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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시대에서 투자의 시대로
[CULTURE & BIZ] 한국영화의 산업화 ①
[149호] 2022년 09월 01일 (목) 김윤지 yzkim@koreaexim.go.kr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 1993년 8월 청와대에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금융실명제는 뜻하지 않게 사채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던 토종 영화자본의 몰락을 불러왔다. 연합뉴스

특정 분야가 산업화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뒷받침돼야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배우가 연기를 하면, 카메라로 촬영해야 하고 필름을 상영하는 극장이 필요하다. 특히 과거에는 영화의 필름 프린트 수를 늘리기 어려워 극장만이 영화를 독점 상영할 수 있었다. 이런 특성으로 특정 영화관에서만 상영하게 해주는 필름 ‘배급권’이 중요했고, 그 거래에서도 자본이 필요했다. 촬영, 배급, 상영 등에서 자본투자의 필요성이 높아 산업화 유인이 강했다.
그런데도 영화의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지 못한 것은 자본조달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산업에서 기업가들은 금융기관이나 거부로부터 자본을 빌리곤 했다. 금융기관 이용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금융기관은 빌려준 돈을 제대로 돌려받을지 상환 가능성을 깐깐하게 따졌다.
상환 가능성은 금융기관도 정확히 예측하기 힘들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 담보물이다. 제조업에서 금융기관 접근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것은 공장과 기계를 담보로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문화산업에서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토지나 시설이 없어 금융기관을 이용하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영화 분야에서 고안한 자본조달 방법이 지역 간접배급 방식이었다. 영화를 만들기 전 제작사가 영화 배급권을 각 지역업자에게 미리 팔아 제작비를 모으는 방식이었다. 배급업자는 상영권 확보를 위한 제작 투자를 하고, 제작사는 권역별로 영화를 사전 판매하는 것이다. 제작 자본을 조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수익을 보장하는 배급권을 매개로 영화 투자금을 십시일반으로 조성하는 일종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이었다.

금융실명제 ‘폭탄’
1980년대 말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사들이 한국에 직접배급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진출하자 이런 구조에 균열이 생겼다. 외화는 한국 영화보다 상영 수익이 압도적으로 높아 외화 배급권은 자본조달 구조에서 필요한 재화였다. 흥행력 높은 외화를 할리우드 직배사들에 뺏긴 터에 이전의 간접배급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극장 상영에만 의존하던 영화시장도 바뀌고 있었다. 영화시장은 1980년대 말 비디오 대여 사업, 1990년대 중반 케이블방송으로 커졌다. 비디오와 케이블방송이 성장해 이 시장에 공급하는 영화의 규모도 커졌다.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한국에 직접배급의 깃발을 꽂은 것도 이런 미래를 내다봤기 때문이다.
영화시장 환경이 바뀌자 대기업들도 뛰어들었다. 1980년대 말 삼성·엘지(LG)·대우 가전 3사가 모두 영화 제작 투자를 시작했다. 대부분 비디오 판권 구매를 약속하고 투자하는 형태였다. 지방 배급업자들이 지역 배급권을 확보하려 영화 제작에 투자했듯이, 대기업들은 비디오 판권을 얻으려 투자했다.
대기업들은 자본, 인력과 함께 산업을 성장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영화산업에 스타 시스템, 기획, 홍보, 마케팅 등 앞선 할리우드식 전략을 도입했다. 1992년 삼성이 비디오 판권 구매 형식으로 투자한 <결혼이야기>가 대표적이었다. 기획자들이 시장조사로 당대 청년들의 사고방식과 생활 트렌드를 분석해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이를 기반으로 투자도 받아 탄생한 새로운 감각의 영화였다. 이 영화가 크게 성공하자 벽산, 해태, 한보, SKC, 새한, 진로 등 20여 개 대기업이 대거 영화산업에 진출했다.
그러던 차에 뜻하지 않게 지방 배급업자들의 소멸을 앞당긴 것이 1993년 금융실명제였다. 실명만으로 금융거래를 하도록 한 이 제도가 실시되자, 실명 확인이 되지 않으면 자금 인출이 금지되고 3천만원 이상 인출할 때는 국세청에서 출처를 조사했다. 금융실명제는 비자금 조성 등 각종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도입된 제도였다. 지방 영화 배급업자들의 손발을 묶으며 영화업계 재편을 앞당긴 것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자본이 부족하던 시절 지방 배급업자들이 영화사와 거래할 선급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극장은 유흥업소처럼 소비성 서비스업으로 분류돼 은행 거래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방 배급업자들은 3~6개월짜리 어음을 끊어 선급금을 치르는 사례가 많았다. 영화사들은 이 어음을 서울 명동 사채시장에서 현금으로 할인받아 외화를 수입하고 영화를 만들었다. 사채시장이 금융실명제 발표로 얼어붙었다. 검은돈이 적잖은 사채업자들은 영화계 어음을 취급하지 않으려 했고, 영화계 자금줄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지방 배급업자들의 빈자리를 채운 대기업들은 영화시장을 바꿔놓았다. 1990년대 초반까지 5억~6억원이던 한국 영화의 평균 제작비가 대기업 진출 이후 15억~20억원으로 올라갔다. 반면 1년 평균 100편을 유지하던 제작 편수는 1993년을 기점으로 60편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선택과 집중 원리로 상업성 높은 영화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제작, 배급, 상영, 비디오, 케이블방송에 이르는 영역을 수직통합해 수익 고도화도 추구했다. 재벌들이 특정 산업에 진출했을 때 수익률을 높이던 방식과 유사했다.

   
▲ 젊은 기획자와 대기업 자본이 손잡고 흥행 돌풍을 일으킨 1992년 기획영화 <결혼이야기> 포스터. 신씨네 제공

IMF로 대기업 1차 철수
그러나 대기업들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가 닥치자 이 시장에서 빠르게 퇴각했다. 사업 조정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수익성이었고, 영화가 조정 대상 1순위였다. 기대와 달리 영화 투자에서 획기적으로 높은 수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사업을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은 알았지만 획기적인 제작 능력을 보유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작비가 늘어나 실패했을 때 손실이 더 커졌고, 경쟁이 치열해져 외화 수입 가격만 올렸다.
대기업들은 성적표를 냉정하게 검토했다. 국내 영화 제작에선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고, 수익을 보전하던 외화 수입은 환율 상승으로 유지하기 어려웠다. 기대했던 케이블이나 위성TV의 성장은 예상보다 더뎠다. 대기업들은 퇴각을 결정했다. 1999년 삼성영상사업단이 <쉬리>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배급을 마지막으로 해체되면서 1990년대 영화산업에 진입했던 대기업은 대부분 철수했다. 1996년 뛰어든 제일제당(현 CJ)만 시장에 남았다.

기획영화 시대
대기업들이 철수했지만 영화산업에 남긴 영향은 컸다. 대기업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조직이었다. 사업을 검토하고 추진하는 방법을 알았고 기획서에 따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당시 토종 영화계는 그렇지 못했다. 기획안 없는 주먹구구식 투자가 많았고, 시장분석 없이 제작자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계에 이런 업자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1970~1980년대 프랑스문화원이나 독일문화원 등에서 영화를 감상하며 영화를 꿈꾼 젊은 인재, 대학에서 마당극과 민중문화운동을 하다 예술기획자로 나선 신진 세대가 등장했다. 이들은 과거 한국 영화 제작 시스템과는 다른 토대에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이들은 영화산업에 새로 진입한 대기업의 문을 두드렸다. 대기업 자본에 자신들의 기획력을 더해 새로운 영화 시대를 열었다. <결혼이야기>(1992), <미스터 맘마>(1992), <101번째 프로포즈>(1993), <투캅스>(1994) 등이 이들의 성공작이었다. 이렇게 전문 기획사가 기획하고 대기업이 투자해 만든 영화를 ‘기획영화’라고 불렀다.
기획사들은 전문 영역으로 분업화된 시스템을 갖추고 모든 것을 시장 중심으로 사고했다. 시장조사를 기반으로 제작 영화를 결정하고, 홍보전략을 활용했다. 목표 관객에 맞춰 극장을 선택하기도 했다. 프로듀서 시스템도 자리잡았다. 철저한 기획으로 제작 과정의 예산 집행을 효율적으로 하고 적절한 외부 투자자를 찾아 자금조달을 완성하는 것 등이 프로듀서의 역할이었다.
기획사들에 의해 한국 영화산업에 본격적인 ‘상업영화’ 시스템이 정착됐다. 영화 제작 공정은 철저하게 상업적 마인드에 맞춰졌다. 당연히 우려하는 눈길도 있었다. 예술로서의 영화로부터 멀어진다는 측면에서다. 코미디나 조직폭력배가 등장하는 시리즈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표 사례였다.
그러나 기획자들은 시대 감성을 담은 예술영화나 사회성 높은 영화에서도 흥행을 이끌어냈다. 관객이 당대 현실에서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를 찾아내는 것, 거창하게 말해 시대정신을 찾는 일이 기획자의 역할이었다. 기획자는 이것을 솜씨 좋게 영화로 빚어내 한국 영화 ‘대박’ 기록도 낳았다.
결과적으로 금융실명제를 비롯한 금융제도 개혁이 토종 영화자본을 밀어내고 대기업 산업자본 중심으로 영화자본을 바꿨다. 여기에 1980년대 영화 운동 등으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키우던 젊은 기획자와 감독들이 결합해 영화계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기업이 갑자기 퇴각하자 영화계는 더 큰 변화를 준비해야 했다.

* 김윤지 연구원은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한 경제주간지 <Dot21> <Economy21>에서 산업부·경제부 기자를 했고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대기업 종속성과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정보기술(IT) 산업, 문화콘텐츠 산업, 중소기업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연재를 통해 문화산업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접근해갈 계획이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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