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시각
     
무엇이 브라질을 ‘브라질’로 만드는가
[세계는 지금] 브라질 상파울루
[140호] 2021년 12월 01일 (수) 추주은 jechoo@kotra.or.kr

추주은 KOTRA 상파울루무역관 과장

   
▲ 2021년 11월17일 브라질 상파울루 증권거래소 앞에서 황소상을 배경으로 관광객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가 제일 스트레스 받을 때는 언제일까. 미리 혼날 줄 알고 혼나는 것보다, 모르고 혼나는 게 더 치명적이다. 이렇듯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좌절한다. 브라질에 진출하려는 기업들도 이 국가의 불확실성을 가장 높은 진입장벽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브라질 사람들도 브라질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브라질 인류학자 호베르투 다마타의 책 <브라질 사람들>의 원제는 ‘무엇이 브라질을 브라질로 만드는가’이다. 이 제목은 브라질이 ‘우리 예상과는 다른’, 그러나 동시에 ‘복잡미묘한 항상성’을 가진 나라임을 보여준다. 불확실하고 모호하지만, 그런데도 브라질을 ‘브라질’로 정의하는 특징은 무엇일까?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의 허상
흔히 브라질을 두고 미국과 견줘 ‘모든 인종이 어울려 사는 인종차별 없는 나라’라고 한다. 특히 최근 경찰 과잉진압 등으로 갈등이 고조되는 미국의 인종갈등에 비하면 브라질은 큰 뉴스 없이 평화롭다. 서로서로 잘 지낸다.
그런데 브라질 생활 초기부터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젊은 백인 부부의 뒤를 유아차를 밀며 따라가는, 위아래 흰옷 차림의 유색인 유모다. 리우데자네이루 부촌에서 한두 번 지나쳤을 땐 지역 특성인 줄 알았는데, 브라질 도시 중산층 이상의 동네에만 가도 흰 유니폼을 입고 유아차를 미는 갈색 피부의 유모들을 볼 수 있었다.
이후 이런 모습이 더 눈에 띄었다. 중산층 지역 식당의 손님과 웨이터, 슈퍼마켓 손님과 계산원, 헤어살롱 손님과 점원. 모두 어느 쪽이 백인 자리이고 어느 쪽이 흑인과 혼혈인 자리인지 확실하다.
그제야 명확해졌다. 브라질은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 인종 간 갈등이 없는 나라다. 호베르투 다마타는 자신의 책에서 “브라질 사람들은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않는다”며 너무 명백하게 계급이 나뉘어 오히려 갈등이 없는, 혹은 없어 보이는 브라질 사회의 역설적 특징을 설명했다.
평등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은 ‘만민이 법 앞에 평등’해야 하므로 모든 인종을 동일 범주에 놓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과 결과가 ‘인종차별로 인한 갈등’ ‘사회문제의 공론화’ 등의 형태로 표출된다. 이에 비해 브라질은 각 인종의 암묵적인 사회계급을 해당 구성원이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브라질의 지배계급은 브라질을 두고 ‘인종민주주의(Racial Democracy)를 이룩한 국가’라고 자부했다. ‘브라질에는 인종차별이 없다’는, 더 나아가서는 ‘인종 간 사회·경제 계급 차이는 단순히 개인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치부해버리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 믿음은 현대 브라질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계급장벽으로 깊게 뿌리박혀 있다.
브라질의 구조적인 인종차별은 궁극적으로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린다. 브라질에서 생활하면서 사람들의 수동적인 태도 때문에 답답한 경우가 많았다. 고객으로 서비스를 구매하는 순간조차 서비스 제공자인 상대보다 더 안달복달하며 원하는 바를 어필해야 했다. 하지만 사회구성원이 제각기 정해진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들에게 적극성까지 요구하는 건 무리한 부탁이 아닐까.
브라질에 대한 또 하나의 착각은 브라질이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것에 개방적인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브라질은 보수적인 나라다.
현지 바이어들을 만나보면 처음에는 ‘유행에 민감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지만, 나중에는 ‘새로운 시도를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브라질에 들어오는 제품을 보면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 시장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입증된 것들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글로벌 트렌드에 한 사이클씩 뒤처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를 단순히 수입업자의 조바심으로 보긴 어렵다. 브라질 사람들과 지내다보면 ‘먹는 것만 먹고, 가는 곳만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익숙함의 경계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이면 무엇이든 먹어보고, 가보고, 써보는 호기심 많은 한국인과는 참 다르다.
여행문화를 예로 들어보자. 브라질 사람들이 첫 번째로 꼽는 국외 여행지는 어디일까? 의외로 디즈니랜드가 있는 미국 올랜도다. 2018년 브라질 국민 중 국외 여행자 수는 총 150만 명이고, 이 가운데 60%에 해당하는 89만 명이 올랜도를 방문할 정도다. ‘모두가 가는’ 인기 여행지에만 사람이 몰린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보수적 특성은 브라질 경제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브라질의 국내총생산 대비 교역의존도(trade-to-GDP ration)는 23~30%로 세계에서 최하위권인 미국과 맞먹는다. 총 GDP의 80% 이상을 무역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브라질은 재화와 서비스 대부분을 국내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내수 지향적인 경제다.
GDP 대비 수출 비중이 작고, 대부분의 수출 품목이 농축산물과 원자재이기 때문에 브라질을 ‘1차 산업 위주의 경제’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브라질 GDP에서 1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5~10%로 매우 낮으며, 나머지 GDP의 90~95%는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견인한다. 실제로 브라질은 중남미 대륙 최대의 제조업 강국이다. 항공기와 자동차부터 제약, 화학·플라스틱 등 못 만드는 게 없을 정도다. 다시 말하면 브라질은 남는 농축산물은 내다 팔고, 공산품은 직접 만들어 쓰는 나라다.
환율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만 봐도 브라질 경제의 내향성이 보인다. 브라질 정부는 국민의 구매력과 직결되는 인플레이션에는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나, 환율 변동에는 그리 민감하지 않다. 2021년 10월 현재 환율은 1달러당 5.6헤알로, 2년 전보다 40% 가까이 폭등했다. 대내외 이슈로 하루 새 환율이 10% 이상 변동하는 것도 비일비재하다. 우리나라라면 제2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논하며 진즉 패닉에 빠졌겠지만, 브라질 경제는 그래도 돌아간다.
브라질은 세상의 이분법으로 딱 떨어지게 재단할 수 없는, 어중간함과 모호함이 넘치는 나라다. 미국의 시선으로 브라질의 인종 문제를 이해할 수 없고, 한국의 환율 공식으로 브라질 경제를 속단할 수 없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는데, 브라질의 넘치는 불확실성 때문에 자세히 알아보기도 전에 진출을 포기하는 기업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브라질이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브라질은 인구 2억1천만 명을 자랑하는 세계 6위 인구 대국이기도 하지만, 중위연령이 32살로 비교적 젊은 국가이며 2045년까지 꾸준히 인구가 성장할 전망이다. ‘젊은’ 브라질은 구성원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창의력과 민첩성을 요구하며, 이를 브라질의 기업환경과 소비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브라질은 중남미 최대 스타트업 강국이다. 2021년 현재,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CB인사이트(CB Insights) 리스트 기준 브라질의 유니콘기업(기업가치가 10억달러 이상인 스타트업)은 13개인데, 그중 핀테크기업인 누뱅크(Nubank)의 기업가치는 300억달러(약 35조원)로 전세계에서 9번째로 높다. 누뱅크는 브라질의 오프라인 은행시스템에서 벗어나 100% 클라우드화된 인터넷 전문은행으로 고객 4천만 명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워런 버핏이 찍은 핀테크기업’으로도 알려져 전세계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8년 누뱅크를 시작으로 2021년 현재까지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13개 브라질 스타트업이 유니콘기업 반열에 올랐다. 이 중 절반이 팬데믹을 전후로 유니콘기업이 됐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스타트업 생태계가 살아났다고 말할 수 없지만,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브라질 기업의 업무와 서비스를 크게 변형시킨 점은 명백하다.
기업 모습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고용 형태와 노동조건도 유연하게 바뀌었다. 브라질 응용경제연구소(IPEA) 조사 결과에 따르면 팬데믹 기간에 46%의 기업이 기존 사무실 근무 대신 재택근무를 시행했으며, 채용시부터 100% 원격근무제를 도입하는 기업이 309%나 증가했다. 팽팽한 위계질서의 사무직 노동자가 줄어들고 자유로운 형태의 프리랜서로 고용조건을 전환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 2021년 11월 상파울루 시내 브라질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우리 술 칵테일 경연대회’에서 관람객들이 우리 술 칵테일을 시음하기 위해 줄 서 있다. 연합뉴스

<오징어 게임>과 스시 즐기는 브라질인
보수적이던 브라질 소비자의 인식도 변화했다. 넷플릭스로 거부감 없이 <오징어 게임> 같은 비영어권 드라마를 보고, 음식배달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스시와 야키소바 등의 아시아 음식을 시켜 먹기 시작했다.
현대 서양철학은 “모든 문화는 불연속적으로 진화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문화가 도래하려면 기존 사유의 한계를 넘어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어야 하며, 이때 필연적으로 기존 관습과 전통에서 단절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가 브라질의 뿌리 깊은 사회 부조리와 경쟁 없이 안주했던 과거의 경제를 끊어내는 ‘긍정적 단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것이 브라질을 ‘새로운’ 브라질로 만드는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

*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와 함께 세계 각국의 최신 경제 흐름과 산업 동향을 소개한다. KOTRA는 전세계 83개국에 121개의 해외 무역관을 보유한 ‘대한민국 무역투자 정보의 메카’로 생생한 해외 정보를 수집·전달하는 것은 물론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돕는 안내자 역할을 맡고 있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1년 12월호
 

정기구독자는 과거 기사 전체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온라인 회원은 과거 기사 일부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

  

ⓒ Economy Insight(http://www.economyinsight.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 기사의견(0)  
 
   * 3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600byte)
   * 욕설이나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운영원칙]
매체소개 구독신청 구독문의기사문의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무단수집거부찾아오시는 길
한겨레신문(주) | 제호 : 이코노미 인사이트 | 등록번호 : 서울 아 01706 | 등록일자 : 2011년 07월 19일 | 발행인 : 김현대 | 편집인 : 강대성
발행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 한겨레 고객센터 1566-9595 | 청소년보호 책임자 : 백기철
Copyright 2010 Hankyore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