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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차이나드림’
[Trend]
[11호] 2011년 03월 01일 (화) 프랑크 지렌 Frank Sieren economyinsight@hani.co.kr

프랑크 지렌 Frank Sieren <디 차이트> 베이징 특파원

   
REUTERS

롭 매클리어리의 안경은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다. 간간이 내쉬는 숨결을 보고서야 그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84살의 롭은 나름 오래 산 셈이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마호닝밸리에서 제강소 노동자로 일했던 롭의 한평생과 더불어 전세계를 풍미했던 미국의 시대도 서서히 저물고 있다.
롭과 미국에는 공통점이 꽤 있다. 둘 다 열심히 일했고, 돈도 잘 벌었다. 자부심이 강했고, 주위의 인정을 받았으며, 때로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상황은 일순간에 달라졌다.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다 출혈을 일으켰다. 결국 롭과 미국은 현상 유지를 위해 기존의 체력을 갉아먹어야 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대선 유세에서 ‘예,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Yes we can)를 슬로건으로 삼았을 때, 롭은 미국이 과거의 영광을 절대로 재현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수세대에 걸쳐 당연하게 여겨졌던 미국의 새로운 출발에 대한 믿음이 지금도 과연 유효할까? 말할 기력이 남아 있던 무렵의 롭은 “예,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Yes, we can- what?)이라고 자문했다.
몇 주 뒤 롭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오하이오주 한 양로원의 텅 빈 침대에 홀로 멍하니 앉아 있는 롭의 손자 크리스천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크리스천이 고향 워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할아버지 롭의 장례식이 끝난 뒤였다. 37살의 동안에 어울리지 않는 갈색 턱수염을 기른 크리스천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일자리 걱정 없이 두꺼운 스테이크를 마음껏 먹고 대형 자가용을 몰 여유가 있었던 옛 시절과 모스키토 호수에서 낚시하던 추억을 할아버지와 함께 다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크리스천은 미국이 세상의 중심처럼 보였던 그 시절을 추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미국의 호시절도 함께 가지고 가버렸다.

   
중국 베이징 시내 중심가의 야경. 초고속 경제성장을 상징하듯 화려하기만 하다(왼쪽). 미국 오하이오주 영타운 지역의 퇴락한 거리를 한 남자가 지나가고 있다. 이곳은 한때 세계 최대 철강 생산 지역 가운데 한 곳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숨을 거둔 미국의 전성기

크리스천은 장례식 시간에 도저히 맞춰 올 수 없었다. 그의 고향은 미국에서 가장 번창했던 산업 지역인 오하이오주의 마호닝밸리에 위치한 소도시 워런이다. 미국의 워런과 크리스천이 현재 살고 있는 중국의 시차만도 무려 13시간이다.
100여 년 전 미국으로 이주해온 폴란드 이민자 가문인 켄더스키스(Kenderskis)의 후손인 크리스천은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다시 서쪽으로 넘어가 아시아의 중국에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베이징의 미디어컨설팅업체의 부사장인 그는 미국과 중국의 방송사 임원들과 협상하며 영화 상영권 거래 업무를 맡고 있다. 그는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회사는 운전사가 딸린 차량을 지원해줬다. 그는 자신의 정확한 연봉을 밝히기 꺼렸다. 기본 급여 외에 연간 보너스와 회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만 설명했다. “이 회사가 매각된다면 난 더 이상 생활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베이징에서 최고 주거단지로 손꼽히는 그랜드 MOMA의 30층짜리 고급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높은 흰색 미닫이문과 짙은 갈색의 목재 바닥이 깔린 아파트는 가죽 냄새가 난다. 소파에는 회색 고양이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있다. 바닥까지 내려온 거대한 창문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는 창밖으로 베이징 순환도로들을 연결하는 6차선 고속도로의 야경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오하이오주 워런의 주요 도로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친구들을 만났다면, 이제는 베이징의 쇼핑 지역인 싼리툰의 세련된 고급 바 ‘메시’(Mesh)에서 친구들을 만난다.
업무차 자주 방문하는 상하이에서 저녁이면 황푸강변에 있는 ‘뷰’(Vue)라는 바를 즐겨 간다. 이 바에서는 번쩍거리는 상업지구 푸동 지역과 강변 산책로를 따라 늘어진 호화스러운 파노라마가 한눈에 펼쳐진다. 둥그런 테라스의 가운데에 월풀이 있다. 메뉴판 위에 칵테일 잔이 놓였고, 월풀 아래에는 남성용 하의 수영복과 비키니가 있다.
그는 미래 세계의 중심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바를 좋아한다. 이곳에서만큼은 전세계에서 오하이오주의 워런이 가장 멀게 느껴진다. 크리스천의 조부모 세대가 한평생 누렸고, 부모 세대가 잠깐이나마 경험했던 ‘아메리칸드림’을 그는 바로 중국에서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부를 앗아간 중국에서 그 손자가 일하면서 번 돈을 고국에 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쳐주고 있는 현실, 이만한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1978년 코퍼웰드 제강소가 저임금의 노동력을 찾아 멕시코로 이전하면서 롭은 그해 52살의 나이로 조기 퇴직했다. 당시 워런 지역에서 이렇게 사라진 일자리만 무려 7만5천 개에 달했다. 이후 몇 년간 일본과 한국에서 수입된 저렴한 철강 물품이 미국 시장을 덮쳤다. 중국이 철강시장에 뛰어들자 코퍼웰드 제강소는 직격탄를 맞았다. 2001년 제강소는 파산했고, 롭은 회사 지분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롭은 제강소 파산 직전에 마지막으로 500달러와 실업급여 1천달러를 받았다. 이 수입으로는 롭은 자신의 집을 유지할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의 가족은 베트남 참전용사들을 위한 펀드에 가입했고, 덕분에 롭은 소박한 양로원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롭의 장례식 다음날 크리스천은 의붓아버지 윌과 함께 밤늦게까지 주방의 식탁에 앉아 담소를 나눴다.
크리스천이 9살 되던 해 가족은 크게 늘어났다. 크리스천의 어머니와 재혼한 남편 윌이 세 딸을 데려왔다. 그래서 가족은 윌 부부, 크리스천과 형 마이클, 그리고 의붓자매 메리·르네·브레나로 총 7명이 됐다. 두 가족은 점차 한 가족이 되었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가족 중 누군가가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떠날 것이며, 미국에 남은 가족은 중국에서 송금해주는 돈에 의지하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크리스천의 가족 모두 워런이야말로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굳게 믿었다.
윌은 1970년대 초반 대호황을 누렸던 워런에 대해 들려주었다. “1972년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일자리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미국인에게 가장 매력적인 직장이었다.” 윌은 당시 제너럴모터스의 자회사 중 하나인 패커드일렉트릭에 취직했다. 패커드일렉트릭에서 그는 조명시설에 사용되는 케이블 하니스 생산 업무를 하면서 시간당 28달러라는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패커드일렉트릭의 워런 노스리버로드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만 해도 무려 1만3천 명이었다.

“중국? 오토바이 타고 북극 가라고?”
윌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상점 주인이나 수공업자 배역에 꼭 들어맞을 듯한 전형적인 백인 미국인의 외모다. 웃음소리는 잭 니컬슨을 연상시킨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자동차 공장들이 멕시코로 이전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래도 우리의 수입은 계속 좋았다.” 하지만 1990년대 초 중국의 거대한 자동차 시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새 공장을 구축하기 위해 중국에 갈 의향이 있느냐는 상사의 질문에 윌은 웃었다.
   
크리스천은 베이징에서 미디어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윌은 마치 소형 오토바이를 타고 북극에 갈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 같았다. 직장 동료들은 패커드일렉트릭의 중국 진출이 옳은 결정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중국인은 미국인의 보조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윌은 직장 동료들과 휴식을 취할 때면 “임금이 저렴한 중국인들 덕택에 우리가 노후연금을 보장받는다”고 수다를 떨곤 했다. 1992년 6월 어느 따스한 저녁, 윌은 중국 공장으로 전근 가는 동료의 작별 파티에 참석했다. 윌은 “워런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컨트리 소년이 머나먼 중국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크리스천은 경제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부전공은 중국어였다. “무슨 거창한 계획이 있어서 중국어를 부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제대로 된 커리어를 쌓는 것은 물론이고 장기간 거주하는 것은 누구도 상상 못했다.” 크리스천은 1994년 가족 중에서 첫 대졸자가 되었다. 하지만 졸업장을 취득한 기쁨도 잠시, 그는 번번이 취업에 실패했다. 그즈음 미국 경제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막막했던 그는 베이징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베이징에 도착한 크리스천은 경악했다. 공기에서 석탄 찌꺼기 냄새가 났고, 대학 기숙사의 천장에는 커버가 없는 전구알만 달려 있었다. 뜨거운 물은 하루에 몇 시간만 나왔다. 그는 대학에서 불가리아 출신 조리(Zory)와 독일 출신 폴커(Volker)를 사귀었다. 하지만 둘의 어색한 영어 발음 때문에 이름을 ‘소리’(Sorry)와 ‘퍼커’(Fucker)로 잘못 알아들어 며칠간 그 기이한 의미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곧 이국만리에서 새로운 것을 접하는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중국 초기 시절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크리스천이 미디어 애널리스트로 입사한 다국적 컨설팅회사는 톈안먼 광장과 이어지는 베이징의 동서축에 위치한 중국 최초의 고층건물에 있었다. 그의 업무량은 엄청났다. 이때 중국은 호황기에 접어들었다. “곳곳에서 고층건물이 솟아나고 새로운 도로가 지어졌으며, 레스토랑은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 온통 들뜬 분위기였다.”
워런의 집 주방에서 크리스천의 어머니 테레사가 식탁에 앉았다. 테레사는 맥주를 가져왔다. 평소 취침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쉽사리 잠이 들 수 없었다. 아들이 머나먼 이국으로 떠난 뒤 너무나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가만히 앉아서 연락만 기다릴 수 없었던 부부는 중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1998년 부부는 난생처음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크리스천은 영국 정부에 중국 상법에 관한 컨설팅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그가 토니 블레어 총리를 비롯한 영국 정부 대표단과 회의실에 마주 앉아 중국 방문의 법적 측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동안, 윌과 테레사는 베이징 시내 관광을 다녔다.
크리스천은 부모님과 함께 청조의 4대 황제 강희제의 아들을 위해 17세기에 지어진 화려한 궁전이었던 베이징의 최고급 클럽에서 영화 초연을 관람했다. 그리고 베이징의 독일식 호프 ‘파울라너 브루하우스’에서 윌은 워런의 옛날 직장 동료들을 만나 흰 소시지를 먹었다. 직장 동료들은 중국에서 하는 일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윌은 “동료들이 마치 중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했다”고 전했다. 대체 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까? 윌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는 공항에서 베이징 도심으로 오는 길에 도요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를 수없이 보았다. 미국 자동차들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에 미국 자동차를 판매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위안했다. 그러다가도 대다수 중국인들이 미국인보다 규율을 더 준수하며 자족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미국이 중국에 밀리는 현실은 불가피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윌 부부는 중국에서 승승장구하는 아들에 대한 염려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크리스천의 중국에 대한 열정은 점차 식어갔다. 조용히 하루를 보내면서 호수에서 낚시하는 여유가 못내 아쉬워졌다. 베이징에서는 조용한 날이 없었고, 낚시를 할 수 있는 깨끗한 호수도 없었다. 그는 결국 1999년 중국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베이징의 직장만큼이나 괜찮은 곳을 미국에서 구할 수 있을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연봉 수준에 근접한 액수를 주겠다는 회사는 미국에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구직 기간이 늘어나면서 통장 잔고도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어쩔 수 없이 워런의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고, 1시간에 7달러를 받는 정원 보조사로 취직했다.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8시간 동안 잔디를 깎고 울타리를 반듯하게 정리하는 일을 했다. 고향의 신선한 공기가 좋았고, 다음날 아침까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라는 전화를 전날 밤 10시에 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슬슬 미국에서의 일상이 지루해지던 어느 날, 그는 예기치 않게 중국에서 다시 일할 생각이 없느냐는 전화를 받는다.

중국 여성과 사랑에 빠지다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 크리스천은 미디어 분야의 선도적인 기업 컨설팅 업체인 CMM-I에서 일하게 됐다. CMM-I은 미국 TV 채널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중국 시장 진입을 진두지휘했고, 중국에 <세서미 스트리트> 방송 프로그램을 도입한 기업이다. 새로운 직장은 그의 정신과 에너지를 온통 집어삼켰다.  
크리스천은 미국에 있는 친구들과 가족으로부터 ‘베이징에 가까운 친구들이 있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받았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화가 치밀어올랐다. “베이징에 친구들이 없을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베이징이라고 뉴욕이나 런던과 다를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베이징 생활에 다시 적응해갔다. 워너사의 중국 지사에서 영화 판매를 담당하는 중국인 캐롤을 만나게 되었다. 캐롤은 독립심이 강하고 야심만만한 여성이었다. 크리스천과 캐롤은 사랑에 빠졌다.
당시 워런에서는 일말의 기대감마저 산산이 부서졌다. 미국 자동차 제조업체의 부품 하청업체들이 하나둘 중국에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1999년 제너럴모터스는 패커드일렉트릭에서 결국 손을 뗀다. 윌의 회사는 자동차부품 하청업체 델파이에 매각됐다. 2002년 처음으로 자가용 모터 전량이 중국에서 수입되자 윌은 비로소 세상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멕시코인들은 여기서 시간당 50센트를 받았고, 추가로 식사비와 가족 전체의 의료비를 지원받았다. 중국인들은 시간당 20센트만 받고 식사비도 별도로 받지 않았다.” 얼마 뒤 윌은 미국인들이 중국 모터가 미국 모터보다 품질이 안 좋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품질이 떨어지는데도 미국산 자가용에 중국산 모터가 계속 사용됐다. 워런을 방문하는 중국 기업방문단은 계속 늘어났다. “그래도 우리는 끄떡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2005년 10월 미국의 최대 자동차부품 하청업체 중 하나인 델파이가 파산을 신청했다. 윌은 난생처음 인생이 자신의 통제 영역에서 벗어났음을 실감했다. “엄청난 풍랑에 휩쓸려 떠내려간 조난 화물이 돼버린 듯했다.”
2006년 12월31일 윌은 실직자가 됐다. 델파이 공장은 중국으로 이전했다. 당시 55살의 윌은 패커드일렉트릭에 자신의 청춘을 포함해 35년을 바쳤다. 윌은 퇴직금 3만달러와 적게나마 노후연금을 받았다. 퇴직금 3만달러는 윌이 지금까지 6개월간 벌었던 금액에 불과했다. 직원 9천 명 중에서 현재 일하고 있는 사람은 겨우 1천 명이다.
윌은 냉장고 수리법을 배웠고, 낡은 집을 리모델링하는 일을 했다. 실직 상태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그는 지금 학교의 교실과 복도를 청소하면서 오후 3시부터 밤 1시까지 수영장을 청소하는 일도 하고 있다. 윌에게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유대교 교구의 헬스클럽 같은 곳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는 파트타임직을 갖는 것이다. 제너럴모터스가 끝내 회생하지 못하면 윌은 노후연금 전액을 잃을 수도 있다. 그나마 테레사가 아직 직장에 다니고 있는 것이 작은 위안이었다. 테레사는 지역사회의 붕괴를 막으려 중소기업 대출 업무를 담당하는 관공서에서 수년 전부터 일하고 있다. 테레사는 “미국인들이 자신의 직장이 제너럴모터스에 달려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 기아와 도요타의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이웃들이 도심의 소규모 상점에서 미국 제품을 사는 대신 슈퍼마켓에서 가장 저렴한 중국산 제품을 사는 이유를 자문해보곤 한다. “미국인들은 더 이상 애국심이 없다. 지금 같은 경제위기 때에는 더 그렇다.” 돈이 궁핍해지는 순간 가격은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테레사는 명문대학을 나왔지만 연봉이 겨우 2만달러에 불과한 젊은 사람들도 있다고 말한다. “20대 초반의 청년들에게 미국의 경제 사정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니 미국을 떠나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 온 그가 오하이오주 워런시의 텅 빈 슈퍼마켓에 홀로 서 있다.
크리스천이 부모님의 이야기를 주방 식탁에서 들으면서 밤은 깊어갔다. 그는 중국처럼 번영하는 국가들에 대해 미국인들이 분노하고 있는지 물었다. 테레사가 대답한다. “중국인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좌시하고 있으면서 모든 탓을 중국인에게 돌리는 정치인에게 화가 난 것이다. 이제 성장의 기지개를 펴는 중국인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미국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돈도 없으면서 계속 소비만 해대고 있다. 끊임없이 물건을 사대고 있다. 경제위기가 완전히 지나가지도 않았는데, 미국인들의 소비 행렬은 벌써 시작됐다.”
윌은 “경제적으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형제자매들과 호시절을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하게 될 자녀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크리스천은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중국의 직장 동료들이 퇴근하기 전에 통화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통화가 끝난 뒤 집을 나섰다. 오늘 형제자매들을 찾아볼 참이다. 윌의 제너럴모터스 픽업트럭을 몰고 녹음이 우거진 도로를 달렸다. 워런시 형성기에 지어진 우아한 주택들이 대형 광장과 교회 주변에 둘러서 있다. 초기에는 철강 및 철도 소유주들이, 나중에는 자동차업체 임원들이 이곳의 고급 주택에 살았다.

오하이오주의 문 닫은 상점들
오늘 아침 워런시는 인적이 끊긴 듯 조용하다. 그동안 문을 닫은 상점과 레스토랑은 셀 수 없이 많다. 차를 몰고 가는 지역은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곳이다. 사람이 살지 않아 빈집이 많았으며, 거리 전체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듯 보기 흉한 상태였다. 다녔던 학교 터는 허물어지고 휑하니 초원만 남아 있다. 주민들이 대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학교 건물은 철거됐다.
크리스천은 철강 지역에서 한때 두 번째로 컸던 영타운(Youngtown)으로 차를 몰았다. 미국의 로큰롤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영타운의 철강 노동자를 위한 찬가를 헌사하기도 했다. 1960년만 하더라도 영타운의 인구는 16만6천 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7만 명에 불과하다.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고층 건물의 창문 앞면은 현재 합판으로 폐쇄됐다. 시청은 그 합판에 과거 영타운의 흑백사진을 붙여놓았다.
지난해 초 영타운에서 350개 신규 일자리 창출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참석했다. 오바마는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여전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미래가 불안하게 보인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메리칸드림’을 상기시켰다. “미합중국의 목표는 2위가 아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우리는 경쟁에서 이길 것이다.” 하지만 박수 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크리스천은 피자 두 판을 산 뒤 다시 차를 몰아 목재 주택 앞에 정차했다. 거실은 주방과 사무실로도 사용되고 있다. 꽃무늬 소파에는 남자가 앉아 있고, 여자는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크리스천의 형 마이클이고, 여자는 마이클의 부인 리타였다. 거실이 좁아 컴퓨터 책상과 소파 등받이는 서로 부딪힐 만큼 붙어 있었다.
이전에 크리스천은 형 마이클을 염려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머리를 빡빡 민 마이클은 만능 스포츠맨이다. 10년 가까이 직업군인으로 일했다. 당뇨병에 걸려 군에서 강제전역당한 뒤 2008년 웨스턴테크놀로지에 입사해 기차 브레이크 제작일을 했다. 초기만 해도 소규모 공장에서 60명이 일했는데, 지금은 12명 남짓만이 남아 있다. 2009년 기차 브레이크 제작이 인도와 중국으로 이전되면서 마이클도 공장을 떠나야 했다.
마이클은 “올해 마흔인데 모아둔 돈은 은행 예금 500달러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유튜브에서 중국인들의 작업환경을 본 적이 있었다. “중국 기업들은 노동자의 작업환경 개선에 눈곱만치의 관심도 없다.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 일을 하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 중국인이 수백 명이나 된다. 난 시간당 50센트의 저임금을 받고 일할 생각은 전혀 없다.”
군에서 수백만달러에 달하는 설비를 관리했던 마이클이 이제는 맥도널드의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있다. 맥도널드에서 일하려 줄 서서 기다리는 지원자만 수백 명에 달하는 것이 현재 미국의 현실이다.
마이클은 때론 중국에 분노를 느낄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하필 동생이 거기서 일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털어놓는다. “동생이 내가 할 일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형의 말에 크리스천은 침묵했다. 크리스천은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말을 가족 앞에서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하이오주의 친척들에게 자신이 지속적으로 돈을 송금해주고 그들을 먹여살리고 있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는 여동생에게 집을 한 채 사주고 카드빚도 갚아주었다. 경제위기로 크리스천의 가족은 더욱 가까워졌고, 서로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었다.
크리스천도 자신이 가족의 재정적 지원자가 된 것에 어리둥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친척들이 운이 없었다는 것을 상기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이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는다. 친구와 친척이 그가 중국에서 성공한 걸 질투하는지를 물어보면 대답은 한결같다. “친구와 친척 중 누구도 내 위치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 사이 르네와 메리가 도착했다. 싱글맘 르네의 7살과 5살 된 아이 둘은 주위를 돌며 장난을 치고 있다. 좁은 거실이 아이들 노는 소리로 금세 시끄러워진다. 14년간 르네는 델파이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했다. 그러다 그녀도 해고됐다. 현재 약사 보조원으로 일하는 르네는 델파이 시절 연봉의 딱 절반을 벌고 있다. 크리스천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빚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이다.
메리는 단기계약직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다. 32살의 메리는 “한평생 힘들게 일했던 엄마와 윌은 이제 노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자신의 노후연금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노후연금은 구경도 못할 것이고, 쓰러져 죽을 때까지 일할 거다.” 크리스천은 부모님의 집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집 한 채를 메리에게 사주었다. 메리에게 크리스천은 구세주다.

   
 
언젠가는 미국으로 돌아갈 것
막내 여동생 브레나는 시애틀에 살고 있다. 그녀는 학교 선생님이며, 남편은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일하고 있다. 수년 전 MS는 연구개발센터 일부를 중국으로 이전했다. 2009년 MS는 설립 뒤 처음으로 직원 5천 명을 해고했다. 다행히 브레나의 남편은 정리해고의 파고를 비켜갈 수 있었다.
그로부터 수개월 뒤, 베이징 싼리툰의 새로운 버거 레스토랑 ‘블루 프로그’(Blue Frog)에 있는 크리스천은 기분이 좋지 않다. 이발사가 실수로 자신의 턱수염을 밀어버린 것이다. 깜박 주의를 놓았던 크리스천이 ‘머리 정리’(ti huzi)와 ‘수염을 깎다’(xiu huzi)라는 단어를 헷갈려버렸던 것이다.
중국인 여자친구 캐롤은 크리스천에게 결별을 선언했다. 크리스천은 가족을 원했고, 캐롤에게는 커리어가 최우선 순위였다. 캐롤은 베이징 직장을 정리하고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크리스천은 새로운 인연을 찾고 있다. 외국인 남성을 ‘사회적 신분 상승의 발판’쯤으로 여기는 여성에게는 관심 없다. 독립심이 강하면서도 가족을 원하는 여성을 원한다. 중국의 미국인 친구들은 크리스천이 중국 여성을 사귀었던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크리스천은 고집스럽게 말한다. “미국 남성과 중국 여성 간의 차이는 미국 남성과 미국 여성 간의 차이만큼 클 수 있다.” 자신과 캐롤의 결별 원인은 “둘이 서로 다른 삶의 단계에 있었던 것”이라고 정리했다. 29살의 캐롤은 지금 결혼해서 자녀까지 낳는다면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게 된다고 생각했다. 캐롤보다 8살 위인 크리스천은 “커리어는 경제 호황에 어울리고, 가족은 위기의 시대에 어울린다”는 명언을 내놓았다.
크리스천은 향수에 시달리는 빈도가 점차 늘어갔다. 지금 미국을 힘들게 하는 경쟁국가인 중국의 일원이 된 자신이 과연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는지 자문해보곤 한다. 자신이 오하이오주에 있는 가족의 부를 앗아간 사람 중 한 명은 아닌지 묻곤 한다.
크리스천은 중국인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는다. 그는 언젠가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 Die Zeit·번역 김태영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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