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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적 선진국’ 넘어 진보·개혁·통일로
[한국경제 혁신]참 선진화
[13호] 2011년 05월 01일 (일) 김기원 economyinsight@hani.co.kr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으로 보면 이미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어이없어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보수파는 국민을 더 채찍질하기 위해 선진국론을 부정한다. 선진국이란 말을 들으려면 1인당 GDP가 적어도 3만~4만달러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진보파는 진보파대로, 한국처럼 문제투성이인 나라에 대해 어찌 선진국이란 좋은 단어를 쓸 수 있겠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자학하지는 말자. 현실은 현실대로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1인당 명목 GDP는 2만달러를 넘어섰다. 그리고 실질구매력으로 환산한 1인당 GDP는 2010년 3만달러인데, 우리가 선진국으로 간주하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자. 미국 4만7천달러, 스웨덴 3만9천달러는 우리보다 상당히 높다. 하지만 독일 3만6천달러, 프랑스 3만3천달러는 조금 높으며, 이탈리아 3만달러는 같고, 뉴질랜드 2만8천달러는 우리보다 낮다.
실제 유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의 소비수준이 그들에 비해 별로 떨어지지 않는다. 산업구조 면에서도 한국은 선두 그룹에 속한다. 메모리반도체, 휴대전화,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주요 제조업에서 한국은 대체로 세계 5위 이내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200여 개국 중 주요 20개국(G20)에 끼워주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산업이 성숙해버렸기 때문에 1960~70년대와 같은 고도성장이 힘들어진 셈이다.
그러나 삶의 질은 GDP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범죄율, 교통사고율, 공해, 여가, 노후안정, 소득분배, 사회갈등, 문화수준, 정치적 자유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하는 것이다. GDP 외에 이들의 상황도 좋아져야 국민이 행복해지고 ‘바람직한’ 선진국이 된다. 미국은 1인당 GDP는 높지만 인구 비례의 수감자 수는 다른 선진국의 5배 정도로 많으니 바람직한 선진국이라 하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도 1인당 GDP에선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어도 총체적 삶의 질은 아직 많이 낙후돼 있다. 바람직한 선진국이 아니라 ‘파편적 선진국’인 셈이다. 그동안의 압축적 불균등 성장 과정에서 GDP만 돌출적으로 선진화됐을 뿐 다른 부분은 뒤처져 있다. 따라서 우리 과제는 이런 파편성을 바로잡아 바람직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경제적 차원에서 그 과제는 ‘진보’ ‘개혁’ ‘통일’로 요약될 수 있다.
각각의 내용을 따져보기 전에 먼저 흔히들 개념 정의 없이 사용하는 진보와 개혁의 내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진보파’는 ‘보수파’의 반대말로서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두 축인 시장과 국가 중 국가를 상대적으로 더 선호한다. 그 이유는 보수파가 시장경쟁·효율성·자기책임·성장을 더 강조하는 반면, 진보파는 민주주의·공정성·사회연대·분배를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보-보수가 시장과 정부의 크기(量)에 관련되는 구분이라면, 개혁은 수구의 반대말로서 시장과 국가의 질(質)에 관련되는 개념이다. 개혁은 시장의 질 제고, 즉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경쟁을 발전시키고, 국가의 질 제고, 즉 국가의 민주성과 효율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수구파는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다.
그러면 첫째로, 진보의 과제를 살펴보자. 국가와 시장 중 시장을 극단적으로 억압하던 옛 소련·동유럽 체제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점은 판명 났다. 그러면 문제는 국가와 시장을 어떻게 적절하게 배합하느냐다. 그런데 한국은 식민지 치하를 겪었고 근대화 역사가 짧은데다 남북한이 극단적으로 대치하는 탓에, 이데올로기 대립 전선이 서유럽에 비해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치우쳤다. 미국처럼 사회갈등이 심각한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를 왼쪽으로 좀 당겨야 한다. 다시 말해 국가를 통한 복지 확대가 필요하다. 분배를 시장기구에 따른 1차적 분배와 국가에 의한 2차적 분배로 나눈다면, 한국에선 1차적 분배의 모순을 완화하기 위한 2차적 분배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 때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고 있다.

남북한 양극화 완화가 통일 과정
한국의 공공복지 지출 비중은 GDP의 9% 수준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공공복지 지출 비중은 19% 정도다. 물론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이보다 더 높다. 한국과 고령화율이 똑같았을 때 OECD의 해당 비중은 16%였다. 이런 수치로도 한국의 복지 강화가 요구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정보화·글로벌화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형편이라 복지 강화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한꺼번에 늘릴 수는 없더라도 아동, 교육, 노후, 건강보험 등에 대해 국민적 동의가 확보되는 대로 차근차근 확대해가면 될 것이다.
둘째, 한국 경제의 개혁이 필요하다. 먼저 시장 개혁 면에선, 자본 간 경쟁과 노동자 간 경쟁의 불공정성을 바로잡아야 한다. 대기업들이 경제적 실력이 아니라 ‘정경불륜’을 통해 경쟁하는 구도를 타파해야 한다. 또한 대기업과 중기업 사이, 그리고 중기업과 소기업 사이의 거래가 공정해야 한다. 힘의 차이로 인해 대등한 거래가 어려울 때는, 약자가 힘을 합칠 수 있도록 해주든가, 국가가 불공정거래를 처벌하든가, 아니면 약자가 힘을 키울 수 있게 제도적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노동자 간의 불공정 경쟁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대해서도 개혁 조치가 필요하다. 대기업·정규직이라는 보호받는 틀 속의 내부자(Insider)와 중소기업 노동자 및 비정규직이라는 외부자(Outsider) 사이의 노동시장 경쟁에선 공정한 경기 규칙이 작동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특혜를 받는 내부자 지위는 노동능력이 아니라 운·배경·뇌물에 의해 획득되는 경우가 적잖다. 노동능력에 따른 정당한 내부자의 경우에도 외부자와의 근로조건 격차가 과도하다. 이런 문제는 모두를 대기업·정규직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는 없고, 복지 강화를 통해 내부자와 외부자의 실질 생활 격차를 줄이는 게 상책이다. 그리되면 대기업·정규직의 노동 유연성도 증대될 수 있다. 국가 개혁 측면에선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함은 물론이고 국가의 비효율성도 해소해야 한다. 그래야 시장경쟁이 공정해진다. 관료가 썩어 있고 비효율적인 상태에선 국가기구를 통한 복지 확대의 국민적 설득력이 떨어지고 그 부작용도 커진다. 아울러 공공기관 종사자가 누리는 부당한 특혜도 시민사회의 민주적 견제력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셋째, 부정적 측면을 최소화하고 긍정적 측면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남북한 통일경제를 추진해야 한다. 남한 내 양극화도 골칫거리지만, 한반도 차원에서 남한과 북한의 양극화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통일은 이 양극화를 완화해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남한 양극화의 완화에 ‘가진 자’의 양보가 필요하듯이, 통일에서도 남한 쪽 지원이 필요하다. 보수·수구 세력의 ‘퍼주기’ 논란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비효율적이고 비민주적인 북한 체제를 어떻게 개혁과 개방의 길로 유도할 것인가, 통일로의 여러 가지 경로에 대응해 단기적·중기적·장기적 전략과 전술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통일이 불가피하고 필요하긴 하지만 감정적 통일 당위론이 아니라 냉철한 정치·경제적 고려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kwkim@mail.kn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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