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완 국내편집장

<아이덴티티 경제학> 조지 애컬로프·레이첼 크렌턴 지음 | 안기순 옮김 | 랜덤하우스 | 2011

전통적인 순수 경제학은 경제행동과 관련된 인간의 ‘합리성’ 증명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철학에 가깝다. 경제분석은 효용 및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소비자 및 생산자의 선택을 해명하는데, 함수와 미분을 동원해 극한수준까지 고도로 계산하면서 최적의 선택을 찾아내려 한다. 경제학에서 수학적 방법이 널리 활용돼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을, 그래 보이지 않아도 실제로는 고도의 공학 계산기를 머릿속에 넣고 다니면서 치밀하게 계산해 극대화 선택을 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가정하고, 수학이라는 과학적 연산방법을 통해 데카르트와 뉴턴이 제시한 인간의 합리성과 법칙을 경제행동 영역에서 증명하려 한 것이다. 경제학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인간 경제행동의 비합리성, 즉 인간은 이자율이나 임금 수준 등에 따라 최적의 투자와 노동 공급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에 따라 심지어 그날의 날씨가 어떤지에 따라 투자·소비결정을 달리한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케인스 혁명’을 맞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애컬로프와 그의 제자인 레이첼 크렌턴은 덧붙여 ‘정체성’(Identity)을 인간 경제행동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로 경제학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창한다. 애컬로프는 정보 비대칭 및 효율 임금 등 인센티브 문제를 경제적 행동 선택의 핵심 문제라고 제시해온 경제학자이다. 저자들은 기존 경제 이론에서 말하는 ‘금전적·경제적 동기’ 외에 정체성,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회적 규범(Norm) 등 흔히 ‘비경제적 동기’라고 불리는 새로운 동기를 인간의 경제행동 선택에 작용하는 추가 요소로 넣는다.
정체성 경제학에 따르면, 경제행동을 하는 사람의 취향(선호)은 ‘사회적 맥락’에 따라 변한다. 오렌지와 바나나에 대한 평범한 취향은 대부분 개인적 특징에서 나오지만, 정체성과 규범은 사회 배경에서 비롯된다. 규범은 순간의 작은 결정들, 예컨대 조깅할 때 어떤 티셔츠를 입을까 같은 사소한 선택뿐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중대한 결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회전목마를 타는 행동을 보자. 나이가 좀더 많은 아이들은 비록 회전목마를 좋아하면서도 회전목마에 다가가지 못하고 자기보다 어린아이들이 타는 모습을 멀뚱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는다. 회전목마를 타기에는 자신의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하는 것이다. 자신이나 타인이 정해놓은 규범이 행동 선택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사례다.
저자들은 정체성은 경제학의 기본 이론인 ‘수요-공급 이론’만큼 유용하다고 말한다. 어떤 여성은 하루의 오전과 저녁 시간에는 집에 있으므로 자신을 어머니라 생각하고, 직장에 있는 낮 동안에는 전문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사회적 범주는 당시 그 여성이 자신을 어떤 존재로 보는지를 가리킨다. 정체성 경제학은 개인을 특정 사회 범주와 연결시키고, 해당 범주를 지배하는 규범을 명시한 뒤 정체성과 이에 따른 규범 속에서 개인들이 여러 결정에 따른 이익·손실을 고려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정체성 효용함수’가 만들어지고 이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이 분석된다. 전통적인 표준 경제모델이 오직 금전적 인센티브와 경쟁적 시장의 힘만 가지고 인간행동을 설명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람들은 규범을 준수하는 데 자발적으로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이 규범을 내재화하고 자신의 효용함수에 중요한 변수로 넣어 경제행동을 선택한다. 여기서 규범은 ‘사회의 시멘트’(Cement of Society)가 된다.
이것은 남성 직업, 저것은 여성 직업이라는 식으로 꼬리표가 붙는 이른바 ‘남녀 직종분리’ 현상도 정체성 경제학을 통해 설명된다. 여성이 과학 및 공학 관련 직업에 생물학적으로 부적합하다는 견해는, 유능한 통계학자의 확인이 필요한 가정이 아니라 그 직업이 남성 직업이라는 편견의 일부일 뿐이다. 전통적 경제 이론은 남녀가 비교 우위에 기초해 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직업을 갖게 되며, 또 여성은 교사·간호사 직업에 적합한 자질(보살피는 성향과 인내심 등)을, 남성은 관리자·의사·조종사 등에 적합한 자질이 있다고 설명해왔다. 특히 가사 일에 능숙한 배우자가 집에서 일하고, 소득 창출에 능숙한 배우자가 일하러 나가는 비교 우위 모델에서는 누구든 집에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바깥에서는 적게 일하는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밖에서 더 많이 일하고 가정 전체 수입의 대부분을 버는 여성이라도 남편보다 가사노동을 더 많이 분담한다. 이에 대해 정체성 모델은 “남녀가 자신의 성에 적절하지 않은 임무를 수행할 때 정체성 효용이 감소하며, 따라서 여성은 가정 수입의 대부분을 벌어오더라도 남성보다 더 많은 가사를 담당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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