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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크기와 우아한 디자인, 보잉을 살렸던 ‘점보’의 퇴장
[BUSINESS] 보잉747 단종
[156호] 2023년 04월 01일 (토) 마르코 에베르스 economyinsight@hani.co.kr

 
점보제트기는 세상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항공기로 꼽힌다. 50년 넘게 이 점보기를 생산해온 보잉(Boeing)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한때 세상을 풍미했던 이 전설적인 기업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마르코 에베르스 Marco Evers <슈피겔> 기자
 

   
▲ 2023년 1월31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근교의 에버렛 공장에서 생산한 마지막 보잉747기 앞에서 데이비드 칼훈 보잉 최고경영자가 연설하고 있다. REUTERS


보잉747은 하나의 비행기 이상이었다. 전설이고, 하늘의 별이고, 어쩌면 기적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거의 상상이 어려울 정도의 먼 거리를 날아가는 이 제트기의 비행 능력은 인류가 지구를 작게 느끼도록 해줬고, 엄청난 크기는 제트기 시대를 민주화하는 데 공헌했다. 이 여객기가 보급되면서 중산층은 장거리 항공여행을 누릴 여유가 생겼다. 멀리 떨어져 있던 세상이 전세계 수백만 승객에게 비로소 열렸다.

화물기나 고철 신세
이제 보잉747의 시대는 역사가 됐다. 출항한 지 53년 만에, 인기 절정의 시간을 한참 지나 보잉은 최근 마지막 항공기를 구매자에게 인도했다. 2023년 1월31일 미국 시애틀 근교의 페인필드에는 747기의 마지막에 경의를 표하려 회사 직원들과 명사들이 모였다. N863GT라는 편명을 단 이 거대한 기체는 이제 미국 화물항공사 아틀라스항공(Atlas Air)으로 소속이 바뀐다. 물류회사 퀴네앤나겔(Kühne+Nagel)의 용역을 맡아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화물수송기로 세계를 날아다닐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전설은 끝났다. 잊을 수 없는 특별한 비행기이지만 이제는 너무 낡았고 기체도 더러운데다 비싸다. 요즘 새로 나온 보잉787이나 에어버스 A350 기종은 연료 소모와 소음이 적고 유지관리비도 덜 들 뿐 아니라, 무엇보다 엔진이 강력해 단 두 대의 엔진으로 훨씬 더 먼 거리를 비행할 수 있다.
요즘은 점보기의 사망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보잉이 지금까지 생산한 이 유형의 항공기 수는 총 1574대로, 이 재벌 기업이 처음에 희망했던 생산량을 훨씬 넘어서는 수다. 이 중 다수가 현재 사막에 있는 장기 주차장에 놓여 해체되거나 녹슬기를 기다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북미 정기노선 항공사 중 보잉747을 여객기로 사용하는 회사는 이제 하나도 없다. 일본과 홍콩,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해 한때 이 보잉기가 담당했던 노선 어디에도 747은 없다. 중국은 여전히 전국을 통틀어 747기종을 10대 보유하고 있다.
서구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모든 항공사가 747 사용을 종료했는데, 단 한 곳 루프트한자만큼은 예외다. 오직 독일인만이 그들의 웅장한 옛날 고철에 감상적으로 매달려 있다. 현대적 장치를 갖춘 747-8 기종 19대, 그리고 옛 기종을 약간 수정한 747-400 기종 8대가 아직 하늘을 날고 있다. 이 중 서너 대는 얼마 뒤 운항 25주년을 맞는다. 세계 최대의 747함대인 동시에 그 자체로 진귀한 골동품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최근 생산된 747은 운행 전부터 이미 하나의 역설이었다. 갓 나왔지만 구식 비행기이고 처음부터 유행에서 멀어진 과거의 유산이었으니 말이다. 2022년 12월, N863GT가 시애틀 근교의 에버렛 공장에서 마지막 조립을 마치고 활주로로 나오자마자, 보잉은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던 이 제트기의 생산시설을 철거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항공기 제작 라인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기를 위해 급히 지었던 이 공장은 이제 상당 부분 비어 있는 상태다. 처음 있는 일이다. 총면적 40만㎡에 이르는 이 공장 단지를 앞으로 어떻게 사용할지는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무엇이 저 ‘하늘의 여왕’ 뒤를 이을까?
 

   
▲ 2023년 1월31일 미국 워싱턴주 에버렛의 보잉 공장에서 마지막 747기를 인도하는 행사가 열렸다. 한 직원이 747기 기념 모자를 쓰고 있다. REUTERS

에어버스에 시장 빼앗겨
공허함, 불확실함, 해체 그리고 운명의 완결을 향한 기다림. 에버렛 공장을 묘사하는 이 모든 말은 보잉의 현재 상황을 가리킨다. 훌륭한 공학 기술로 한때 세상의 경탄을 받았던 항공기 제조사가 이제 추진력과 장점을 모두 상실한 듯 보인다.
아주 오래전, 1958~1995년 보잉은 평균 5년에 한 번씩 베스트셀러를 시장에 내놓았다. 707, 727, 737, 747, 757, 767과 777 등의 번호로 불리던 이 모델들은 각 운항에 관해 나름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이 기업은 어려움을 맞는다. 혁신적 모델이던 장거리 제트기 787호는 과도한 생산비용을 투입한 뒤 계획한 것보다 훨씬 늦게 운항을 시작했다. 그런데도 최근에 품질상 문제가 드러나 여러 달 동안 운항을 중단해야 했다. 그 뒤 지금까지 보잉사는 이렇다 할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분명히 있음에도 말이다.
이 회사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업상 수익이 확실하지만 기술적으로 너무 낡은 보잉737 시리즈를 대신할 기종을 전폭적으로 새로 설계하는 일이다. 보잉은 이미 수년 전부터 이 방향으로 이런저런 계획을 구상했다 취소하기를 반복했다. 최근 데이비드 칼훈 보잉 사장이 언제 이 작업을 시작할지 투자자들 앞에서 공언했다. 그는 일러도 2035년이 될 것이라면서, 항공기 연비를 30%까지 낮추려면 날개가 공기 저항을 덜 받도록 두께를 줄이고 길이는 훨씬 늘어나도록 하는 등 완전히 새로운 기술을 갖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보잉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공동으로 10억달러 이상을 들여 이 기술을 개발하고 실험할 예정이라 한다.
보잉이 이렇게 시간 끄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전문가가 많다. 지금 당장 새 기종을 제작해야 함에도 회사가 그럴 생각 없이 차일피일한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737기는 여전히 수입을 많이 올리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몸체가 갸름한 소형 중단거리 제트기 붐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보잉과 경쟁관계에 있는 유럽의 에어버스와 마찬가지로, 보잉도 지금 한창 수입이 좋은 프로그램을 불확실하고 비싼 혁신 프로그램과 맞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항공업계 발전을 위해서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현재 운항하는 보잉의 돈줄인 737맥스는 출시되자마자 인도네시아와 에티오피아에 착륙하기 직전 추락하는 사고를 낸 뒤 설계 실패작으로 간주된다. 기술적 과실이 원인으로 밝혀져 보잉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했던 이 추락 사고는 346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런데도 얼룩진 과거를 가진 이 제트기의 생산업체는 끊임없는 주문 쇄도에 희희낙락하고 있다. 전세계 항공사들은 그사이 장치를 보강한 이 기종을 3600대나 주문했고, 이것만으로도 보잉은 몇 년간 끄떡없이 계속 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에어버스의 A320 제트기는 더 많이 주문받았다. 장부상 6천 대 이상이다. 수익성 높은 소형 항공기 업계에서 유럽 회사가 시장을 주도한 지 오래됐다. 칼훈 보잉 사장은 에어버스가 기종을 변화시키면서 시장점유율을 점차 높여가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최신 모델 A321XLR은 아직 생산 허가는 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독일 베를린~미국 시카고의 장거리 노선까지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항공기 회사는 이에 맞설 만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저명한 항공기 분석가 리처드 애불라피아는 보잉의 시장점유율이 30%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자금과 공학 능력 부족으로 새 비행기를 출시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 종말의 서곡이 이미 울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보잉은 더 이상 예전의 보잉이 아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일찍이 세계 제일이던 이 항공기 제작 회사가 얼마나 대담하게 항공의 세계를 변화시켰는지는 과거로 잠깐만 눈길을 돌려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이 회사의 경영진은 당당하고 순진하게 미래를 믿으면서 직원들의 열정을 촉진했다. 지금 이 회사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 열정이다.
 

   
▲ 항공기 애호가들이 2020년 9월8일 영국 맨체스터공항에서 버진애틀랜틱의 두 번째 보잉 747-400 항공기 ‘포에버 영’의 퇴역 전 마지막 비행을 보기 위해 모여 있다. REUTERS

열정과 혁신 사라진 보잉
보잉747은 두 친구의 악수와 맹세 한 번으로 세상에 나왔다. 1965년 성탄절을 코앞에 둔 시기에 항공사 팬암(팬아메리카항공)의 창립자 후안 트리페와 보잉 사장 빌 앨런은 함께 연어 낚시에 나섰다. 거물 고객 트리페는 앨런에게 370명 넘는 승객이 탈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항공기를 제작해달라고 끈질기게 졸랐다. 보잉의 최초 장거리 제트기 707의 탑승 정원 두 배를 웃도는 규모로 말이다. 항공여행 붐이 일던 격동의 1960년대였다. 기존 비행기와 공항만으로는 구름처럼 일어나는 항공여행 열기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트리페는 날마다 체험하고 있었다.
“네가 만들면 내가 살게”라고 트리페가 말하자, 앨런이 “산다면 만들지”라고 맞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대로 실현됐다. 1966년 4월에 맺은 구매계약서에는 항공기 25대를 납품한다고 적혀 있다. 첫 비행기는 1969년 말 팬암에 제공하기로 일정이 짜였다. 민간항공 역사에서 이보다 큰 규모의 수주는 일찍이 없었다. 보잉과 팬암은 쾌활하게 무시무시한 위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공학자인 조 셔터가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선정됐다. 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잉747의 아버지’로 명성이 자자하다. 당시 공장에는 최대 4500명에 이르는 공학자와 기술자가 엄청난 압력을 받으며 이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밤도 주말도 없이 계속 일할 때가 잦았다. 일에 대한 투철한 자세는 그들에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사람들”이라는 별명을 가져다줬다.
당시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사람들이 이뤄낸 성과는 오늘날 우리 잣대로 볼 때 완전히 상상 불가능한 일들이다. 개발과 제작 기간 겨우 29개월, 모든 공정은 컴퓨터이용설계(CAD)나 3차원(3D) 모델 같은 것 전혀 없이 오로지 수작업으로만 진행했다. 1968년 말 747기의 원형 비행기가 에버렛의 거대한 공장을 나섰다. 이 공장은 문자 그대로 수만 명의 노동자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거대한 아기를 둘러싸고 하늘 높이 쌓아 올렸던 거대한 창고 건물이다.
1969년 보잉747의 첫 비행을 보기 위해 전세계 언론사와 수천 명의 구경꾼이 에버렛으로 몰려들었다. 무게가 300t이 넘고 들어간 부품만 600만 개가 넘었다는 저 복잡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괴물이 정말 하늘을 날 수 있을지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보잉 사장 앨런은 최초의 비행을 맡은 조종사에게 “그동안 막대한 빚을 진 이 회사의 운명이 당신 손에 달렸다”며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엔지니어 셔터는 이륙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면서도 거대한 괴물이 과연 무사히 착륙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걱정은 기우였다. 최초의 보잉747기는 계산한 수치 그대로 날아올랐고, 76분 동안 비행한 뒤 부드럽게 착륙했다.
셔터의 제작팀은 보잉 내에서 제일 빛나는 부대는 아니었다. 보잉의 기존 기종이던 737기 제작을 진행한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그 밖의 인원은 나사의 아폴로 우주선 프로그램에서 다단계 추진 로켓과 달 탐험 자동차 부문에 참여했다.
 

   
▲ 2023년 1월31일 미국 워싱턴주 에버렛의 보잉 공장에서 생산한 마지막 보잉747에 ‘747의 아버지’로 불리는 수석엔지니어 조 셔터를 기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REUTERS

주주가치 좇으며 기술 등한시
보잉 내에서 가장 야심차고 콧대도 제일 높은 그룹은 보잉의 주요 미래 비전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최대 300명까지 탈 수 있는 초음속 항공기 2707이었다. 콩코드(Concorde·영국과 프랑스가 공동개발한 초음속 여객기로 1976년 취항)보다 더 빠르고 더 큰, 콩코드를 넘어서는 대응책이었다.
747과는 달리, 미국 정부는 초음속기인 보잉2707 개발비를 일부 지원했다. 이 기술이 국가의 이익과 관련 있다는 이유였다. 소련은 당시 ‘투펠로프 투 144’(Tupelop Tu-144)라는 초음속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소련의 이 항공기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전세계 26개 항공사가 보잉에 2707기 122대를 주문한 상태였다. 그중에는 팬암, 루프트한자, 콴타스(Quantas) 같은 항공사도 있었다. 1975년에는 초음속 2707기 1호가 운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1970년 보잉은 미국 항공사에 비행기를 단 한 대도 팔지 못했다. 엔진 문제로 747기 공급이 늦어졌고, 인플레이션과 금리가 단숨에 하늘로 치솟았다. 아폴로 프로그램이 종료했고, 1971년 미국 의회는 초음속기에 대한 금융 지원을 모두 취소했다. 대다수 의원이 초음속 비행기는 소음이 너무 심하고 비싸며 더럽고 불필요한 항공기라고 여겼다. 게다가 1973년에는 석유파동이 전세계를 휩쓸어 항공 수요가 위축됐다.
갑자기 보잉은 도산 위기에 처했다. 당시 6만 명 이상을 해고해야 했는데, 전체 직원의 절반이 넘는 수였다. 만약 그때 보잉747의 허가가 나지 않았다면, 보잉은 여러 사태의 소용돌이에서 그대로 벼랑에서 떨어졌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보잉747은 보잉이 위기를 뚫고 나오게 해준 버팀목이 됐다. 특히 1989년에 도입한 새 버전 747-400 덕분에 보잉은 여러 해 동안 장거리 대형 항공기 생산을 독점해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2007년에야 에어버스가 2층짜리 항공기 A380을 출시하며 독점의 벽을 깨고 들어오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실패했던 것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적어도 초기에는 이 새 모델(747)이 얼마나 엄청난 인기를 끌지 보잉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디자인 면에서도 지금까지 여전히 경탄을 자아내는 대단한 작품이지만, 당시로서는 디자인으로 승부를 걸 작품으로 생산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747기가 보유한 몇 가지 눈에 띄는 특징들, 예를 들어 항공기 앞부분이 완전히 열리도록 조종실이 기체의 등쪽에 자리잡는 것과 같은 특징은 전적으로 셔터 같은 항공공학자들의 실용주의 덕분에 탄생했다. 그는 애초 보잉747을 아주 쓸모 있는 화물수송기로 설계했다. 승객 수송은 단거리에만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항공기술 분야에서 선두주자이던 보잉이 어쩌다 이렇게 활력을 잃고 말았을까? 보잉은 1997년 자사보다 규모가 작은 경쟁사이던 맥도널더글러스(McDonnell Douglas)와 합병했다. 맥도널더글러스는 장거리 항공기 MD-11을 생산하던 회사다. 이 합병으로 이전 같으면 보잉에서 전혀 기회가 없었을 사람들이 대거 보잉사 고위직을 차지했다.
원래 보잉의 엔지니어팀은 높은 품질의 기술에 헌신하는 집단이었다. 그런데 새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이전의 기업문화는 크게 망가지고 말았다. 주가가 사업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셔터 등 전문 인력이 추구해온 디자인 원칙은 ‘주주 가치’보다 덜 중요한 사안으로 다뤄졌다. 새로 선출된 사장 해리 스톤사이퍼는 2004년 한 인터뷰에서 자기가 이 기업을 공학자들의 문화에서 이윤 중심으로 이끌었다고 자화자찬했다. 투자자들이 원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결국 돈이라면서 말이다.
스톤사이퍼와 이후 사장들이 야기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보잉의 주가는 상승을 거듭했으나, 공학적 전문 지식은 반대로 감소했다’고 말이다. 점보 개발자인 공학자 셔터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다가 2016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747기의 종말, 그리고 737맥스의 기체 구조상 결함으로 인한 추락 사고를 생전에 보지 않아도 되는 복을 누렸다.

ⓒ Der Spiegel 2023년 제6호
Letzter Riese
번역 장현숙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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