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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만 시스템’ 케이팝 세계 진출 길 터
[CULTURE & BIZ] SM엔터테인먼트의 발자취와 경영권 분쟁
[155호] 2023년 03월 01일 (수) 김윤지 yzkim@koreaexim.go.kr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 2022년 8월30일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가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인프라 협력 콘퍼런스’(GICC)에서 찬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국내 최대 케이팝(K-Pop) 기획사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인 이수만 대주주와 회사 경영진의 경영권 분쟁이 화제에 올랐다. 경쟁사 하이브와 카카오까지 분쟁에 가세해 케이팝 업계에 큰 변화가 일 전망이다. 이수만 총괄프로듀서는 1990년대 기획사가 주도하는 케이팝 아이돌 시스템을 완성한 인물이다. 30여 년간 국내 최대 기획사를 이끌었던 그가 케이팝 역사에 남긴 발자취에 비춰 이번 분쟁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1990년대 한국 가요계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그룹은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 <난 알아요>로 데뷔한 뒤 은퇴를 발표한 1996년 1월까지 10대의 ‘문화 대통령’으로 군림하며 숱한 신드롬을 낳았다. 특히 발라드와 트로트 중심이던 한국 대중음악 지형에서 댄스와 랩, 힙합, 헤비메탈을 접목한 음악을 선보여 주류로 변화시켰다. 10대 청소년이 가장 중요한 소비자 집단으로 떠오른 것도 큰 변화였다.

10대 시장 접수한 H.O.T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6년 갑자기 은퇴하면서 ‘10대의 우상’ 자리는 잠시 비었다. 이때 기회를 포착한 것이 이수만이었다. 이수만은 1989년 SM기획을 창업해 ‘현진영과 와와’, 한동준, 김광진, 제이앤제이(J&J) 등을 선보였고 이를 기반으로 1995년 S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이수만은 이전과 다른 시스템의 산물인 아이돌 그룹을 선보였다. 이들이 10대의 우상 자리를 넘겨받았다. 바로 에이치오티(H.O.T)였다.
H.O.T는 현재 기획사 아이돌 시스템의 원형이었다. 치밀한 계획에 따라 역할을 배정받은 멤버로 구성됐다. 메인 보컬, 댄스 담당, 힙합 스타일의 랩 담당, 방송에서 입담을 책임질 예능 담당 등 각 역할에 맞춰 멤버가 선발됐다. 무엇보다 10대를 타깃으로 삼았다. 서태지가 입증해준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히 10대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로 꾸몄고 멤버도 10대 후반~20대 초반이었다.
무대가 퍼포먼스 중심으로 바뀌면서 기획사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이전에도 춤과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가수로 선발되곤 했다. 클럽에서 춤을 추다가 기획사 사장의 눈에 띄어 데뷔하는 사례도 흔했다. 하지만 더 이상 멤버 개인기에 의존하는 무대가 아니었다. 퍼포먼스 중심으로 무대를 구성하려면 여러 멤버가 완벽하게 합을 맞춰야 했다. 연습과 훈련을 하는 오랜 과정이 필요했다. SM엔터테인먼트는 이런 작업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조직했다.
아이돌 시스템에서 훈련이 중요한 것은 이전 세대 가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 등장한 많은 그룹은 춤과 퍼포먼스에 중심을 두다보니 형편없는 노래 실력을 드러내는 때가 많았다. 그러자 ‘춤만 추는 게 가수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기획사들은 한층 경쟁력 있는 ‘상품’을 내놓기 위해 더 많은 연습과 훈련을 하는 체계적 시스템을 갖췄다. 그 과정에서 아이돌의 춤과 노래 실력이 크게 나아졌고 현재 케이팝 경쟁력의 근간이 됐다.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인 압축성장의 비결이 아이돌 시스템에도 도입된 것이었다.
 

   
 

2000년대 수익성 위기
2000년대 들어 가요계의 중심은 아이돌 시스템을 처음 도입한 이수만의 SM엔터테인먼트, 가수 박진영이 세운 제이와이피(JYP)엔터테인먼트(1996년 설립),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 양현석이 세운 와이지(YG)엔터테인먼트(1998년 설립) 3대 기획사가 차지했다. 이들 3대 기획사가 다른 기획사들과 구분됐던 것은 작사·작곡·안무 등 콘텐츠 창작 기능의 상당 부분을 회사의 생산조직으로 내부화했다는 점이다. 세 회사에는 대표 작곡가인 유영진(SM), 박진영(JYP), 테디(YG)가 대표나 이사 등으로 재직했다. 또 다양한 작곡가와 편곡자, 녹음 엔지니어, 매니저, 안무가, 코디네이터, 디자이너 등을 자체적으로 보유한 인하우스 시스템으로 기획사 특유의 색깔을 가진 음악과 아이돌 그룹을 만들었다.
인하우스 시스템은 규모의 경제 효과로 콘텐츠 제작을 효율적으로 하게 했다. 해당 기획사만의 스타일을 시장에 보여줘 경쟁에도 유리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시장이 계속 확대돼야 한다. 기획사의 에이스 그룹이 잠시 활동을 접으면 다른 아이돌이 대체하고, 동시에 다음 데뷔할 그룹이 출격 준비를 갖춰야 회사가 순조롭게 돌아간다. 이게 어긋나면 내부 인력의 증가가 기업에 부담이 된다.
2000년대 들어 한국 대중음악계는 위기를 맞았다. 세계적으로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이 확산해 음악산업에도 디지털화 바람이 불었다. 엠피스리(MP3) 파일이 카세트, 시디(CD)플레이어를 대체해 음반시장이 크게 위축됐다. 불법복제 문제도 불거졌다. 음반 제작자로서 수익이 크게 줄어드는 변화였다. 한국 대중음악계는 1990년대 큰 호황을 누린 탓에 이런 변화가 더 아팠다.
김건모, 조성모, H.O.T, 신승훈 등 1990년대 가수들의 음반 판매량은 100만 장을 넘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디지털 음원 비중이 늘면서 2000년 약 4104억원이던 국내 음반시장 규모가 해마다 25% 이상씩 줄어 2004년 1338억원 수준으로 감소했다. 2004년 이후에는 오프라인에서 50만 장 이상 팔린 음반이 단 한 장도 없을 정도였다. 2016년 방탄소년단(BTS)이 나오면서 이 기록이 깨질 만큼 음반시장의 타격은 컸다.
대신 디지털 음원 시장은 커졌다. 1997년 MP3 파일이 처음 선보인 뒤 음원을 내려받거나 실시간으로 즐기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늘어났다. 음원 시장이 커져도 ‘숨겨진 시장’이 크다는 게 문제였다. MP3 파일을 공유하거나 복제해 유통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음악저작물의 불법복제 문제가 불거졌다. 2003년 소리바다와 음악저작권협회 간의 저작권 침해 소송이 대표적이다.

시장의 한계 돌파
기획사에 음반 수익 감소는 심각한 위기였다. 음반과 공연이 수익의 두 축이다. 우리나라에서 공연 수익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어려웠다. 국내시장의 한계가 명확하다면 답은 국외시장밖에 없었다. 이수만은 동아시아 나라로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중국, 일본 등 모든 아시아 나라에서 활동하는 ‘아시아 네트워킹’을 고민했다. 한·중·일을 합치면 시장 규모가 15억 명에 이른다. 아시아에서 1등을 하면 세계에서 1등을 하는 것이란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H.O.T를 통한 중국 진출이었다. 1997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에 방영되면서 한류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다. 클론 등의 댄스음악이 대만과 홍콩 등에서 열풍을 일으켰다. 1998년 중국판 음반 발매, 2000년 베이징 H.O.T 단독 콘서트 등을 통해 성공 가능성도 확인됐다. 하지만 중국에서 거둔 수익은 미미했다. 불법복제 음반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다. 모두 10만 장 가까이 팔린 H.O.T 음반의 판매 수익으로 SM에 송금된 금액은 고작 250만원 정도였다.
SM은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일본 시장은 음반은 물론 공연 시장도 탄탄한 것이 매력이었다. 1998년 기준 일본의 음악시장 규모는 대략 한국의 30배 정도였다. 환율 차이 등으로 국내와 비슷한 공연만 해도 몇 배 이상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시장의 진입장벽은 그만큼 높았다.
일본 진출을 위해 SM은 1997년 걸그룹 에스이에스(S.E.S)를 준비했다. S.E.S는 재일동포를 멤버에 넣는 등 글로벌 지향으로 기획됐다. 그런데 적절하지 못한 일본 파트너를 선택하는 바람에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시장분석을 철저히 하지 못한 탓에 SM은 일본에서 철수해야 했다.
SM의 일본 시장 진출 꿈은 2000년 보아 데뷔로 다시 펼쳐졌다. 분석 결과 일본에선 한국보다 더 어린 가수에게 관심이 높았고 언어도 완벽해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보아에게 도쿄 시내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도록 했다. 정확한 일본어 발음과 일본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보아는 일본에 머무르면서 노래, 춤, 무대 매너, 언어를 혹독하게 훈련받았다. 데뷔 때도 ‘한국인’임을 부각하지 않고 일본어 음반으로 도전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0년 3월 일본에서 첫 음반을 낸 보아는 진출 1년 만에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일본 시장 정상에 올랐다. 보아의 일본 진출 전략은 여러 면에서 기존과 달랐다. 신인 캐스팅부터 훈련은 한국의 SM이 맡지만 이후 마케팅 등은 일본 현지 스태프에 의해 완성됐다. 철저하게 현지어로 노래를 부르는 점도 큰 차이였다.
케이팝을 부르는 한국인 가수도 아니고 제이팝을 부르는 일본인 가수도 아닌 ‘제이팝을 부르는 한국인 가수’라는 독특한 지위를 지닌 글로벌 상품이었다. 일본에서의 성공 뒤 한국인임을 부각해 ‘아시아 스타’의 입지를 강화했다. 한류의 외국 진출에서 전략 전환이 낳은 결과였다. 이후 케이팝이 세계로 나아가는 첫길을 연 성공작이었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3년 3월호


* 김윤지 연구원은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한 경제주간지 <Dot21> <Economy21>에서 산업부·경제부 기자를 했고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대기업 종속성과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정보기술(IT) 산업, 문화콘텐츠 산업, 중소기업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연재를 통해 문화산업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접근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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