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HERI) 소장

세계적 경영학자인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지난 1월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공유 가치의 창조’(Creating Shared Value)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요지는 이렇다. “자본주의는 위기에 빠져 있다. 기업에 대한 신뢰도 낮아지고 있다. …기업의 목적이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포터 교수는 경영전략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저명한 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1979년 ‘경쟁전략’(Competitive Strategy) 개념을 담은 논문을 발표하면서 경영이론 분야의 최고 스타가 됐다. 1985년에는 <경쟁우위>(Competitive Advantage)라는 책을 내놓는다. ‘경쟁전략’은 포터 교수의 최대 히트 상품이 됐다.

‘싸워서 이긴다’에서 ‘공존’으로
그런데 그는 2006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전략과 사회’라는 글을 내놓으면서 사람들을 또 놀라게 한다. “건강한 기업 없이 건강한 사회는 없다. 건강한 사회 없이 건강한 기업은 없다.” ‘싸워서 이기는 방법’에 대한 대가가, ‘공존’을 이야기한 것이다. 지난 1월 포터 교수는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한다. ‘공유 가치’라는 용어를 들고 나왔다. 가장 ‘친기업’적인 학자가 어떻게 이렇게 ‘친사회’적인 구호를 외치게 됐을까? 기업은 재무적 성과뿐 아니라 환경 및 사회적 성과를 고려해 경영돼야 한다는 사회책임경영(CSR)이 그만큼 주류 경영학자와 현직 경영자들에게 중요한 경영 이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CSR의 ‘주류화’(Mainstreaming)가 시작된 것이다.
최근 발효된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표준 ISO 26000은 이런 ‘주류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ISO 26000은 지난해 11월1일 5년간의 개발 과정에 마침표를 찍고 공표되었다. 지배구조, 인권, 노동, 환경 등 다양한 사회적 책임의 이슈를 포괄적으로 담아낸 ISO 26000에 전세계 기업과 공공기관 및 비영리기관 등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배구조, 인권, 노동 관행, 환경, 공정 운영 관행, 소비자 이슈, 지역 사회 참여와 발전 등의 이슈가 여기서 다뤄진다.
ISO는 사회적 책임 관련 표준을 만들면서 국제노동기구(ILO), 유엔 글로벌콤팩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고, 유엔,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 등 CSR 관련 기구들의 지지와 협조를 받으면서 표준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ISO 26000이 국제 노사관계 표준, 국가 정책의 표준, 기업 경영 성과 보고의 표준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ISO 26000 도입에는 여러 나라의 다양한 정책적·정치적 고려가 관철되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은 논의 초기부터 이 표준 제정을 반대해왔다. CSR가 새로운 무역장벽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즉, 선진국이 중국 제품을 수입할 수 없는 이유로 노동·인권·환경 등 CSR 이슈를 내세울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인건비와 환경 관련 비용 증대 등으로 중국 기업의 생산 원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현재의 고성장은 이어지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중국은 마지막 순간에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와 함께 ISO 26000 논의도 큰 탄력을 받았다. 이는 중국이 이제 내수를 늘려야 할 시기라는 정책적 판단과 맞닿아 있다. 이전까지는 노동자의 임금을 최저선으로 잡아둔 채 가격경쟁을 통해 수출을 늘려 성장했다면, 이제는 노동자에게 적절한 임금을 지급하면서 구매력을 키워 내수시장을 확대하면서 성장하는 모델로 돌아설 시점이 됐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하면 특히 중국에 진출한 해외 투자자들에게도 같은 요구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판단에서, 오히려 CSR를 앞장서서 이야기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이다. 복잡한 정치적·정책적 계산 중에 CSR가 경제정책의 주요 요소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2008년 10월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왼쪽)에게 국제자문위원 위촉패를 주고 있다.

SRI는 사회적 책임을 투자 정보로 활용
세계적 친기업 경영학자가, 국제표준기구가, 중국이 모두 CSR를 주목하고 나선 이유는 뭘까? CSR가 이렇게 빠르게 주류화되는 까닭은 뭘까? 역시 궁극적으로 소비자와 투자자의 변화가 큰 요인이다. 소비자의 변화는 늘 기업을 떨게 만든다. 특히 소비자가 똑똑해질 때, 기업은 무척 두렵기 마련이다. 최근 전세계 소비자들은 소비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 소비자들이 가격과 품질, 브랜드에 초점을 맞춰 소비해왔다면, 이제는 윤리·환경·인권 같은 이슈에 신경 쓰는 소비 행태로 변화하고 있다. 1993년에는 미국인 중 66%만이 윤리적 소비를 한 데 비해 2004년에는 86%로, 불과 10년 만에 20%포인트 상승했다. 한겨레경제연구소 조사 결과, 한국에서는 2007년 44%던 사회적 책임성 소비자가 2009년 55%로 11%포인트 늘어났다.
거대 구매자도 변화하고 있다. 대규모 조달을 하는 정부기관의 변화가 가장 눈에 띈다. 오스트리아 사회복지부는 최근 정부 구매업체 선정 평가 때 공급자의 사회적 책임성을 아예 점수화해 포함시켰다. 덴마크, 포르투갈, 브라질 등 여러 국가에서 비슷한 조달 기준을 도입하려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소비자 또는 구매자의 행동이 변하면, 물건을 팔아야 하는 기업도 자연스럽게 따라서 변화하게 된다.
투자자의 변화 또한 큰 영향을 끼친다.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금펀드, 국부펀드 등 거대한 투자자들이 사회책임투자(SRI)를 이미 도입해 실행하고 있다. 과거 SRI가 기업의 경영 활동이 사회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해 투자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SRI는 사회적 책임을 투자 정보로 활용한다. CSR 성과가 재무적 성과와 양(+)의 상관관계를 보이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을 투자 정보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최근에는 골드만삭스, PRI 등 다국적 투자 은행들이 앞다투어 도입하는 투자 방법이 됐다.
2001년과 2009년을 비교해보면, 2001년 이미 상당한 규모의 SRI 시장 규모를 가지고 있던 미국은 32% 성장했으며 유럽은 2400%나 성장했다. 이들에 비해 아직 경제 성장 단계에 있어 관심이 덜할 것으로 보는 한국 역시 1400% 성장해 현재 3조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투자자의 행동이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변하면, 자연스럽게 자금을 유치해야 하는 기업은 변화하게 된다. 이제는 기업 CSR 담당 부서의 일이 아니라, 투자홍보(IR)와 기획실의 기능이 되고 대표이사가 관심 가져야 할 일로 바뀐다. 기업 내부에서도 한 단계 주류화하는 과정을 겪는다.
‘사회적 책임’은 특히 보편적 복지가 주요 이슈로 토론되는 지금, 복지 논쟁에서 빠진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보완책이다. 아무리 정부가 정책을 통해 많은 복지를 제공해도, 시장에서 임금 및 고용 안정성과 제품 안전 등의 후퇴를 통해, 사회에서 환경 파괴와 이타적 기부 행위 감소 등을 통해 정부 정책으로 늘어난 복지 그 이상이 오히려 줄어들 수도 있다. 책임 있는 시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없다면 말이다. ISO 26000의 공표와 적용은 그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시민사회가 친기업 인사들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충분히 친사회적이라면 말이다. 기업이 친사회 인사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충분히 친기업적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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