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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침표
[박중언의 노후경제학]
[143호] 2022년 03월 01일 (화) 박중언 parkje@hani.co.kr
   
▲ 2007년 아름다운재단을 방문한 이순희 할머니. 아름다운재단 누리집

‘나눔으로 기억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침표’.
유니세프가 유산 기부 촉구를 위해 내건 홍보 문구다. 유산 기부란 말 그대로 세상을 떠난 뒤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의미 있게 사용하도록 기부하는 것이다. 이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기부를 좀 아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도 아직 인정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기부 소식이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들린다. 평생 모은 재산을 장학금으로 내놓은 ‘김밥 할머니’가 대표적이다. 오랜 기간 정체를 밝히지 않고 주민센터에 성금을 놓고 사라지는 기부천사도 있고, 돈이 아닌 재능을 나누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인 다수는 기부나 나눔에 그다지 마음이 열린 편이 아니다. 중견기업 P부장도 그렇다. 영국 자선지원재단(CAF)이 2021년 6월 발표한 세계기부지수(World Giving Index)를 보면, 한국은 조사 대상 114개국 중 끝에서 다섯 번째(110위)로 나타났다.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유럽 선진국 프랑스(106위)와 이탈리아(111위) 등도 순위가 크게 떨어졌고, 늘 하위권인 이웃 일본이 꼴찌라는 게 그나마 위안을 준다. 이 순위는 2020년 조사 대상 국민 12만 명에게 △낯선 사람 돕기(자선) △기부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는지 물어 매긴 것이다.
줄어드는 일자리와 치솟는 집값, 오르는 물가로 일상생활이 팍팍한 요즘 평범한 사람이 기부에 마음을 쓰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나이 든 사람들에겐 늘어나는 평균수명에 비례해 노후 자금 불안이 커진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벌어둔 돈을 꼭 쥐고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집은 물론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라도 자녀에게 살뜰하게 물려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앞서간 사람들
그러나 성인 자녀들의 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고, ‘내가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라면 다르게 바라볼 수도 있다. 자신의 삶이 녹아 있는 유산을 좀더 의미 있게 쓰는 것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지금보다 유산 기부에 대한 인식이 훨씬 부족하던 시절에도 이런 마음을 실천에 옮긴 사례가 드물지 않다.
“이순희 할머니는 2007년 유언 공증을 통해 유가족에게 남기는 일부를 제외하고, 아름다운재단을 포함한 5개 기관에 당신이 평생 일구신 재산의 대부분을 사후에 유산으로 남기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고는 2020년 3월 90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며 아름다운재단에 남기신 유산 기부금은 할머니가 사랑하는 또 다른 이름을 딴 ‘베로니카불꽃기금’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재단 누리집에서 소개한 유산 기부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아름다운재단은 유산을 기부한 이들의 뜻에 맞게 유산 기금을 만들었다. 2003년 세상을 떠난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자의 유산 기부는 ‘어려운 이웃을 살피라’는 그의 유언을 유족이 받든 사례다. 50억원에 이르는 주식과 배당금 등 유산의 일부로 조성된 ‘아름다운세상기금’은 한부모 여성이 운영하는 ‘희망가게’ 436곳을 설립하는 종잣돈이 됐다.
2025년으로 성큼 다가온 고령사회에 대응하기 위해 유산 기부 문화를 확산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2021년 3월 시민단체 웰다잉문화운동은 자선단체협의회 관계자 등이 참여한 ‘가족 중심 상속과 기부 문화’ 세미나를 열었다. 2019년 ‘유산 기부 활성화를 위한 입법 과제’ 세미나에 이은 모색이었다. 이런 논의를 통해 제도와 인식 못지않게 유언을 남기는 관행의 차이가 다른 선진사회에 비해 한국에서 유산 기부가 적은 주요 이유라는 데 의견이 모였다. 유산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유언장을 작성해놓지 않았으면 기부가 실행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5선 국회의원 출신의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는 “유언장을 쓰는 사람이 미국에서는 56%에 이르지만 우리나라는 0.5%도 되지 않는다”며 “내 삶의 주인으로서 건강, 재산, 사후 절차 등 삶의 마무리에 관한 일들을 내가 결정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웰다잉 운동”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주변에서 누구나 유언장을 쓴다면 유언장 작성이 자연스럽지만,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마무리의 출발점
유언장 쓰기는 내 삶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재수 없이”라며 꺼릴 것이 아니다. 유언장을 쓰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회복 가능성이 없는 말기 치료(연명의료), 장례 방식과 준비, 유산 배분, 장기기증, 의식이 없을 때를 대비한 성년후견인 지정 등 남은 삶에서 마주할 문제들에 자신의 뜻을 가다듬고 분명히 밝힐 수 있다. 또 언제든 내용을 바꿀 수 있어 작성 자체에 비상한 각오가 필요한 게 아니다. 나의 결정이 담긴 유언장 없이 불시에 세상을 떠나거나 의식을 놓아버리면 유족의 고민과 유산 다툼 여지가 커질 수밖에 없다.
현행법에서 인정하는 유언 방식은 △직접 손으로 쓴 자필증서 △비밀로 작성한 비밀증서 △공증인 앞에서 진술한 공정증서 △다른 사람이 받아 적은 구수증서 △녹음유언 다섯 가지다. 공증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비용이 들고 증인 2명이 필요하다. 손으로 쓰는 게 가장 간편하다. 고쳐 쓸 때 번거롭지도 않다.
자필 유언장에는 정해진 양식이 없지만 빠뜨리지 않아야 할 항목이 몇 가지 있다. 유언장 전문과 작성 연월일, 주소(작성 장소가 아니라 거주지), 성명을 직접 쓰고 도장을 찍어야 한다. 유언장 쓰는 연습을 컴퓨터로 하더라도 실제 유언장은 종이로 작성해야 한다. 컴퓨터 문서파일은 본인 필체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인정하지 않는다. 도장은 인감이 아니어도 무방하지만 사인은 허용되지 않는다.
생의 마지막 발언인 유언장의 내용은 자유롭게 적으면 된다. 소회, 감사, 사죄, 용서, 당부 등을 담을 수 있다. 유산 처리는 중요한 부분이다. 5~10%라도 가족 이외의 사람들, 특히 동시대를 힘겹게 살아온 다른 고령자의 삶에 보탬이 되도록 쓴다면 삶의 의미가 더 깊어질 것이다. 절차·방법 등 세부 사항은 자선단체협의회 유산기부센터 누리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과 장기기증 희망등록증을 지갑에 넣어 다니는 P부장은 가끔씩 컴퓨터로 유언장 작성 연습을 한다.

* 한국 베이비붐세대의 막내(1963년생)인 박중언은 노년학(Gerontology)과 함께 고령사회 시스템과 서비스 전략을 연구 중이다. 나이의 구속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편안하게 늙어가기를 지향한다. 블로그 ‘에이지프리’(AgeFree)를 운영했고, 시니어사업에도 몸담았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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