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대관령 아래 시골집에 다녀왔다. 해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관령은 4월에도 눈이 내리는 해가 눈이 내리지 않는 해보다 많다.
시골집 마당에서 바라보면 저 멀리 대관령 설산에 풍차가 돌아간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어서 동양 최대 풍력발전단지가 있다. 남쪽보다 보름쯤 늦게 피는 매화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렸다. 붉은 홍매화 사이로 대관령의 눈풍경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내가 전설 속 오류동에 잠시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서울 사람과 남쪽 지방 사람은 멀리 산 위에 눈이 쌓여 있고 아랫마을엔 온갖 봄꽃이 피어 있는 풍경을 어린 시절 달력 그림에서만 보았다지만, 우리는 매년 이맘때 그런 풍경 속에서 살고 자랐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심은 나무들은 이제는 고목이 되어 옛날 할아버지 모습처럼 시골집을 지키고 있다. 모처럼 부모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햇살이 고루 퍼진 마당 안팎을 돌아다니며 한 그루 한 그루 예전에 할아버지가 심고 아버지가 심고 형님이 심은 나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정말 오랜만에 전지가위를 잡고 과실나무들의 가지치기를 해보았다. 이때마다 떠오르는 구절 하나가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나뭇가지를 칠 때 옆에서 내가 ‘그러면 나무가 아파하지 않느냐’고 묻자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달래고 가르쳐서 다듬고, 나무는 가지를 쳐서 다듬는단다. 둘 다 그때는 싫고 아프겠지만, 나중에는 그래서 둘 다 큰 재목이 되고 큰 나무가 되는 거란다.”
할아버지는 따로 공부를 하신 분도 아닌데, 낫을 잡든 괭이를 잡든 전지가위를 잡든 손자들에게 늘 철학적이고 교훈적으로 말씀하셨다. 집 주변에 많은 나무를 심은 것에 대해서도 “그것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밤 한 톨을 화로에 묻는 것과 땅에 묻는 것의 차이다. 밤을 화로에 묻으면 당장 어느 한 사람의 입이 즐겁고 말겠지만, 땅에 묻으면 거기에서 나중에 1년 열두 달 화로에 묻을 밤이 나온다”고 말씀하시던 분이다.
전지가위야 한 손에 착 감기듯 들어오는 작은 연장이지만, 쟁기를 잡은 손에 옛 감각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 같아 내친김에 작업 장화로 바꿔 신고 봄빛 속에 2시간쯤 봄나물을 캐보았다. 둘러보면 겨우내 땅속에 숨어 있던 온 세상의 것들이 아우성친다. 작약도 새빨간 싹을 내밀고, 매화꽃 다음 자리를 다투기 위해 복숭아꽃과 자두꽃, 앵두꽃이 색색의 구슬처럼 작은 꽃망울로 시간을 다투고, 진달래와 개나리도 이제나 저제나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한낮이 되자 봄볕은 더욱 무르익고 먼 산의 눈은 더욱 희게 빛난다. 내가 이 집 마당에서 어린 시절 참으로 자애로운 사랑 아래 큰 사람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자연의 사랑이 함께했다는 것을 다시 깨닫듯 알겠다. 다들 주말에 집 밖으로 좀 나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