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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엔 없는 한국 미술의 문턱
[미술로 보는 자본주의]
[144호] 2022년 04월 01일 (금) 이승현 shl219@hanmail.net

이승현 전시기획자

   
▲ 2020년 9월28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 양혜규 작가의 <침묵의 저장고-클릭된 속심>이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한국이 선진국이라고 말하지만 세계 미술에서 한국 미술의 존재감은 여전히 미약하다. 세계가 알아주는 예술가 백남준은 한국·일본·독일·미국 등을 거친 다국적자였고, 이우환 역시 한국·일본·파리 등을 분주히 오가며 활동한 세계인이었다. 이들이 한국에 거주하면서 활동했다면 현재 같은 세계적인 위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최근 양혜규 작가가 세계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나 그 역시 독일 베를린 시민으로 산 지 십수 년째다. 한국에 거주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하기에는 여전히 문턱이 존재한다. 케이팝과 비교해 한국 내에서 세계적인 작가를 키우지 못하는 한국 미술의 문턱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남미 뒷골목의 케이팝 열기
수년 전부터 유럽이나 남미의 뒷골목에서 젊은이들이 한국 아이돌그룹의 노래에 맞춰 군무를 추는 모습을 유튜브나 텔레비전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 낯선 모습은 케이팝이 대중음악에 기여한 바를 그대로 보여준다. 케이팝은 댄스, 힙합, 발라드 등 이미 존재하는 장르를 노래한다는 점에서 특정 장르로 규정하거나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기존 대중음악과 달리 여러 멤버가 노래를 나눠 부르고 그 노래에 칼같이 맞춰 춤을 춘다. 이처럼 노래와 춤이 동등한 비중을 지니면서 이들의 음악은 청각적인 것에서 시각적인 것으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오디오로 듣기만 하는 음악이 아니라 유튜브로 함께 보는 음악이 되면서 오늘날 대중음악은 ‘시청각적’으로 소비된다. 케이팝은 음악 소비의 플랫폼 변화에 맞춰 시청각적 음악을 주도했다. 그래서 음악을 듣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중장년층은 동시대 케이팝의 인기를 이해하기 어렵다.
노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멤버들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내는 군무의 스펙터클이다. 멤버들의 외모와 의상, 매너, 그리고 생각과 행동까지 소비의 대상이다. 유튜브로 소비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소통하는 세대는 음악과 가사뿐 아니라 멤버들의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소비한다. 방탄소년단(BTS)을 포함한 한국 아이돌그룹은 그런 소비 욕구에 최적화된 멤버들로 구성돼 있다. 시대 변화는 소비자가 원하는 음악의 정의를 바꿔버렸고,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그 변화를 정확하고 빠르게 포착해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이 케이팝이 세계 무대에 우뚝 선 비결이었다. 한국은 인터넷의 보급과 디지털화에 선도적인 만큼 기술변화에 따른 음악의 소비 방식 변화가 빨리 나타났고, 자연스럽게 한국의 대형 기획사들은 소비자의 수요 변화에 일찍이 부응해야 했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은 대중가요와는 사정이 판이하다. 미술은 따로 관심을 갖고 전시장을 찾기 전에는 교과서에서 배운 과거의 작가들이나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 작가 이외의 작가와 작품을 만날 기회가 없다. 대중가요, 즉 대중문화는 감상을 위해 별도의 학습과 노력이 크게 요구되지 않지만 미술, 즉 예술은 평소 관심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고는 별도의 노력과 학습이 요구된다.
한국 미술사에서 1990년대에 한국은 서구와 동일한 소비사회에 진입하고 해외여행 자유화 등에 따라 서구와 동시대성을 확보했다. 1990년대 중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넘어서면서 미국과의 격차가 3배 이내로 좁혀졌고, 2000년대 중반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 격차가 2.5배 이내로 줄었다. 하지만 서구와의 동시대성은 동등한 수준에서 상호 교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구의 미술을 지체 없이 실시간으로 도입한다는 동시성만을 의미했다.
케이팝은 1990년대 초반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함께 한국적 팝의 독자적인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국형 매니지먼트가 더해지면서 1996년 결성된 H.O.T.는 아시아권에서 조직적인 팬덤을 일궜다. 드라마에서도 중화권 원조 한류 스타 안재욱과 ‘욘사마’로 불리는 일본 한류 스타 배용준을 배출하는 등 한국 대중문화는 한류 시대를 열었고, 이후 20여 년의 성과가 차곡차곡 쌓여 지금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케이팝은 다른 나라보다 먼저 인터넷 환경에 익숙해진 한국 소비자의 시대를 앞서가는 수요 변화와 이를 정확히 읽고 적극적으로 대응한 매니지먼트사의 전략이, 각각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최첨단 소비 수요와 이를 충족하는 최신 공급 구실을 하면서 조화롭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음악은 케이팝 소비자에게 음악이란 듣는 것일 뿐 아니라 보는 것이기도 하다는 변화를 읽고 바로 반응했지만, 미술은 대다수 관객에게 여전히 아름다워야 하는 시각적인 것이다.
서구 주류 미술계의 최신 흐름에서 미술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고 수행하는, 다분히 지적인 작업이다. 하지만 이를 실시간으로 따라가는 동시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고 좋아하는 관중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대중은 이미 역사가 된 과거의 유명 작가를 소비한다. 한국 미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미술의 지평을 확장하는 실험적인 작품의 창작을 요구한다. 이러한 수급의 질적 미스매치가 한국 미술의 현주소이고, 전문적인 감식안을 지닌 수요의 부재가 한국 미술을 가로막는 문턱이다.

미술 수요의 질적 기반 절실
근대경제학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서 시작하고, 여기서 수요와 공급은 순수하게 양적인 것으로 다뤄진다. 그런데 기업과 산업의 발전은 수요의 양적 성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열며 평균적인 가정이면 미술품을 구매할 정도의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됐다. 이제 미술품 수요의 양적 기반은 마련됐지만, 막상 한국 미술을 발전시킬 수요의 질적 기반은 마련되지 못했다. 한국 미술이 케이팝을 따라 세계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이 질적 기반을 보완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래야 그동안 우리 작가들을 외지로 내몬 문턱이 사라지고, 이미 세계 정상에 오른 한국 작가들이 고국에 와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다.

*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증권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7년을 다니다 작은 금융자문회사를 차렸다. ‘선진’ 금융을 보급한다고 했으나 그 환상이 깨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혼자 영국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와 호텔에서 2주가량 지낼 정도로 미술에 미쳐 미술사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양한 전시를 기획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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