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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르주아는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모른다”
[INTERVIEW] 루이 모랭 프랑스 불평등연구소 소장
[139호] 2021년 11월 01일 (월) 카트린 앙드레 economyinsight@hani.co.kr

루이 모랭은 2003년 프랑스 불평등연구소를 공동설립하고 현재 연구소장으로 있다. 그는 최근 펴낸 책 <더 큰 부를 향해, 앙코르!>에서 항상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프랑스 부유층을 비판했다. 그의 눈에 프랑스 부자는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은 생각 않고 ‘패자’를 멸시한다. 부자들은 그들의 불평과 달리 코로나19 위기에도 큰 탈 없이 지낸다. 그런 특권층이 자신들은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언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책임을 회피한다. 그러면서 정책 ‘수혜자’와 외국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프랑스 부유층의 이런 태도는 코로나19가 촉발한 프랑스 사회·경제 위기로 더 심해졌다.

카트린 앙드레 Catherine André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기자

   
▲ 루이 모랭 불평등연구소장.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이번 책에서 프랑스 언론이 말하는 평등이 대단히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
언론이 프랑스 사회에 관해 하는 얘기와 국민이 일상에서 겪는 현실의 격차에 늘 관심을 가졌다. 그것을 밝히는 일이 불평등연구소에서 하려는 일이다. 그런 격차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냐하면 평등은 좌우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공감하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파가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자유라고 할지라도 평등은 프랑스 사회가 늘 강조하는 가치다. 프랑스 학생들은 매일 아침 학교에서 ‘자유·평등·박애’ 구호를 마주한다.

부자의 기준
-상위 1%뿐 아니라 상위 20%까지 ‘부유층’으로 분류했다. 상위 20%에 속하는 많은 이가 자신은 특권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가르는 객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평등연구소는 소득세와 각종 사회보장세를 공제한 뒤의 소득이 1인 기준 월 3500유로(약 480만원)를 넘으면 부유하다고 본다. 이는 중위소득 200%에 해당한다. 프랑스 국민의 92%가 이보다 적은 돈으로 산다. 중위소득의 2배라는 기준은 임의로 정의한 것이다. 우리가 중위소득의 60%로 아는 공식 빈곤선도 실은 임의로 선택한 기준이다. 내 말이 진실이라는 게 아니다. 부유층의 정의를 알려진 것보다 더 넓게 보는 것뿐이다.
오늘날 좌파는 상위 1% 부자에게만 집중한다. 이들의 소득과 재산은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천문학적 수준이다. 불평등연구소 추산에 따르면 루이뷔통 등 명품 브랜드를 가진 LVMH그룹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의 재산으로 툴루즈(인구 기준 프랑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를 통째로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슈퍼리치’만 겨냥하는 것은 한계가 많다. 국민의 80%보다 잘사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면 누가 부자이겠냐.
소득과 마찬가지로 학력도 특권층을 가리는 기준이다. 생활수준 격차는 경제뿐 아니라 문화에서도 나타난다. ‘문화부르주아’(문화자본이 풍부한 계층)는 사회적 지위가 경제부르주아와 견주고도 남을 만큼 높으면서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오늘날 프랑스 상위 20% 부유층은 학사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
부의 재분배는 사다리 한 층만 보지 말고 넓게 생각해야 한다. 최저빈곤층만 보고 서민이 겪는 고충을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프랑스 최고 갑부로 부유층 전체를 정의할 수 없다. 물론 소득세, 사회보장세를 내고 남은 2650유로로 생활하는 사람(상위 20%)과 매달 10만유로씩 쓰는 사람의 생활은 완전히 다르다. 나이와 사는 곳, 재산 등 여러 요인도 따져봐야 한다. 이런 지적에 모두 동의한다. 그래도 앞에서 말한 부유층의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
프랑스 문화·경제 부르주아는 상위 1% 부자에게 손가락질한다. 나머지 무리에 섞여들어 엘리트와 자신을 구분하려 한다. 하지만 ‘99% 대 1%’는 인기 영합용 구호일 뿐이다. 이런 구도는 너무도 단순해서 일부 좌파가 좋아한다.
-좌파가 더는 ‘좌파’가 아니란 말인가.
좌파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출간한 책의 부제목 ‘프랑스 특권층은 만족을 모른다’가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점을 안다. 이 계층 사람들이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부를 증식하려 한다고 읽힐 수 있다.
이런 과잉 해석에 빠지면 안 된다. 현실에서 부유층 일부는 (사회적으로) 연대할 준비가 돼 있는 게 사실이다. 다만 그 노력의 크기를 ‘납세 여력’에 따라 공정하게 매겨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세계인권선언문에 명시된 대로 말이다. 이런 생각은 부유층만 하는 게 아니라고 본다. 코로나19로 피해가 큰 만큼, 많은 프랑스 국민이 사회연대를 위해 노력하려 한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에 관한 공적 논의에서 극보수의 입김이 세다. 그런데 그것이 과반수 의견은 아니지 않나. 마찬가지로 가난한 국민을 ‘수혜자’라고 못마땅해하면서 희생양으로 삼는 우파가 있다. 그러나 가장 빈곤한 사람들에게 뭔가 더 해줄 필요성은 좌우 가릴 것 없이 대부분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누가 진보 혹은 보수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게 꼭 자신의 ‘패거리’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그런 말들이 미디어를 장악하는 데 있다.

   
▲ 2021년 9월18일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유럽문화유산의 날을 맞아 에펠탑 부근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다. 프랑스에선 생활수준뿐만 아니라 문화수준 격차도 심해지고 있다. REUTERS

중산층이란
-중산층이 무엇인가를 두고 이해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 언론에 비치는 중산층의 모습은 앞에서 나온 잘못된 시각이 반영됐다. 중산층이라고 하면 대부분 생활이 넉넉한 부류로 이해한다. 예전부터 그랬다. 1990년대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기자로 일할 때부터 이 문제를 다뤘다. 중산층을 ‘고급’스럽게 보는 시각은 그 계층의 실제 생활수준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프랑스에서 혼자 월 1800유로로 생활하면 ‘중위’라고 본다. 어떤 사람은 중산층을 서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정확한 시각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생활방식이 잘못됐다며 사회적 멸시까지 당하는 계층이 있다. 크리스토프 카스타네르 하원의원(전진하는 공화국)의 말을 인용하면 “담배 피우고 경유차를 타고 다니”는 계층이다. 덧붙이자면, 이 계층은 ‘흉측한’ 공동주택에 살면서 바비큐를 즐겨 먹고 (값싼) 대형 유통업체에서 물건을 사고 매끼 유기농을 골라 먹지 않고 종일 텔레비전을 본다(교양 프로그램만 보는 게 아니다). 문제가 심각하다. 일부 엘리트 좌파는 이 사회계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들의 생활방식이 몇몇 엘리트 좌파가 생각하는 ‘좋은’ 취향과 정반대에 있다.
-생활수준 불평등이 심화한다. 피할 수 없는 변화인가.
비관주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비관주의는 불평등이 심각하고 ‘모든 것이 악화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상황이 반드시 오게 하는 자본주의 법칙은 세상에 없다. ‘옛 시절이 더 좋았다’는 말은 나이 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할 뿐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일자리 시장이 예전보다 어렵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노동시장에 ‘안정’과 ‘불안정’을 가르는 틈이 있음은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사실이다. 일부 국민은 평균보다 위태롭고 불안정한 삶을 산다. 이는 1980년대부터 나타난 현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삶의 지평선이 어둑해지는 것은 맞다. 특히 청년들에게는.

무뎌진 진보
-평생 실업과 가난만 겪은 사람들이 곧 정년퇴직하는 나이가 된다.
실업과 가난이라는 불안정한 삶은 학업 등 자신이 거쳐온 삶의 궤적, 노동 현실과의 괴리, 그에 따른 체념과 맞물려 있다. 이는 서민층이 오래전부터 겪는 문제였다. 점점 더 많은 청년이 (명문 학교는 아니지만) 대학 공부를 마치고도 계층 사다리를 내려간다. 높은 기대가 노동시장에서 좌절과 체념으로 바뀐다. 이런 경험은 청년들에게 엄청난 폭력이다. 갈등과 제도에 대한 불신을 부추긴다.
주거 문제도 있다. 천정부지로 오른 임대료가 청년층 소득을 파먹는다. 계층 하락을 겪은 이들의 울분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중요한 현상이다. 몸과 마음이 다친 일부 청년은 자신의 기대치를 끊임없이 끌어내려야 한다. 이는 중산층 부모 세대에게도 엄청난 실망감을 안긴다. 계층 상승을 경험한 부모는 자신만큼 성공하지 못하는 자녀를 보고 실망한다. 이들은 자녀의 성공을 위해 돈을 아낌없이 썼다. 이런 모든 상황이 프랑스 사회는 몇몇 사람에게만 유리하고 자신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좌절감을 안긴다. 평등하다는 약속을 그만둘지, 행동할지 선택해야 한다. 사회 갈등만 부추기는 양면적 구호는 끝내야 한다.
-책에서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가.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서민과 경제·지식 부르주아로 분열된 프랑스 사회는 사회적 긴장과 데가지즘(Dégagisme·구체제 청산)을 키운다. 일부 부유층은 극우 세력이 정권을 잡을 때 프랑스 공화국의 자유 가치 혹은 외국인에게 생길 수 있는 변화 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좌파 엘리트 역시 점차 ‘퇴보’하거나 무뎌진다.
이는 나에게만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를 비롯한 여러 언론매체와 불평등연구소도 이런 현상을 용인하지 않고 앞에서 본 사회와 현실의 격차를 자료로 증명하려 한다. 이제는 서민·중산층이 바라는 바를 구체적으로 이뤄줄 사람이나 작업이 무엇인지 아는 것만 남았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반자본주의적 혁명’이 아니다. 더 공정한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 Alternatives Economiques 2021년 9월호(제415호)
“La bourgeoisie n’est plus consciente de ses privilèges”
번역 최혜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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