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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를 넘어서는 가상은 불가능하지 않다
[CULTURE & BIZ] 가상 인플루언서 시대
[138호] 2021년 10월 01일 (금) 문동열 rabike0412@gmail.com

문동열 콘텐츠산업 칼럼니스트

   
▲ 신한라이프 광고에서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가 신나게 춤을 추고 있다. 로지는 MZ세대가 선호하는 얼굴형을 모아 3차원 합성 기술로 만들었다. 신한라이프 누리집 동영상 갈무리

고대 그리스 키프로스의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는 자신이 만든 여인 조각상을 사랑했다. 신이 그의 진실한 사랑에 감복해 조각상을 사람으로 만들어줬고, 피그말리온은 그 여인과 행복하게 살았다. 자신의 바람을 담은 가상의 이상적 존재에게 애정을 갖는 행위를 ‘피그말리오니즘’이라고 하는 것도 이 신화에서 유래한다.
신화 속 이야기지만 현대사회에서 이런 피그말리온들을 발견하기 쉽다. 실제 인물이 아닌 가상의 캐릭터에 애정을 쏟고 결혼식까지 올리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정상적이지 않아 보이는’ 이 행위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가상의 존재가 실제 인물에 뒤지지 않는 매력이 있음은 부인하지 못한다.

급부상
최근 가상 인플루언서들이 주목받고 있다. 아직 용어가 통일되지 못해 가상 연예인이나 가상 셀러브리티 등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기본적으로는 컴퓨터그래픽 등으로 구현한 가상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국내 금융회사 광고에 등장한 여성 출연자가 가상 인물임이 알려져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2021년 8월 현재 5만 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보유한 22살의 ‘로지’는 가상 인물이다.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 출생)가 선호하는 얼굴형을 모아 3차원(3D) 합성 기술로 탄생시킨 이 가상 연예인은 2021년에만 벌써 10억원 넘는 수익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데뷔 1년차 신인임에도 중견 연예인 이상의 수익을 내는 셈이다.
가상 연예인의 출현이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상 인플루언서는 ‘릴 미켈라’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가수와 유튜버, 모델로 활동하는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300만 명이다. 2020년에 샤넬, 프라다, 캘빈클라인 등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의 모델로 활동하며 130억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이케아 광고 모델로 알려진 ‘이마’라는 가상 인물은 34만 명의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다. 광고로 처음 접한 사람들이 그가 가상 인물임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 밖에도 많은 가상 인물이 인플루언서로 활약하며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MZ세대를 겨냥한 기업들도 가상 인플루언서의 마케팅 효과에 주목한다. 당분간 가상 인플루언서의 열기는 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등장 배경
이렇게 가상 인플루언서가 주목받는 것은 ‘인플루언서 마케팅’이 전체 기업 마케팅 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진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인플루언서 마케팅 허브’의 조사에 따르면, 2021년 글로벌 인플루언서 마케팅의 규모는 138억달러(약 16조원)로 추산된다. 2016년의 17억달러에서 5년 만에 8배 이상 성장했다는 의미다. 인플루언서 마케팅의 성장은 기업의 실질적인 매출 증대와 연결된다는 점을 각 기업이 인식하는 것과 그 맥락을 함께한다. 인플루언서들이 단순히 사회관계망을 통해 주요 목표대상에 브랜딩 이미지를 투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 것이다.
가상 연예인을 통한 마케팅 시도는 생각보다 꽤 오랜 역사를 가졌다. 1996년 세계 최초의 사이버 가수로 불리는 ‘다테 교코’가 일본에서 처음 등장했고, 이어 1997년 한국에서 사이버 가수 ‘아담’이 출현했다. 지금 보면 초기 컴퓨터그래픽의 부자연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저급한 모습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세기말의 ‘사이버 스페이스 붐’과 맞물려 꽤 화제가 됐다.
그 화제성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한계와 비용 부담 등으로 금방 수그러들었다. 이후에도 몇몇 가상 연예인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흥망을 거듭했다. 그 가운데서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가상 연예인들이 있다. 애니메이션과 게임의 발달로 높은 수준의 캐릭터 산업을 보유한 일본의 ‘하츠네 미쿠’라는 캐릭터가 대표 사례다.
2007년 처음 선보인 하츠네 미쿠는 보컬로이드라는 음성 합성엔진의 캐릭터다. 이 엔진을 활용해 만들어진 가상 가수라는 정체성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가 아니라 단순한 음악 소프트웨어의 대표 캐릭터에 불과했던 하츠네 미쿠는 ‘동인활동’이라고 불리는 2차 창작의 모티브가 되어 많은 2차 창작물을 생산했다. 이를 통해 얻은 인지도로 텔레비전 광고에도 출연하는 등 지금도 웬만한 현실 연예인 이상의 인기를 누린다.
홀로그램 영상을 활용한 하츠네 미쿠의 실제 콘서트가 일본을 넘어 해외에서도 열린다. 콘서트 때마다 수천 명의 팬이 운집해 열기를 뿜어낸다. 만화 캐릭터에서 시작된 영국의 가상 록그룹 ‘고릴라즈’도 마찬가지다. 1998년 결성된 이후 가상 밴드의 특징을 잘 살린 고릴라즈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제작자들의 독특한 음악적 색채로 20년 넘게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2017년 8월31일 하츠네 미쿠의 10번째 생일을 기념해 벌인 크라우드펀딩 지하철 광고 프로젝트. 국내에서 390만원 모금을 목표로 했으나, 10배가 넘는 약 4200만원이 모였다. 미쿠월렛즈 누리집

장단점
성공한 가상 연예인들의 존재는 현재의 가상 인플루언서 트렌드를 만든 가장 큰 원인이다. 가상 인플루언서는 현실 인플루언서가 발생시킬 수 있는 브랜드 가치 훼손과 예측하기 힘든 변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 기업에는 가장 큰 매력이다. MZ세대가 선호하는 얼굴형 데이터를 모아 만든 로지처럼 빅데이터를 포함해 다양한 데이터로 많은 사람의 호감을 쉽게 끌 수 있다. 또 브랜드 이미지에 적합한 ‘맞춤형’ 인플루언서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이러한 장점을 활용해 현실의 인간으로는 실행하기 힘든 다양한 창조성을 구현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큰 장점은 훨씬 싼 비용이다. 인스타그램 마케팅을 기준으로, 팔로어가 300만 명이 넘는 인플루언서의 홍보 게시물당 평균 가격은 미국에서 약 25만달러(약 2억9천만원)까지 치솟는다. 하지만 같은 300만 명의 팔로어를 가진 가상 인플루언서 릴 미켈라를 활용하는 데는 9천달러 정도밖에 들지 않는다. 거기에 최신 트렌드와 함께 화제성을 누린다는 이점이 덤으로 따라붙는다.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으로선 선택을 망설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이다.
물론 가상 인플루언서에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극복해야 하는 것은 가상의 존재가 주는 심리적 장벽이다. 일본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주창한 ‘불쾌한 골짜기’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로봇 등이 인간을 닮을수록 좋아하다가 닮은 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오히려 정서적 불쾌감 또는 비호감을 가진다고 한다. 과거 많은 가상 연예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기함에 접근했다가 화제성이 사라지면 이미지 호감도가 금방 소진될 것이다.
이런 단점이 있음에도 지금의 가상 인플루언서 유행은 과거와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훨씬 발전한 기술과의 결합은 가상 인플루언서가 활동하는 영역을 넓힐 수 있다. 메타버스 같은 가상 세계 플랫폼과 결합했을 때 가상 인플루언서의 가치와 효용에 대해서는 기대감이 크다. 에픽게임즈의 언리얼 엔진 등이 제공하는 실시간 렌더링(이미지 합성) 기술은 가상 인플루언서가 더 많은 영상 장르에 출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머지않아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 출연자로 활동하는 가상 인플루언서를 만날지도 모른다. 기술적 배경은 충분히 조성돼 있다.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인공지능과 결합한 진정한 의미의 가상 인플루언서가 등장할 가능성도 크다. 이미 많은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이 학습을 통해 사회관계망에서 팬들의 답변에 자동으로 댓글을 달고 있다. 점점 더 인간과 구별하기 힘든 AI 프로그램의 출현도 그리 멀지 않았다.

AI와 결합
‘싱귤래리티’(특이점)라고 불리는 어느 순간 AI가 사람과 구별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한다면 아마 우리는 가상 인플루언서와 실제 사람을 분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앞으로 가상 인플루언서가 단순한 화제성으로 금방 사라지는 유행이 될지, 새로운 시대의 새 마케팅 기법으로 꾸준히 발전할지 현재 시점에서 단정하기 힘들어 보인다.
디지털 기술이 현실을 모방해 가상의 개념을 구축하면서 가상이 실재를 넘어설 것인지는 늘 많은 사람에게 논란거리가 됐다. 지금까지는 실재를 넘어서는 가상이라는 주장이 공상과학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일축됐다. 하지만 가상 인플루언서가 텔레비전과 다양한 디지털 매체에서 버젓이 활동하는 현시점에서 가상이 실재를 넘어설 수 없다고 단언하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다.

* 문동열 칼럼니스트는 업계 경력 20년 이상의 콘텐츠산업 전문가다. 글로벌 콘텐츠 제작자로 활동하며, 콘텐츠 제작과 금융이 전문이다. 일본 게이오대학원을 졸업하고 LG인터넷과 SBS콘텐츠허브 등에서 방송·게임·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의 기획과 제작을 맡았다. IBK기업은행에서는 콘텐츠 금융과 관련한 시스템 구축에 참여했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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