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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정치인이 재벌 개혁을 외쳐야 하는 까닭
[박상인의 경제직설]
[133호] 2021년 05월 01일 (토) 박상인 sanpark@snu.ac.kr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경제학
 

   
▲ 2020년 4월2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 서초사옥 앞에서 열린 ‘먹고살자 최저임금, 재벌개혁 촉구, 민주노총 결의대회’에서 참가 조합원들이 “막아내자 최저임금 동결, 전 국민 고용보험 실시”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한다. 헌법의 다른 규정들을 고려하면 ‘민주공화국’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군주 같은 사회적 특수계급 제도는 인정되지 않고,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며, 이런 평등한 국민에게서 권력이 나오는 정치체제가 민주공화국이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민주공화국 정치체제는 선거로 선출되는 국회의원과 대통령, 대통령이 임면하지만 국민에 대해 책임지는 공무원, 헌법과 법률로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하는 법관들에 의해 실행된다.
그런데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로 선출되더라도 이들이 국민의 뜻이나 공익을 위해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국민에게서 권력이 나온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공무원이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꼼수를 부리거나 법관이 특정인에게 사법적 특혜를 준다면, 이 또한 민주공화국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진정으로 민주공화국 체제를 실현하고 있을까.

삼성생명을 위한 꼼수 편법
불행하게도 재벌들이 입법·행정 과정에서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해 법령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선진국은 보험회사가 건전한 자산 운용을 위해 계열회사가 발행한 채권·주식 소유의 합계액이 자기자본의 60%와 총자산의 3%를 초과하지 않도록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보험업법은 총자산과 계열사의 채권·주식 소유 합계액의 계산 기준을 명시하지 않는다. 대신 ‘보험업 감독 규정 별표 11’에서 총자산은 시가를 반영해 작성한 재무제표상 가액을, 그리고 다른 회사의 채권 또는 주식의 소유액은 취득원가를 평가 기준으로 적용한다. 즉, 비율 산정에서 분자와 분모의 기준을 다르게 적용하는 편법을 쓰고 있다. 이는 오로지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과다하게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위해 만든 입법과 행정 꼼수의 산물이다. 보험업법이 원칙대로 입법됐다면 삼성그룹 총수 일가가 삼성생명을 활용해 삼성전자를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 일가는 일반 국민과 다른 사법적 특혜를 누리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재벌 총수 일가에는 범죄 유형을 불문하고 3년 징역형에 5년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3-5법칙’이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지켜졌다. 2012년 대선 과정에선 야당 후보자들뿐만 아니라 당시 여당 후보자인 박근혜 전 대통령도 이런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징역 4년을 선고받고 2년7개월을 복역 중이던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이 확정된 지 8개월이 안 됐던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2015년과 2016년에 각각 풀려났다. 또한 2020년에는 국정농단 사건 관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을 맡은 재판부가 준법감시위원회의 효력이 미비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이재용 부회장의 준법경영 의지를 높이 판단하는 등 모순된 논리로 형량을 절반으로 작량감경했다.
이처럼 한국의 재벌 총수 일가는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은 사실상 ‘사회적 특수계급’이 됐고, 나아가 입법·행정·사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해 사익을 추구하는 경제권력이 돼버렸다. 한국을 ‘재벌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건 이런 현상을 꼬집는 것이다.
재벌이라는 경제권력의 존재는 경제력이 집중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정인들이 국가 경제적 자원의 상당 부분을 통제할 때, 이런 통제력을 이용해 정치·행정·사법·언론·학계의 주요 인사들을 포획할 수 있고, 이들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국가 정책 결정에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적 권력이 민주국가 자체보다 더 강력해지는 지점까지 이르도록 커지는 것을 감내한다면 민주주의의 자유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설파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1938년 미국 의회 연설은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명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보수가 국민의 신뢰 얻으려면
따라서 민주공화국의 회복은 경제력 집중의 해소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이는 시장경제체제가 정상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평등한 국민이 정치 엘리트가 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고, 평등한 국민에게서 권력이 실질적으로 나오는 체제에선 국민의 재산권이 공정하게 보장되기 때문이다. 재산권이 공정하게 보장된다는 건 약자의 재산권이 제대로 보호된다는 뜻인데, 약자의 재산권 보호야말로 시장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제도적 기반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정치제도다.
공화주의자를 자처하거나 헌법주의자임을 내세우는 이른바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이 진정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추구한다면,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서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 계열의 보수 정당에서 재벌의 경제력 집중 해소를 제대로 이야기한 적이 과연 있는가? 재벌이라는 기득권을 비판한 보수 정치인이 있었는가?
재벌 개혁이라는 핵심은 빼고 규제완화나 기업 하기 좋은 환경 등만 말하는 보수 정치인은 국민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아니면 ‘시장-정의-공정’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앵무새처럼 듣기 좋은 소리만 되뇌는 것이다. 이른바 보수 야권이 진정한 보수가 되기 위해서, 또 그 과정에서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재벌 개혁을 먼저 외쳐라.

* 박상인 서울대 교수가 한국 경제의 핵심 이슈를 심층 분석해 직격하는 논설형 칼럼으로, 재벌 개혁 등 여러 경제 현안을 제기하며 대안 또한 제시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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