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시각
     
장하준이 말할 수 없는 몇 가지
[경제사 산책]
[10호] 2011년 02월 01일 (화) 류동민 economyinsight@hani.co.kr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 교수
 
경제학 관련 서적이 한국에서 (이 글을 쓰는 현재) 20만 부 넘게 팔렸다면, 이것은 하나의 신드롬을 넘어 도대체 그렇게 많은 독자들이 무엇을 읽고 싶어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얘기다.
언젠가 제법 알려진 경제학자들이 모인 자리에 함께한 적이 있다. 흔히 최근의 주류 경제학이 신자유주의니 시장만능주의니 하는 비판은 많이 있어왔고 나 자신도 그 비판의 대열에 때로 끼곤 했지만, 그렇게 많은 시장중심적 사고를 가진 경제학자들의 실물( ! ) 틈에 앉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공짜밥은 먹었으되 먹는 내내 그 비싼 밥값을 능가하고도 남는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그들에게 시장은 무슨 문제를 들이대더라도 ‘경쟁’과 ‘효율성’을 통해 가볍게 해결하는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었다. 그날 들은 얘기 중 최악은 1천만원을 내고서라도 최고의 대우로 맹장수술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면서 의료 민영화를 지지하는 논리였다. 그나마 덜 놀라웠던 것은 비인기 학과를 졸업해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자라면서부터 무한 경쟁에 노출된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스펙’을 쌓아야 하고, 스펙 중 으뜸인 ‘좋은 대학’에 가려면 ‘좋은 고등학교’, 심지어 ‘좋은 중학교’에 가야 하며, ‘좋은 학원’이 있는 ‘좋은 동네’로 이사해야 한다. 이런 스펙쌓기의 모든 비용과 부담, 그리고 그 성공과 실패에 따른 대가는 온전히 개인 또는 그 확장된 형태인 가족의 몫이다.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출판기념 간담회를 갖고 있는 장하준 교수.

극단적 자유주의가 장하준 신드롬 불러
누구나 남들(의 아이)보다 자신(의 아이)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위치를 확보하고, 더 쉽고 편하게 잘살고 싶어하는 것은 뿌리칠 수 없는 욕망이다. 시장만능주의 경제학자들의 기본 입장은 이런 욕망에 기초한 경쟁이 자유롭게만 이루어진다면, 그 결과는 효율성과 경쟁력 향상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 철학적 근거 중 하나는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인간이 경제학 교과서의 가정과는 달리, 때로는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 최소한 이기적으로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 등의 연구를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시장이 ‘공정한 사회’는 고사하고 ‘효율성’조차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는 ‘시장의 실패’가 발생하는 상황이 충분히 많다는 것 또한 경제학 원론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들이다. 이를테면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주류 경제학자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촌철살인의 주장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한국에서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재벌계 연구소나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실패’도 시장에 맡겨두면 해결된다는 해괴한 논리까지 제시한다. 심지어 전경련 이름으로 간행된 미국 교과서의 편집·번역본에서는 ‘시장의 실패’ 단원만 빠트리는 실수(?)를 범한 예도 있다.
스펙쌓기가 결국 질 좋은 노동력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여기에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만큼 일정 부분 책임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이다. 그러나 스펙쌓기는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그 책임과 의무를 철저하게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최근 10여 년 사이에 한국의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이 절망적 경쟁에 매달리도록 만든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경제학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여러 기준이 있겠으나,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 탓으로 돌리느냐 아니면 사회적 구조에서 찾느냐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컨대 미시경제학 교과서의 분배 이론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한계생산력설은- 시장이 완전경쟁적이라거나 생산함수가 1차동차(투입 규모에 대한 수익 불변)라는 등 경제학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제약 조건하에서- 결국 ‘네 소득이 적은 이유는 네가 생산에 기여하는 바가 그만큼밖에 안 되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셈이다. 이를테면 한 달에 1억원가량의 높은 수입을 로펌에서 받아 문제가 된 고위 공직자 후보가 사퇴의 변에서조차 우리 사회가 그 정도의 차이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을 기억해 보라! 그렇지만, 심지어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급여나 고용의 안정성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런 이론은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등장하는 부자 나라가 생산성이나 기업가 정신이 높아서 가난한 나라보다 잘살거나, 부자들이 생산에 더 많이 기여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보다 잘사는 것은 아니라는 단순한 명제들은 이미 현실에서 수많은 실패를 겪었거나 겪을 가능성이 있는 독자들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러므로 감히 예상해보건대, 그토록 많은 독자들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도록 만든 것은, 현재와 같은 시장중심적 자본주의가 최선의 상태는 아니며 무엇인가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장하준은 학술 논문이나 대중적 발언에서 좌파 또는 우파, 진보 또는 보수라는 단순한 틀로 재단하기에 쉽지 않은 학자다. 그러나 <사다리 걷어차기>나 그 대중적 버전인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비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구성상 좀더 진보적 입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느낌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의 명제들도 몇 차례에 걸쳐 활용되고 있으며,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에게는 익히 알려진 주장들로 이 책을 다시 구성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시장은 그 출발에서부터 정치적 권력을 필요로 한다(Thing1.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2. 모든 경제주체가 합리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좇아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Thing5. 최악을 예상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3. 자본주의 경제에서 금융으로 대표되는 비생산적 부문은 경제 전체의 이윤 생산에는 기여하지 못하며, 오직 생산적 부문에서 생산된 이윤에 기생할 따름이다(Thing4.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Thing9.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4. 어느 사회에서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을 구분하는 것은 생산성 등 객관적 차이 못지않게 사회구조적 요인, 심지어 이데올로기적 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Thing14. 미국 경영자들은 보수를 너무 많이 받는다).
5. 이윤을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 정신 등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Thing15.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  
6. 자본에 이익이 되는 것과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것은 다르다(Thing18.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
7. 선진국과 후진국 간에는 무역 등을 통해 가치의 불평등한 이전이 발생한다(Thing3.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장하준이 마르크스를 인용하는 방식은 다소 편의적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는 국가가 ‘부르주아계급의 집행위원회’라는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적 명제를 ‘개별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제가 산업 부문 전체의 집단적 이익, 나아가 나라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262쪽)고 해석한다. 마르크스의 의도는 국가가 중립적으로 공익을 지킨다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총자본으로서 사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국가의 계급성을 지적하는 명제가 ‘나라 전체의 이익’으로 연결되는 데에는 상당한 논리적 비약이 필요하다.
자신의 전공인 발전경제학의 이슈를 다루었던 장하준의 전작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선진국과 저개발국의 대립 구조를 기본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정책이 성장에 도움이 되느냐가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그것은 더 이상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복지국가가 오히려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입만 열면 포퓰리즘이나 복지망국론을 들먹이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보수적 입장에 대한 일차적인 반박으로서는 의미를 지니지만, 자칫하면 복지가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입증책임을 떠안을 위험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복지가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면 복지를 포기해야 하는가?

성장 담론에 말려들 위험 내포
박정희 시대의 산업정책에 대한 장하준의 긍정적인 평가는 마치 최근 서구의 진보적 학자들이 중국에 대해 갖는 환상적 기대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물론 자유도 없이 굶어 죽는 것은 최악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인권이나 자유주의적 가치가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경제성장은 결코 바람직한 것일 수 없다. 더구나 민주주의의 진전 없이는 경제성장의 성과를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가령 재벌의 경영권 승계를 인정해주고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자던 몇 년 전 장하준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재벌의 내·외부적 전횡을 견제할 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무기력한 요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다양한 역사적 반례를 제시함으로써 신자유주의 논리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 대안이론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출현은 금융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산업자본이나 노동-자본의 협력을 중시하던 이른바 케인스주의가 위기에 처한 결과였음에 주목한다면, 신자유주의로부터 모종의 케인스주의로의 귀환이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출퇴근 시간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 환승역(신도림역이라도 좋고 교대역이라도 좋다!)을 생각해보자. 개인의 입장에서 압사당하거나 다치지 않으려면 그저 인파 속에 파묻혀 전체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여나가는 수밖에 없다. 혼자서 또는 몇 명만 방향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하나의 올바른 방향으로 빨리 전진하는 것이 목표라면 어깨를 맞대고 좁은 간격으로 천천히 진행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방향이 틀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장하준의 논의는 비유하자면, 환승역 구내의 수많은 사람들을 더 적절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주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조건하에서 그것이 가능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현실정치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치르는 선거를 통해 구성되는 국가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가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상투적인 얘기지만 정권이든 재벌이든, 또는 그 무엇이든 간에 살아 있는 권력을 끊임없이 견제하기 위한 성숙한 시민사회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그런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데 유용한 지침임이 틀림없지만, 지금은 한국 사회가 성장 담론을 벗어나 민주주의와 복지를 새롭게 사고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rieudm@cnu.ac.kr

정기구독자는 과거 기사 전체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온라인 회원은 과거 기사 일부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

  

류동민의 다른기사 보기  
ⓒ Economy Insight(http://www.economyinsight.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 기사의견(4)  
 
   * 3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600byte)
   * 욕설이나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운영원칙]
매체소개 구독신청 구독문의기사문의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무단수집거부찾아오시는 길
한겨레신문(주) | 제호 : 이코노미 인사이트 | 등록번호 : 서울 아 01706 | 등록일자 : 2011년 07월 19일 | 발행인 : 김현대 | 편집인 : 강대성
발행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 한겨레 고객센터 1566-9595 | 청소년보호 책임자 : 백기철
Copyright 2010 Hankyore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