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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기를 위한 선물, 베이비박스
[핀란드 복지국가 산책]
[137호] 2021년 09월 01일 (수) 신소영 soyoung.fin@gmail.com

신소영 자유기고가

   
▲ 2021년 핀란드 사회보험청에서 임신부들에게 나눠준 베이비박스 구성품. 배냇저고리, 두툼한 겨울옷, 아기이불, 체온계, 손톱깎이, 수유패드, 유두크림, 생리대, 콘돔 등 아기와 엄마를 위한 물건이 한가득 들어 있다. KELA 제공

핀란드에서 엄마가 된다면 아이를 품에 안기 전 먼저 받아보는 것이 있다. 바로 핀란드에서 처음 시작해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곳은 아직도 핀란드밖에 없다는 선물 보따리, ‘베이비박스’(Maternity Package)다.
베이비박스를 처음 받았을 때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 집 근처 우편물 취급소로 배송된 커다란 박스를 남편과 함께 차에 실어 오던 추운 겨울날이었다. 육아용품 70여 가지가 가득 담긴 박스를 받으니 마음이 그렇게 따뜻해질 수 없었다. 베이비박스를 받고서야 비로소 내가 엄마가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핀란드 정부는 80년 동안 산타클로스처럼 모든 부모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다.

1938년 저소득가정에서 시작해 확산
베이비박스 지급은 1938년 시작됐다. 전쟁으로 혼란스럽던 그 시절, 못 먹고 못 살기는 핀란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 1천 명 가운데 65명이 사망할 정도로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다. 베이비박스를 받으려면 네우볼라(공공의료기관) 의료진이 발급한 확인서를 사회보험청인 켈라(KELA)에 제출해야 하는데, 임신부가 조기에 의료진한테 검진받도록 유도해 영아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마련한 절차다. 베이비박스는 처음엔 소득이 낮은 가정에만 지급됐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소득과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가정에 지급됐다. 베이스박스를 받는 대신 170유로(약 23만원)의 지원금을 선택할 수도 있다. 베이비박스는 아기를 입양한 엄마도 받을 수 있다.
베이비박스는 출산 4개월 전에 배송된다. 배냇저고리와 다양한 크기의 옷가지, 두툼한 겨울옷, 아기이불, 체온계, 손톱깎이, 수유패드, 유두크림, 생리대, 콘돔 등 아기와 엄마를 위한 물건이 한가득 들어 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고 표현하면 이상할까? 그래서 베이비박스를 ‘스타터 키트’(Starter Kit)라고도 부른다. 박스에는 얇은 스펀지 패드가 깔려 있어 신생아 침대로도 쓸 수 있다. 베이비박스에 담긴 옷들은 매년 디자인이 바뀌기 때문에 아이가 입은 옷만 봐도 어느 해에 태어난 아이인지 알 수 있다. 켈라에서는 수급자의 의견을 수렴해 매년 구성품을 바꾸고 제품을 개선한다.
필자는 아기를 낳고 1년 동안은 베이비박스의 물품과 선물받은 옷들로만 아이를 키웠다. 사이즈가 큰 겨울용 점프수트는 20개월 가까이 입혔다. 버티고 버티다 옷 한 벌로 겨울을 나는 아이가 안타까워 뒤늦게 점프수트를 하나 더 샀는데, 우리 돈으로 20만원 정도 결제하고 나서야 아기 옷이 비싸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만큼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물품이 대부분 들었기에 베이비박스를 받아본 뒤 더 필요한 물건을 추가로 사는 것이 합리적이다. 셋째를 임신했을 때는 첫째, 둘째 아이 때 받았던 물품이 넘쳐나서 베이비박스 대신 지원금 170유로를 선택했다. 첫째 아이의 점프수트를 사는 데 150유로를 쓴 걸 생각하면 베이비박스는 지원금 170유로와 비교할 수 없는 값어치가 있는 셈이다.
이런 보편복지를 핀란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반대 여론이나 불만의 목소리는 없는지 궁금했다. 켈라의 홍보 담당자인 올가 가센은 “모든 아이는 자신의 배경과 상관없이 똑같은 출발을 할 권리가 있다”며 “우리 전통으로 자리잡은 베이비박스를 국민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셋째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 중인 카이사 게리츠는 어머니가 자신을 낳을 때 받았던 이불과 장난감, 배냇저고리 몇 가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베이비박스 물품으로 자신을 키웠듯 자신도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고 그렇게 자란 아이들도 엄마가 돼서 같은 혜택을 받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게리츠는 말했다. 핀란드 남자와 결혼해 이주한 미국인 애슐리 클라센은 베이비박스의 옷들은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사용한 것이니 박스를 그대로 간직했다가 아이가 독립할 때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담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이렇듯 베이비박스는 국가가 국민에게 주는 혜택에서 머무는 것을 넘어, 핀란드의 가족 중심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고 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다. 2019년 1월 핀란드의 시민단체 핀워치(Finnwatch)가 베이비박스에 일부 의류를 납품하는 기업이 제3국의 노동착취 현장에서 제품을 생산한다며 이를 개선할 것을 켈라에 요청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에게 베이비박스는 핀란드 보편복지의 상징이자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이념의 선언이다. 그래서 이런 이념이 제작 과정에서도 지켜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켈라는 이에 대해 “베이비박스에 제품을 납품하는 기업은 국제노동기구(ILO)의 노동규약을 준수하길 바란다”고 답했다.
아이에게 베이비박스의 옷을 입혀 외출할 때는 기분이 참 묘했다. 왠지 필자도 핀란드 사회에 속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종차별을 몸으로 느끼지 않는 점잖은 사회에서 살고 있더라도, 스스로가 외국인이고 이방인임을 벗어버릴 수는 없다. 그런데 베이비박스는 필자 역시 핀란드 정부에 세금을 내고 그에 맞는 혜택을 누리는 사회 구성원임을 깨우치게 했다. 필자만 특별하게 느끼는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가 되는 핀란드 사람이라면 모두 베이비박스를 받는 경험을 공유한다. 전문직 여성이나 일용직 육체노동자, 사회보험금을 받는 생활 지원 대상자도 마찬가지다. 다들 같은 옷을 받고 같은 옷을 입혀 아이를 키운다. 아이들도 자신이 그렇게 키워졌다는 것을 알고 부모가 된다.

연대의 가치와 추억을 나누는 공통 경험
사회 구성원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차별과 소외가 아닌 너와 내가 동등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베이비박스는 사회계층 간 연대를, 그리고 부모와 자식 세대 사이 추억을 나누는 구실을 한다.
“모든 아기는 동등한 출발을 할 권리가 있다.” 켈라가 내세우는 이 보편복지의 가치관을 한국 사회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보편복지가 사회통합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받아들여진다면 아이들에게 똑같은 밥을 먹이는 데 드는 비용은 그것에 찬성하고 반대하는 사회적 갈등에서 생겨나는 비용보다 훨씬 값진 것이 될 테니 말이다.

* 한국에서 법조 전문지 기자로 일하던 중 핀란드에서 일하는 남편을 만나 낯선 땅에서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며 만 6년을 전업주부로 살았다. 이력을 살려 간간이 핀란드의 정치·교육·문화 뉴스와 한인 동포 소식을 고국에 전하는 YTN 핀란드 해외리포터로 활동했다. 더불어 국내의 한 장애인권단체가 발간하는 월간지에 핀란드 장애인 관련 복지제도를 소개했다. 최근 고국에 돌아와 핀란드에서 겪은 출산·육아 경험을 담은 책을 준비 중이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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