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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재 러·중 의존 줄이려 자유무역협정 협상에 박차
[PROSPECT] 유럽, 무역도 실용주의로 선회
[145호] 2022년 05월 01일 (일) 미하엘 자우가 economyinsight@hani.co.kr

오랫동안 자유무역협정을 금기시해왔던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무역협정에 대한 입장을 선회하고 있다. 안정적인 원자재 수급을 위해서도 자유무역협정은 필수불가결해졌기 때문이다.

미하엘 자우가 Michael Sauga <슈피겔> 기자

   
▲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 그리고 쁘라윳 짠오차 타이 총리(왼쪽부터)가 2019년 11월 타이 방콕에서 열린 제3회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있다. REUTERS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수많은 유럽인이 지향하는 정치인상에 부합하는 정치인이다. 아던 총리의 이미지는 여성권리와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로 각인돼 있다. 이런 이미지에 걸맞게 아던 총리는 마오리족 전통의상을 즐겨 입는다. 2019년 3월 크라이스트처치 모스크 총기 난사 사건 때 그가 피해자 가족과 부상자를 위로하며 안아주던 사진은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미국의 한 잡지는 그를 “전세계에서 효율성이 가장 뛰어난 리더”라고 칭했다.

   
▲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여성권리와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로 각인돼 있다. 아던 총리는 2022년 7월 말 유럽연합-뉴질랜드 자유무역협정에 서명하기 위해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을 만날 예정이다. REUTERS

두 여성 정치인의 서명식 투샷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자신을 아던 총리와 같은 부류의 정치인으로 생각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경쟁 관계의 두 여성 정치인이 2022년 7월 말 유럽연합-뉴질랜드 자유무역협정 서명을 위해 회동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 집행위 본부에 걸린 유럽연합 깃발을 배경으로 두 여성 정치인의 멋진 투샷도 자연스럽게 예상할 수 있다.
두 여성 정치인의 자유무역협정 서명식 투샷은 서구의 여성 파워를 극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의 마초 전쟁광들과 대립 중인 유럽연합의 새로운 전략 방향을 보여줄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 이후 서구와 러시아의 상호 제재가 글로벌 무역체제를 무력화했다. 이후 유럽연합은 우호국 혹은 천연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된 국가와의 양자 자유무역협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뉴질랜드와의 자유무역협정 외에 향후 몇 달 동안 칠레, 멕시코와 자유무역협정 체결이 예정돼 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호주)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사전 회담도 계획돼 있다.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독일에서는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장관이 미국과의 포괄적인 무역·투자협정에 관한 실무회담을 재개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유럽 정치인들은 석유·가스·석탄 수급을 위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분주히 누빈다. 한 예로 발디스 돔브로우스키스 유럽연합 집행위 수석부위원장은 유럽의 안정적인 원자재 수급을 위해 일련의 협상 개시를 앞두고 있다.
“우리는 구리나 니켈 등의 원자재 수급에서 러시아 의존도를 줄이고, 동시에 다른 공급처를 물색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무역협정은 원자재 공급처 다변화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돔브로우스키스 수석부위원장은 유럽연합이 우즈베키스탄과의 동반자협정 등 기존 무역협정을 업그레이드하고, 신규 자유무역협정을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체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연합이 러시아에는 제재를 가하는 한편, 전세계 다른 지역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말이다.
라트비아 총리 출신의 돔브로우스키스 수석부위원장이 실제로 양자 자유무역협정을 화려하게 부활시킬 수 있다면 이는 전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국제사회는 수십 년 동안 관세를 인하하며, 시장 장벽을 낮추고 지식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양자 혹은 다자 무역협정을 체결해왔다. 이렇게 유럽연합이 지금까지 체결한 자유무역협정은 66개가 넘으며, 이는 유럽연합 상품거래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지난 10년간 유럽에서 자유무역협정의 인기가 한풀 꺾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놀라운 실적이다.
지난 몇 년간의 상황을 살펴보자. 유럽과 미국의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협상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던 이유는 무엇보다 ‘염소로 표백된 닭’(Chlorinated Chicken) 등 질 낮은 미국산 농축산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또한 유럽연합과 캐나다가 체결한 포괄적경제무역협정(CETA)의 투자보호규정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이제 포괄적경제무역협정은 발효됐지만, 의회 비준을 받은 것은 여전히 일부이다. 그리고 유럽연합은 마지막 손질까지 끝낸 메르코수르(MERCOSUR,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파라과이 남미 4개국 경제공동체)와의 자유무역협정을 중단했다. 자이르 보우소나르 브라질 대통령의 열대우림 파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였다. “CETA 중단하라”가 적힌 핀버튼은 좌파 진영의 상징이 됐다. “핵에너지? 고맙지만 사양합니다”라는 핀버튼처럼.
이제는 실용주의가 바야흐로 시대정신이 됐다. 유럽연합은 모든 자유무역협정 초안에 지속가능성 조항을 추가하고 있다. 환경운동가들도 더는 자유무역협정을 무작정 거부할 수만은 없었다. 또한 유럽연합의 지정학적 주요 수단으로서 자유무역협정의 중요성이 급격하게 커졌다.
푸틴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대러시아 무역의존도를 확 줄이려는 유럽연합은 천연가스·오일·석탄뿐만 아니라 리튬 등 주요 원자재의 신규 공급처 모색에 나섰다. 돔브로우스키스 수석부위원장은 계약 대상으로 고려되는 국가와 지역에 대한 보고서 제출을 지시했다.
유럽연합은 오래전부터 무역의존도가 높은 상대국에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연합이 주요 산업을 유럽으로 다시 가져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프랑스 엘리제궁의 보호무역주의를 신봉하는 고위 공무원들도 인지하기 시작한 ‘전략적 자주성’은 단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논리다. “이제는 전세계 최대한 많은 지역에서 최대한 많은 무역 파트너를 발굴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유럽의회 베른트 랑게 무역위원회 위원장은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신규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집중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무역기구(WTO)가 글로벌 상품무역의 심판관이자 주체로서 본연의 기능을 거의 수행하지 못하는 점은 뼈아픈 대목이다. 서구는 러시아를 더는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러시아 정부는 이에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세계무역기구의 업무가 몇 주 전부터 마비 상황이다. 일정이 줄줄이 취소되고 각종 위원회는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의 각료회의, 일반이사회, 상품이사회 회의가 줄줄이 연기됐다. “세계무역기구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양자 자유무역협정은 최상의 대안”이라는 것이 베른트 랑게 위원장의 생각이다.
새로운 유럽연합 전략의 당면 목표는 러시아의 고립이 됐지만, 사실 유럽연합의 애초 표적은 중국이었다. 중국은 자국의 권위주의적 경제·사회 질서가 서구의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중국은 글로벌 영향력 확대를 위해 정교하게 수립된 무역정책과 무역협정정책을 구사했다.
중국 정부는 2019년 11월, 세계무역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14개국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체결했다. 동시에 중국은 노르웨이와 몰도바 등 유럽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등을 포함한 걸프만 국가의 무역블록과 실무협상을 하고 있다.
글로벌 무역 대국들은 인권침해를 이유로 상호 제재를 했다. 이 와중에 중국이 리투아니아산 수입을 보이콧하면서 중국과 유럽연합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2021년 11월 자국 수도 빌뉴스에 대만의 공식 대표부 설치를 승인했다. “무역정책은 오늘날 외교정책의 일부가 됐다”고 브뤼셀에 있는 싱크탱크 ‘브뤼겔’(Bruegel)의 앙드레 사피르는 설명한다. 사피르는 싱크탱크 브뤼겔에서 글로벌화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이 사실을 어렵게 배워야 했다.”
그 결과, 유럽연합은 경제나 외교 등 다양한 목적을 지향하는 자유무역협정으로 ‘컴백’했다. 예를 들어 인구 500만 명인 뉴질랜드와의 자유무역협정은 유럽연합에 경제적으로 그다지 큰 실익이 없다. 대신 뉴질랜드와의 자유무역협정은 다른 서구 민주주의국가와의 관계가 유럽연합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외부에 천명하려는 목적이다.
 

   
▲ 시민 및 활동가 수천 명이 2016년 9월2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과 포괄적경제무역협정(CETA)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유럽연합과 미국이 2021년 발족한 무역기술위원회(TTC)도 마찬가지다. 미·유럽연합 무역기술위원회는 TTIP 규모의 포괄적인 자유무역협정이라기보다는, 중국의 기술·정치 공세에 맞선 대항마로서 디지털경제를 위한 공동의 규정과 기준 마련에 방점이 찍혀 있다.
유럽연합은 칠레·호주와 자유무역협정 실무협의도 진행 중이다. 두 국가에는 기후·교통 전환에 반드시 필요한 에너지와 원자재가 풍부하게 매장돼 있다. 특히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은 “원자재 수급에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돔브로우스키스 수석부위원장은 설명한다. 멕시코와의 자유무역협정, 그리고 메르코수르와의 자유무역협정은 유럽 투자산업과 소비재산업의 신규 시장을 창출해 러시아 사업의 피해액을 메울 것이다.
브라질의 극우 포퓰리스트 보르소나르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메르코수르와의 자유무역협정은 체결되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보르소나르 대통령의 정적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애칭 ‘룰라’) 전 대통령이 2022년 10월 브라질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메르코수르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둘러싼 상황은 급변할 수 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시장개방이 유럽의 대기업에 안겨줄 장점은 엄청나다.
캐나다와의 자유무역협정도 마찬가지다. 유럽연합의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 캐나다는 주요 원자재와 반제품(半製品)을 보유하고 있다. 유럽은 러시아와 벨라루스에서 비료 수입을 중단한 이후, 캐나다에 비료 수급을 크게 의존하고 있다. 유럽연합 처지에서 캐나다와의 포괄적경제무역협정(CETA)은 공세적인 원자재 수급에 지렛대가 될 수 있다.
독일 헌법재판소가 2016년 CETA에 합헌 판결을 내렸지만, 독일 정부는 여전히 CETA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다. 이제라도 독일 정부는 난마처럼 얽힌 사안을 하나하나 풀어가야 한다. 또한 최근 국제 정세에 따라 좌파 진영도 자유무역 정책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바꿀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회의 라인하르트 뷔티코퍼 녹색당 의원이 대표 사례다. 뷔티코퍼 의원은 “자유무역협정이 지속가능성, 민주주의, 공정성 등 유럽의 가치를 반영한다면 우리가 자유무역협정에 원칙적으로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자유무역협정은 사안별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럽연합이나 독일 정부 모두 자유무역협정에 전향적인 자세로 돌아서고 있다. 유럽의 지정학적 역할이 커져야 한다면, 동시에 가장 중요한 수단인 자유무역협정을 손에서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 유럽연합 집행위와 독일 정부 부처 장관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마크롱 대통령 태도 바꿔
뉴질랜드와의 자유무역협정에 의구심을 보였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자신의 입장을 바꿨다. 2021년 말 마크롱은 차기 대선 가도에 불리하다는 판단 때문에 뉴질랜드와의 자유무역협정 체결식을 저지한 바 있다. 그래서 예정됐던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과 아던 총리의 자유무역협정 서명식이 급박하게 취소되기도 했다. “이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집행위의 입장이다. 현재 유럽연합에서 새로운 실용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 Der Spiegel 2022년 제13호
TTIP, Aber nachhaltig
번역 김태영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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