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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아름다운 디지털 초원
[COVER STORY] 마스토돈, 트위터의 대안으로
[154호] 2023년 02월 01일 (수) 라르스 바이스브로트 economyinsight@hani.co.kr

마스토돈(Mastodon)은 트위터를 대체하려 한다. 이 새로운 분산형(탈중앙형) 소셜미디어의 장점은 무엇일까? 몇 번 클릭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라르스 바이스브로트 Lars Weisbrod <차이트> 기자

   
▲ 마스토돈과 트위터의 앱 아이콘. REUTERS


희망을 가질 만한 근거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이 트위터를 통제하게 된 뒤, 트위터는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위험이 있으면 빠져나올 길도 생긴다. 마스토돈 사용자가 매일 1만 명 이상 늘고 있다. 많은 사람이 트위터 계정을 취소하거나 사용을 중지하고 마스토돈이라는 소셜네트워크로 옮겨간다.
마스토돈은 2016년 독일인 오이겐 로흐코가 만들었다. 로흐코는 당시 23살로 독일 중부 튀링겐주 예나대학에서 컴퓨터공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막 졸업했다. 오랫동안 마스토돈은 덕후들을 위한 틈새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지고 있다. 로흐코는 최근 미국 기자에게 거의 자지도 먹지도 않으면서 매일 14시간 일한다고 털어놓았다.
마스토돈의 인터페이스는 트위터와 비슷하다. 사용자가 짤막한 메시지를 쓰면 거기에 댓글을 달 수도 있고 공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트위터와 달리 마스토돈 네트워크에는 중앙서버가 없다. 마스토돈은 완전히 탈중앙형으로 설계됐다. 800만의 사용자는 대부분 ‘인스턴스’(Instances)라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각 커뮤니티는 같은 서버를 공유하면서 소통한다. 중계 서버로 다른 서버와 소통한다.
가장 큰 인스턴스 ‘마스토돈닷소셜’(mastodon.social)에는 수십만 명이 가입했다. ‘뎃닷소셜’(det.social) 인스턴스는 풍자가인 얀 뵈머만이 1만 명 넘는 사용자를 위해 서버를 운영한다. 사용자가 수백 명이나 수십 명인 인스턴스도 있고, 어떤 사용자는 개인 서버를 혼자 운영하기도 한다. 각각의 서버는 운영자가 정해놓은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뎃닷소셜’의 경우 과격한 사상, 인종주의, 증오 선동은 금지됐다.

   
▲ 2016년 마스토돈을 만든 오이겐 로흐코. 로흐코는 당시 23살로 독일 예나대학을 막 졸업한 상태였다. 마스토돈 갈무리

코멘트 붙인 리트윗 없어
마스토돈에서 하는 일은 트위터와 마찬가지이지만 단지 조금 더 느리고 지루할 뿐이다. 이 점이야말로 마스토돈이 작동한다는 표시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고도의 주의력을 강요하는 모델을 추종했다. 이제는 정반대인 모델이 등장했다. 마스토돈에서 타임라인이 제대로 뜨지 않고, 이미지가 전송되지 않고, 어떤 세부 사항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스토돈의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마스토돈을 좋게 볼 이유다.
트위터에서 나와 마스토돈으로 옮기는 것은 대도시 주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시골로의 이주와 비슷하다. 소음, 비싼 부동산 가격, 부족한 공간 같은 문제를 뒤로하고 브란덴부르크주(베를린을 둘러싼, 주로 시골 마을들로 이뤄졌다)의 어느 마을에서 얼어붙은 땅에 삽질하는 것과 닮았다. 물론 힘겨운 일이지만 어딘가 진정성이 느껴지는 삶이다.
트위터가 대도시 힙스터들이 술집에서 벌이는 비꼬는 말의 싸움판이었다면, 마스토돈은 힙스터들이 주말에 도시를 벗어나 배추를 심거나 ‘탈성장 독서모임’에서 토론하는 마을에 비유할 수 있다. 마스토돈에서는 통상적인 개인의 타임라인 외에 이른바 ‘로컬 타임라인’(같은 서버의 이용자들이 올린 공개 게시물)을 중요하게 여긴다.
시골 마을에서 일어날 법한 일과 탈중앙적인 일은 동전의 양면인가? 이는 가능한 미래다. 이미 카셀의 ‘도큐멘타’(Documenta·독일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세계적 현대미술 전시회)에서 시험해본 바가 아닌가? 마스토돈을 보고 있자면 도큐멘타에서 본 것이 기억난다. 뭉친 권력 덩어리가 중앙의 파이프 시스템에 들러붙는 것을 막기 위해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엄격하게 분산하는 것이다. 카셀에서는 ‘룸붕’(Lumbung)이라는 개념이 중심 표어였다. 룸붕은 인도네시아어로 ‘마을 헛간’을 뜻하는데 시골에서의 의사소통 인프라로 인정받았다.

   
▲ 2022년 6월18일 독일 카셀에서 열린 현대미술 전시회 ‘도큐멘타 피프틴’(Documenta Fifteen) 개막일에 한 방문객이 인도네시아 미술집단 ‘타링 파디’(Taring Padi)의 작품 곁을 지나가고 있다. 작품에는 “차별과 토지강탈을 멈춰라”라고 적혀 있다. REUTERS

무조건 비판적인 트위터
트위터에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비판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인터넷상에서 똑똑하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이 사실을 매일매일 타임라인의 사소한 싸움에서 증명해야 하는가? 비판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트위터에서 비판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으로 축소돼버렸다.
어떻게 하면 달라질 수 있을까? ‘생산적 비판’은 공허한 개념이 되고 말았으나 마스토돈에서 이 개념은 잃어버린 알맹이를 다시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언가 자신의 것을 쌓아나간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새로운 진지함을 추구한다. 우리의 디지털 세계는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 마스토돈에서 내가 팔로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고 아이디어와 씨름한다. 그들은 타임라인을 쫓아가며, 적들의 게시물을 스크린샷으로 찍고 비꼬는 댓글을 다는 행태에 중독돼 있지 않다. 트위터에서는 “이것 좀 봐! 여기 멍청한 사람이 멍청한 말을 했어”라고 올리면 모두가 다 본다. 그러나 이런 말이 누구에게도 도움된 적이 없다.
마스토돈이 지금 트위터의 대안으로 거론되거나 마케팅되는 것까지를 포함해 다른 소셜미디어와 다른 점은 분산형 인프라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마스토돈에서 사용자는 타임라인을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것에 만족할 뿐, 코멘트를 붙이는 리트윗은 하지 않는다. 트위터에서 리트윗은 대부분 다른 사람에 대해 무슨 코멘트를 붙일 뿐 아니라,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놓는 구실을 했다.
이런 것은 피상적인 세부사항에 불과하다. 마스토돈에선 모든 것이 다를 수 있고 달라지게 할 수 있다. 단지 자본이 우리의 대화를 왜곡·변형할 동기가 생기지 않도록 바랄 뿐이다. 이득을 바라고 소셜미디어를 운영하는 자는 마치 담배나 감자칩을 생산하는 공장처럼 사용자가 빨리 중독에 빠지도록 구상해야 한다. 마스토돈 운영자들과 달리 트위터 주식 소유자들은 장시간의 하루 노동이 끝난 뒤 반쯤은 조는 상태에서도 이용자가 되도록 저급한 소통 욕구에 따라 타임라인을 훑으면서 화나게 하거나, 화내도 되는 대상을 찾기 원했다.

   
▲ 미국의 작가이자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 Hulton Archive/ Getty Images

우파에게도 열린 구조
3년여 전(2019년 7월) 미국 플랫폼인 갭(Gab)은 이용이 자유로운 마스토돈 소프트웨어를 쓰기로 결정했다. 갭은 당시 극우파들의 근거지로서 인간에 대한 증오를 거리낌 없이 발산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 플랫폼이 마스토돈의 ‘인스턴스’가 돼버렸다. 마스토돈의 소프트웨어팀은 공개적으로 갭에 반감을 표했다. 그들은 특히 마스토돈의 창립자 로흐코의 삶의 이력을 거론했다. 로흐코는 유대인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고, 11살에 독일로 이주했다.
로흐코와 그의 직원들은 마스토돈이 분산형 네트워크라는 점, 각각의 서버(인스턴스) 운영자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마스토돈이 작동하는 방식에 따르면, 로흐코도 자신의 인스턴스에 속하지 않은 한 극우 플랫폼을 네트워크에서 추방할 수 없었다. 갭과의 모든 소통을 차단할지, 몇몇 위험 인사와의 소통만 차단할지, 아니면 모든 것을 허용할지 결정해야 하는 것은 개개의 인스턴스 운영자다.
이런 이야기에 희망이 숨어 있다. 이미 오랫동안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에 관한 논란을 소셜미디어에서 진행해왔지만 별 의미도 없고 힘만 낭비하는 일이었다. 마스토돈을 사용하면 이제 자유의 문제가 새로운 관점에서 떠오른다. 어떤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차단할지는 각각의 서버 공동체, 혹은 개별 사용자가 결정할 일이다. 물론 이런 주제는 토론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생산적 토론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직접 토론 과정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위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좌파는 권력의 성문 앞에서 그들의 요구사항이 접수될 때까지 항의하거나 도덕적으로 비난했다. 이 방식으로는 거시적 관점의 도덕에 호소하는 일밖에 할 수 없다.
마스토돈에서는 추잡한 말 자체를 금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 말은 듣고 흘려버릴 수 있다. 이 방식을 통해 말이 마법의 힘을 가졌다는 미신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말이 힘을 얻는 건 오직 우리가 경청할 때만 일어난다.

‘디지털 소로’가 되자
우파가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마스토돈을 사용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는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다. 이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오픈소스 분산형 소프트웨어는 존재할 수 없다. 최근 로흐코는 이를 자동차에 빗대어 말했다. “모두가 자동차를 사용할 수 있다. 악한 것을 의도하는 사악한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도구가 일단 세상에 나온 뒤에는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다.” 어떤 자동차 대기업도 시민에게서 승용차를 빼앗을 수 없다. 이 권리는 오직 국가만이 가질 수 있다. 마스토돈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당국이 인스턴스에의 접근권, 혹은 인터넷 접근권을 차단할 때 비로소 끝난다.
이는 트위터와 다른 점이다. 트위터에서는 민간의 ‘담론 경찰’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전 플랫폼에 걸쳐 어떤 발언도 금지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전적인 통치는 분산형 네트워크에선 기술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 점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최소한 내 목소리를 듣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아낸다면 마스토돈은 내 목소리를 억압할 수 없다.
자급자족자로서 자신의 서버를 지하실에서 작동시켜 이 세계에 신호를 보내는 ‘디지털 소로(미국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말함)’가 되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어떤 사용자, 어떤 관리자와도 자기 의사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일지 의논할 필요가 없다. 서버공동체에 가입해 그 규칙을 받아들여도 언제든 탈퇴할 수 있고 다른 곳에 가입할 수 있다. 현실의 마을과 달리 디지털 마을에선 오로지 자유의사에 따라서만 거주한다.
마스토돈은 기술낙관주의를 다시 일깨워준다. 마스토돈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주의적이라고 할 만한 기술이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란 본인들의 지배욕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은폐하고 행세하는, 단지 가면을 쓴 우파이며 권위주의자일 뿐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런 권위주의적 자유주의의 행태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다면 트위터를 연구하면 된다. 그곳의 지배자는 일론 머스크다. 마치 봉건영주가 우리에게 봉토를 수여하듯, 샌프란시스코의 독재자로 사용자 인민에게 ‘표현의 자유’를 선물하려는 사람이다.

ⓒ Die Zeit 2022년 제52호
Unser digitales Dorf soll schöner werden
번역 최현덕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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