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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등급 인플레
[기획]
[11호] 2011년 03월 01일 (화) 오세경 economyinsight@hani.co.kr

오세경 한국파생상품학회 회장·건국대 경영대 교수

프랑스 매체 <르파놉티크>(Le Panoptique) 기자 쥘리앵 샴파뉴는 “2008년 금융위기는 결국 위험에 대한 신용평가기관들의 잘못된 평가였다. 이들을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입을 올리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거나 마찬가지”라는 한 무디스 직원의 전자우편이 공개돼, 신용평가사 내부에서조차 등급 부풀리기 등 부실한 신용평가 과정에 우려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유럽연합(EU)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그리스·포르투갈에 이어 스페인까지 연이어 신용등급을 강등시키자 미국 신용평가기관들을 비난했다. S&P의 이런 행위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날까지 투자등급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과 대조돼 일관성 없는 편파적인 잣대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더 큰 차별을 받은 적이 있다. 무디스는 한국이 구제금융을 받기 직전인 1997년 11월 말에 신용등급을 A1에서 A3로 2단계 강등한 것을 시작으로, 12월 말까지 6단계나 내려 투자부적격인 Ba1을 부여했다. S&P와 피치도 투자부적격인 B+와 B-까지 내렸다. 반면 그리스는 S&P가 BB+로 투자부적격 등급을 부여했을 뿐 무디스나 피치에서는 투자적격 등급을 받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미국 신용평가회사에 편중된 과점 구조로 인한 부당함과 문제점 등을 해소하기 위해 유럽 단독으로 신용평가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기관투자자들도 신용평가기관이 매기는 등급을 과신하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어 전미보험감독자협의회(NAIC)는 채권투자회사 핌코 등 외부 기업을 고용해 주택 및 상업 모기지 채권에 대한 위험을 평가하고 있다.
국내 신용평가사 경우에도 문제는 매한가지다. 2003년 분식회계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유동성 위기로 카드채 사태를 몰고 왔던 LG카드, 최근 법정관리를 신청한 대한해운과 부도난 진흥기업 등 모두 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에야 부랴부랴 신용등급을 떨어뜨렸다.
 
워크아웃 직전까지 투자적격 등급
진흥기업은 지난해 6월 실시된 채권단의 건설사 신용위험평가 당시 효성그룹의 자금 지원 약속으로 A∼D등급 중 겨우 B등급을 받았다. 또 건설사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로 경고음이 계속 울렸음에도 신용평가사들은 마지막까지 투자등급 BBB를 부여했다. 결국 워크아웃 신청 소식이 전해지자 뒤늦게 CCC로 등급이 조정돼 많은 투자자들이 손실을 입게 되었다.
대한해운의 경우 사태가 더욱 심각하다. 지난 1월25일 한신정평가와 한국신용평가는 대한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신용등급을 BBB+에서 D로 10단계나 하향 조정했다. 이는 지난해 11월 대한해운의 무보증사채를 BBB+(안정적)로 평가한 이후 불과 두 달 만이다. 당시 시장에서 거래되던 대한해운 회사채의 시장금리는 같은 등급의 평균 시장금리보다 1%포인트나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시장의 평가보다 신용평가사가 준 등급이 훨씬 후했다. 뿐만 아니라 대한해운의 법정관리 신청은 유상증자를 한 지 1개월 만에 일어났다. 유상증자 당시 대표 주관사를 맡은 현대증권은 설명서에서 “주요 화물(철광석·석탄 등)에 대한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낮으며, 신조선 발주 취소 및 인도 연기 등 지속적인 공급 조절 노력을 한다면 2008년과 같은 폭락 없이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보인다”는 긍정적 전망을 제시했다.
대한해운의 경영 및 재무 상황이 신용평가사와 주관 증권사가 전망한 것처럼 과연 안정적이고 법정관리 신청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까? 이미 곳곳에서 위험 징후가 나타났다.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대한해운의 총차입금은 2조1천억원을 넘어섰고, 매출액 대비 상각전영업이익(EBITDA) 비율은 1.8%, 금융비용 대비 EBITDA 배수는 0.3배까지 떨어졌다. 이 정도의 회사라면 투자등급 채권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증권사 크레디트 애널리스트들도 대한해운이 유동성 위험에 이미 빠진 상태로 투자적격 등급은 아니라는 의견이었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의 레이팅(평가 등급) 인플레이션에 대한 시장의 불신은 심각한 상태다.
2009년 4월22일 피치는 현대차와 기아차 모두 등급을 한 단계 하향 조정했고, 무디스는 현대차에 대해 Baa3를 유지하고 기아차만 Ba1 투기등급으로 낮췄다. 그러나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당시 시장의 거센 압력에도 불구하고 기아차의 신용등급을 낮추지 않았다. 기아차는 이전부터 회사채 업무 종사자 사이에 불신이 가장 큰 종목이었다. 2007년 크레디트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기아차 신용등급에 대해 ‘적정성 의견이 다르다’고 평가한 응답자는 분석 대상 전체 118명 가운데 무려 71명(60%)에 달했다.
지난해에 주로 그룹 계열이나 해외 공사에 강점이 있는 건설사 중심으로 신용등급의 상향 조정이 이어졌지만, 거듭된 위기설과 구조조정으로 시장의 인식은 상당히 달랐다. 지난해 11월22일 기준 SK건설(A0)의 3년물 회사채 수익률(금리)은 5.52%로 동 신용등급에 비해 118bp(1.18%, 1bp=0.01%) 높았고, 현대엠코(A0) 역시 동 신용등급에 비해 무려 195bp 높았다. 한 단계 낮은 A-등급 평균 수익률보다 162bp 높았다. 쌍용건설(BBB+)의 수익률 격차는 더 커서 동 신용등급에 비해 253bp 높은 10.28%를 기록해 BBB+등급 내 가장 높은 수익률이었다. 이런 시장 분위기는 건설사들의 신용등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방증한다.
한국기업평가(한기평)에서 발표한 회사채·기업의 신용등급을 결합한 등급별 비중 추이를 보면(<표> 참조), 투자등급의 비중은 계속 증가하고 투기등급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물론 금융위기 이후 기업들의 경영과 재무 상황이 개선된 것을 반영했기 때문이지만, 일부는 레이팅의 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지 않느냐는 의구심이 든다.
국내에서 레이팅 인플레이션과 뒷북 조정이 일어나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 구조적 문제가 있다.
먼저 발행업체가 수수료를 지급하는 구조(Issuer Pays Model)에 있다. 신용평가를 받는 피평가자가 수수료를 부담하는 현재의 구조하에서 피평가자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등급을 제공할 신용평가사에 평가를 맡기고, 신용평가사는 이를 의식해 등급을 관대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다. 특히 금융상품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짐에 따라 신용평가기관들도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등급을 높게 부여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있다.
둘째, 신용평가사가 컨설팅 사업 등 다른 사업을 함께 영위하면서 신용평가가 객관적이고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신용평가기관들은 피평가기업에 각종 정보를 제공해 수수료 수입을 얻고, 컨설팅 업무를 수주하기 위해 피평가기업의 눈치를 보게 된다. 특히 주택담보대출유동화증권(RMBS) 같은 구조화 증권의 경우 더욱 그렇다. 구조화 증권의 주요 설계자인 증권사는 원하는 신용등급을 얻기 위한 거래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융통성을 많이 가질 뿐만 아니라, 구조화 증권을 제공하는 금융기관들은 신용평가사 선택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나라 신용평가 시장이 협소해 차별성이 없는 3사가 과점체제 속에 과당경쟁을 하기 때문에 발행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한기평과 한국신용평가(한신평)의 주요 주주가 글로벌 신용평가사로 바뀌면서 시장점유율을 높이려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도 문제를 더욱 조장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넷째, 신용평가기관은 과거의 데이터를 기초로 평가모형을 설정한다. 따라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건과 같이 금융 상황이 급변하는 경우 부실한 평가를 하게 된다. 한 예로 국내 3사가 제공하는 평균부도율 데이터를 보면, 높은 신용등급의 부도율이 낮은 신용등급의 부도율보다 높게 나타나는 역전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들  수 있다. 1999년에 심하게 나타났고, 2003년 이후에도 매년 발생해 평가모형의 신뢰성을 낮추는 원인이 된다.
마지막으로 신용평가사에 대한 정부의 정책 및 제도상의 문제를 들 수 있다. 감독 당국은 신용평가사들이 제대로 평가하도록 유도하지 못하며, 복수 신용평가 의무화 제도를 시행해 신용평가사들이 안이한 자세를 갖는 데 일조하고 있다.
발행자에 비해 열위한 신용평가기관의 교섭력은 발행자의 ‘등급 쇼핑’과 평가기관의 등급 남발의 부작용을 초래한다.

겸영 금지하고 복수평가 재고해야
이를 개선하려면 투자자 보호에 필요한 신용평가기관의 독립성과 객관성을 강화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미국의 ‘도드-프랭크법’에서 제안된 것과 같이, 최초 평가시 발행자의 신용등급 쇼핑을 방지하기 위해 신용평가기관을 강제 지정하는 권한을 감독 당국에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아울러 현재와 같은 ‘발행자 지급 모델’을 회사채나 기업어음의 투자자들이 수수료를 부담하는 ‘투자자 지급 모델’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해상충을 방지하기 위해 신용평가기관의 컨설팅 업무 겸영을 금지하고, 비즈니스 이해관계가 신용평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국내 신용평가회사들은 금융위기 때마다 급격한 단기적 등급 변동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들이 사용하는 일반적 등급 논리가 경기 사이클에 관계없이 일정한 등급을 적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위기시 단기 유동성의 제약과 구조적 문제를 신용등급 산정에 반영해야 한다. 이는 모든 금융위기의 종착역이 단기적 유동성 확보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skoh@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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