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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업시대 개막 알린 ‘영화관 뱀 투입’
[CULTURE & BIZ] 한류 연대기- ① 시대적 배경
[143호] 2022년 03월 01일 (화) 김윤지 yzkim@koreaexim.go.kr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 1990년 3월11일 국내 영화인들이 UIP 직배 영화인 <007 리빙 데이라이트>를 상영하는 서울 씨네하우스 앞에서 ‘미국 UIP 직배 반대 범영화인총궐기대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1988년 1월 미국의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MGM 등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이 한국에 영화를 직접 배급·판매하기 위해 ‘UIP코리아’라는 배급사를 만들었다. 당시 외국영화들은 모두 국내 영화사가 수입해 극장에 배급하는 방식(간접 배급)으로 상영했다. 이 방식은 영화가 아무리 흥행에 성공해도 해외 영화사에는 수입금밖에 지급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우리나라 영화법에 정해진 국내 수입사만 외화를 수입할 수 있었다. 1986년 법 개정으로 외국 영화사들이 영화를 국내에 직접 배급하는 게 가능해졌다. 직접 배급하면 해외 영화사가 흥행 수익을 대부분 가져갈 수 있다.
당시 국내 영화시장은 외화 비중이 컸다. 직배 방식으로는 국내 영화계가 거둘 수익이 거의 없었다. 외화 수익이 한국영화 제작 자본으로 쓰이던 때였다. UIP코리아는 마이클 더글러스 주연의 흥행작 <위험한 정사>를 전국 7개 극장에서 상영한다고 밝혔다. 영화제작자, 영화감독 등 영화인들이 거센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미국 정부를 등에 업은 이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988년 9월24일 서울 시내 코리아극장, 신영극장, 씨네하우스에서 첫 직배 영화가 개봉했다.

뱀과 최루가스
일주일 뒤인 9월30일 <위험한 정사>를 상영하던 서울 명동 코리아극장 객석에서 물뱀과 꽃뱀 4마리가 발견됐다. 10월1일에는 신촌 신영극장 여자 화장실에 뱀 10마리가 나타났다. 모두 독이 없었고 시멘트 바닥에 풀린 뱀들은 힘을 못 쓰고 바로 죽었다. 하지만 충격은 컸다. 다행인지 ‘1차 뱀 소동’은 당시 언론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다. 극장주들이 영화 관객과 언론에 이 소식이 노출되는 것을 꺼렸다. 10일2일 폐회식을 앞두고 막바지로 치닫던 서울올림픽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서울올림픽 기간 중 권투 종목의 변정일 선수 판정패에 대한 미국 엔비시(NBC)의 편파 보도와 한국 비하 등으로 대중의 반미 정서가 강했기 때문이다. 영화 상영도 보름 만에 중단됐다.
UIP코리아는 이듬해 1989년 <레인맨> 등을 서울 시내 영화관들에 거는 2차 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관객 반응이 더 좋았다. 그러자 1989년 5월27일 <레인맨>을 상영하던 강남 씨네하우스 영화관 안에 뱀 10여 마리와 암모니아가스 4통이 등장했다. 8월13일에는 씨네하우스 1층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UIP코리아 직배 영화를 상영하던 다른 시내 6개 극장에서도 객석에 분말 최루가스가 뿌려져 관객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에 미국영화 상영 극장에 뱀을 풀어놓는 행위를 단속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당시 진행되던 한-미 통상실무회담에 이 사건들을 주요 통상 현안으로 올릴 계획이라며 사태 수습을 압박했다.
1989년 9월5일 경찰은 1988년 영화관 뱀 투입 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영화감독 2명을 구속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방화 사건이 일어난 씨네하우스에 경찰 2개 중대를 파견해 경비를 섰다. 정부의 강경 조치 탓에 영화인들이 “다시는 미국영화 직배 반대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도 제출해야 했다.
직배 반대 파문이 일단락되자 <레인맨> 관객 40만 명, <인디애나존스3> 관객 50만 명 등 UIP코리아 직배 영화의 흥행이 이어졌다. 눈치를 보던 다른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도 속속 한국에서 직접 배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89년 워너브라더스, 1990년 콜롬비아트라이스타, 1993년 월트디즈니 등이 정부에 등록하고 국내 영업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간접 배급을 하던 한국 영화시장이 할리우드 영화업자들에게 직접 배급권을 내주며 문을 활짝 연 순간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
한국에서 문화산업이란 개념은 1980년대 후반 영화시장이 개방되면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전에도 영화시장은 있었다. 정부가 강력한 규제로 소수 기업에만 영화를 만들고 팔도록 허락하던 때여서 정상적인 산업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나마 한국영화 제작과 상영보다 외화를 수입해 상영하는 것이 시장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따라서 외화 수입권이 중요한 이권이었다. 외화 수입과 영화 제작·수출을 등록된 영화사에만 허용하는 제도가 1984년까지 유지됐다. 일정한 요건을 갖춰야 영화사 등록이 유지되고, 등록된 영화사만 영화 제작과 수출입 권한을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63년에는 연간 15편 이상의 한국영화 제작 실적이 있어야 제작업자 등록이 유지됐다. 제작업자 등록 유지가 중요한 것은 외화 수입권 때문이었다. 한국영화 제작 편수와 수출 편수, 수상 실적 등이 외화 수입권을 확보하는 조건이었다. 외화 수입쿼터를 정부가 조절하는 상황에서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외화 수입권은 한국영화를 제작해야만 얻을 수 있었다. 영화사들은 외화 수입권을 위해 돈이 되지 않는 한국영화를 싸게 만들어 숫자만 채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제도 때문에 ‘아무나’ 영화 수입에 달려들 수 없었다. 1960~1970년대 등록된 영화사 수는 20개 안팎으로 유지됐다. 영화시장은 철저하게 ‘그들만의 리그’로 보호될 수 있었다.
1985년부터 영화산업 통제가 조금씩 사라졌다. 1970년대 후반부터 고조된 미국 영화업자들의 시장개방 압력 때문이었다. 세계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온 ‘우루과이라운드’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우루과이라운드는 1986년 9월 남미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에서 열려 1993년 12월 타결된 다자간 무역 협상이다.
기존에는 논의되지 않던 농산물이나 서비스산업에 대한 국가별 예외 규정을 없애는 게 우루과이라운드의 목적이었다. 그 전초전이 1985년 한-미 영화 협상이었다. 당시 미국 서비스산업의 꽃은 할리우드를 기반으로 한 영화산업이었다. 할리우드 사업자들을 대표하는 미국영화수출협회가 1970년대 말부터 줄곧 한국에 영화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이들은 1985년 6월 한국에 불공정한 수입 규제와 검열이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 무역대표부에 한국을 제소했다. 1984년 말 기준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가 연간 40억달러라는 점이 근거였다. 미국 정부는 통상법 제301조를 적용해 한국 영화시장 개방을 정식으로 요구했다. 1985년 10월 제1차 한-미 영화협상이 열렸다.
이 회의에서 1987년부터 외국 영화사가 국내 지사를 설치해 사업하는 것이 허용됐다. 외화 수입 편수 쿼터제가 폐지됐다. 1986년 제6차 영화법 개정으로 외국 영화사의 국내 영업 등록이 가능해졌다. 1989년부터는 수입 외화 프린트(필름) 수 제한이 단계적으로 폐지됐다. 당시에는 외화를 수입해도 프린트 수가 제한돼 여러 극장에서 상영하기 어려웠다. 그 제한이 풀린 것이다. 한국에 진출한 미국 영화사들의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판이 마련된 셈이었다. 20년 넘게 통제됐던 한국 영화시장이 이렇게 개방됐다.

   
▲ UIP코리아가 한국 영화관에 직접 배급한 흥행작 <사랑과 영혼>의 두 주인공이 도자기를 빚는 장면. UIP코리아 제공

거센 저항의 열매
1988년 첫 직배 영화 <위험한 정사>의 흥행은 미미했지만, 두 차례 뱀 소동 이후 직배 영화들의 흥행 실적이 점점 나아졌다. 1989년 영화관 세 개의 복합상영관으로 변신한 서울극장은 1990년 겨울 UIP코리아의 <사랑과 영혼>을 개봉했다. 서울 시내 중심가 극장들은 직배 영화를 걸지 않겠다던 암묵적 합의를 깬 것이었다.
<사랑과 영혼>의 서울 관객 수는 150만 명이었다. 1997년 <타이타닉> 상영 전까지 서울 관객 기준 역대 최고치였다. 예상대로 대작 외화들은 할리우드 직배사에 독점됐다. 국내 영화사들은 할리우드 영화 수입이 어려워지자 홍콩이나 유럽 영화를 수입했다. 당시 <지존무상> <천장지구> <아비정전> <경천12시> 같은 홍콩영화가 극장가에 많이 걸렸던 이유다.
시장은 더 기울어졌다. 영화관의 외화 점유율이 급속히 높아졌다. 1980년대 초 40%였던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은 1993년 15.9%까지 떨어졌다. 한국영화 제작 편수도 1990년 전후 100~120편에서 1998년 43편으로 줄었다. 이런 현상 때문에 ‘스크린쿼터제’가 이후 우리나라 영화산업 정책의 중요 쟁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가 거대한 하나의 시장으로 변화하려는 그 치열했던 순간, 당황한 한국 영화인들은 영화관에 뱀을 풀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풀린 뱀들이 맥없이 죽듯이,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점은 영화인들도, 지켜보는 우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강한 저항의 움직임은 정부와 업계가 변화해야 함을 모두 느낄 수 있게 도와줬다. 갑자기 열린 시장은 기존 ‘업자’들에겐 위기였지만, 새로운 산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겐 기회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치열하게 시장개방과 맞서 싸웠던 영화인들의 경험도 사라지지 않고 축적됐다. 이후 우리나라 문화산업 정책이 수립될 때 오랜 기간 투쟁했던 영화인들은 대등한 동반자로서 영향력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한류의 발전, 그리고 영화·드라마 산업의 도약과 결실을 이야기한다면, 시장을 지켜내려던 당시의 경험이 그 밑바탕이 됐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 김윤지 연구위원은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한 경제주간지 <Dot21> <Economy21>에서 산업부·경제부 기자를 했고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대기업 종속성과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정보기술(IT) 산업, 문화콘텐츠 산업, 중소기업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연재를 통해 문화산업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접근해갈 계획이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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