배를 무시하고는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저출산은 우리가 40년간 매달려온 성장지상주의의 저주다. ‘세계 최저 출산율’이라는 시한폭탄이 터지기 전에 복지국가 건설에 나서야 한다. 우리나라 보수파가 애창하는 ‘복지·분배가 성장의 발목 잡는다’는 노래는 도무지 박자가 안 맞는 노래이니 이제 그만 불러야 한다. 새는 두 날개로 날고, 사람은 두 다리로 걷듯이 성장과 복지·분배는 같이 가는 것이다.
복지국가 건설에는 많은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 자영업은 전체 고용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과다한데, 이는 다른 나라에 비해 두 배 정도 높은 수치다. 자영업에 이렇게 많은 인력이 몰린 이유는 역대 정부가 복지·보육·의료·교육 등 복지국가라면 당연히 투자했을 분야에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각자 살길을 찾아 몰려간 곳이 자영업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는 과잉경쟁으로 모두 살기 어렵다. 이제라도 복지국가를 건설해서 일자리를 만들고 자영업의 과잉인구를 흡수해야 한다. 복지국가 건설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출산율을 높여 인구 고령화를 늦추고,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로서 미래 성장 잠재력을 높이고, 자영업자들의 고통을 경감하는 효과까지 있을 것이므로 일석사조다. 한국 경제 혁신의 큰 걸음은 복지국가 건설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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