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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한 수 된 영화 제목 ‘미나리’
[CULTURE & BIZ] 제목의 미학
[132호] 2021년 04월 01일 (목) 문동열 rabike0412@gmail.com

문동열 콘텐츠산업 칼럼니스트

   
▲ 영화 <미나리> 포스터. 판씨네마 제공

한국계 미국 이민자 이야기를 그린 영화 <미나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있다. 2021년 4월25일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미나리> 열풍이 이어질지 관심이 쏠린다. <미나리>가 외국어 영화로 분류돼 형평성 문제와 인종차별 논란까지 제기됐다. 현지 반응을 살펴보다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했다. 미국 영화 커뮤니티에서 의외로 <미나리>를 한국 영화로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대체로 제목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긴다. 그래서 한국어 대신 북미 관객이 이해하기 쉬운 영어로 제목을 달았으면 더 좋지 않았겠냐는 의견도 나온다. 이민자 이야기를 다룬 영화 가운데 자국어로 제목을 단 사례가 많지 않다는 것을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이가 ‘미나리’라는 제목이 이 영화에서 ‘신의 한 수’였다고 평가한다.

제목이 반이다
처음 콘텐츠 제작 분야에 입문했을 때 선배들로부터 ‘제목이 반’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당시에는 제목이 내용을 그냥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25년 가까이 다양한 콘텐츠 제작을 경험하면서 그때 생각이 참 짧았다고 자주 느낀다.
특히 홍보 기간이 짧고 매체 접근성이 그리 높지 않은 영화에선 제목이 마케팅과 홍보 전략의 80%를 차지한다고 할 만큼 중요하다. 개봉 직전에 영화 제목이 바뀌는 일도 허다하다. 봉준호 감독의 출세작인 <살인의 추억>도 원제는 원작 연극의 <날 보러 와요>였다. 이 연극의 인지도가 있어 그대로 가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갑론을박 끝에 ‘살인의 추억’으로 결정됐다. 많은 영화 관계자가 ‘날 보러 와요’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를 개봉했다면 100% 망했을 거라고 말한다.
영화 <추격자>의 원제는 ‘밤의 열기 속으로’였고,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제는 ‘판문점’이었다. 결과가 잘된 영화만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지만, 양쪽 제목 가운데 어디에 눈길이 가는지 생각해보면 제목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매달 수십 편씩 쏟아져 나오는 영화의 홍수 속에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띄도록 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이 영화 제목이다.
콘텐츠가 범람하는 디지털 시대에 제목 짓기는 더욱 중요한 일이 됐다. 제작자에게 자신의 콘텐츠가 돋보이게 하는 것은 언제나 큰 숙제다. 지금 콘텐츠 마케팅의 상당 부분이 인터넷 검색에 좌우되므로 몇 가지 제약이 따른다. 검색에 잘 걸리는 게 중요하지만, 너무 평범하면 다른 검색 결과와 함께 묻혀버린다. 너무 길면 뒷부분이 잘릴 수 있어 피해야 한다. 최근 본제목 뒤에 붙는 부제가 유행하는 데는 이런 환경 변화 탓도 있다.
특히 웹툰이나 웹소설은 콘텐츠 생산 속도가 빠르다. 하루에도 수십 편씩 나오므로 제목 짓기에 따라 생존이 갈린다. 고정팬층을 확보하지 못하면 금방 연재를 중단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다보니 제목이 자극적으로 바뀌어 우려가 커진다. 뉴스 콘텐츠 시장도 마찬가지다. ‘제목 장사’라고 할 만큼 제목 비중이 커졌고 ‘낚시성’ 제목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분명 문제이지만 제작자 나름의 고충이 있다. 한 번쯤 제목을 달아본 사람이라면 제목 짓기의 어려움을 인정할 것이다. 정말 좋은 제목이라는 확신을 갖기 힘들다. 많은 제작사나 기업이 콘텐츠 또는 상품의 제목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비용을 들여 사전 조사를 한다. 거기에 제목의 자원이 빠르게 소진되는 것도 고민이다. 콘텐츠 제목에 저작권이나 상표권이 인정되지 않기에 망정이지, 중복되지 않는 제목을 찾기는 정말 힘들다. 이미 사용된 제목을 쓰면 좋든 싫든 그 작품의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제작자로서는 가장 피해야 할 일이다. 물론 존경하는 사람이나 작품에 경의를 표하는 오마주의 취지로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때가 있기는 하다. 가끔 좋은 제목은 왜 죄다 다른 작품에서 써버렸는지 한탄이 나올 따름이다.

국경을 넘는 제목들
국내에서 개봉하는 외국 영화의 제목을 바꾸는 사례는 종종 있다. 원래 제목이 현지 사정에 맞지 않거나 뜻을 알 수 없는 단어일 때는 국경을 넘는 순간 다른 이름을 가진다. 최근에는 원제를 그대로 쓰는 일이 늘었지만, 사실 다양한 계층의 관객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외국어 제목을 그대로 쓰는 건 피해야 한다.
과거에는 고유명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제목을 번역했다. 번역을 넘어 번안하는 사례도 적잖다. 대표적인 것이 얼마 전 타계한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으로도 유명한 서부영화 <석양의 무법자>다. 원제는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좋은 놈, 나쁜 놈, 추악한 놈)이다. 원제대로 개봉했다면 당시 관객에게 ‘놈’이란 말이 들어간 제목이 과연 받아들여졌을지 의문이다.
번역하기 힘들거나 그냥 멋져 보여 다른 제목을 붙이는 사례도 많았다. 영화 <사랑과 영혼>의 원제는 <Ghost>다. ‘유령’이라고 번역했으면 세기의 로맨스 걸작이 공포영화로 오인될 뻔했다. 로빈 윌리엄스의 명작 <죽은 시인의 사회>도 원제는 <Dead Poets Society>(죽은 시인의 모임)이다. 모임의 어감이 어색해 ‘Society’라는 단어의 원래 뜻인 ‘사회’로 번역했다고 한다. 오역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지만, 의미가 모호해져 더 멋지게 들리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도 한국에서 처음 원제 그대로 출판됐을 때는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상실의 시대>로 제목을 바꾼 뒤 그야말로 시대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제목은 비틀스의 노래 <Norwegian Wood>에서 따왔다. 원곡의 제목은 ‘노르웨이산 가구’를 뜻하는데 일본에서 번역하면서 <노르웨이의 숲>이 됐다. 한국에서 다시 바뀌었으니, 제목이 그 나라의 문화나 관습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한국 배우 가운데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 윤여정. 판씨네마 제공

<미나리> 뒷얘기
이런 측면에서 영화 <미나리>의 내용을 모르고 제목만 들었을 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 시장을 겨냥해 미국 자본으로 만든 미국 영화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사정을 모르는 일부 미국 관객이 한국 영화로 오인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정이삭 감독이나 제작사는 미나리의 영어 이름이 있는데도 왜 굳이 한국어를 썼을까? 언론 인터뷰 등을 보면 감독은 미나리가 가진 강한 상징과 은유를 그대로 가져오고 싶었다고 한다. 어디서든 물만 있으면 잘 자라는 미나리는 한번 죽고 나면 다음해에 더 잘 자라는 특성을 가진 식물이다.
감독은 한국에서 아주 흔한 나물인 미나리에서 미국계 이민자의 삶을 발견했다. 감독의 아버지가 미국 이민 1세대였고, 그 어린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살던 할머니가 미국으로 오면서 가져온 미나리 씨앗을 영화 무대인 아칸소에서 키웠다. 실제 영화에서 쓰인 미나리 또한 감독 아버지가 키운 것이라고 한다.
영화에서도 미나리는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부 커뮤니티에서 ‘미나리를 조연상 후보로 올려야 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그만큼 의미 있는 미나리이므로 한국어 발음 그대로 제목을 단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현지 관객을 고려해야 할 마케팅이나 홍보 측면에서 이 제목은 타당한가? 제작사나 배급사에는 분명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제작사의 반대로 ‘워터셀러리’ 같은 제목을 붙였다면 어땠을까? 관객은 제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감독이 제기하는 주제의식과 미나리를 연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최종적으로 이 제목을 선택한 데는 2020년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기생충>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생충>이 미국 시장에서 쌓아올린 한국 영화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 제목 선택에 어느 정도 반영되지 않았을까 하는 관측이다.
결과적으로 선택은 옳았다. 감독의 의도, 작품 내용과의 연계성, 제목에 대한 호기심이 이끌어낸 관객의 반응 등 여러 가지가 서로 작용하며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영화 <미나리>의 제목 선택이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이 영화가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점은 역시 미나리가 뭐냐는 것이었다. 인터뷰에서 정이삭 감독이 실수로 ‘한국에서 많이 먹는 잡초(Weed)’라고 설명하자, 배우 윤여정이 ‘한국 사람들이 많이 먹는 요리의 풍미를 더해주는 채소’라고 정정하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인터뷰를 지켜본 많은 사람이 이 해프닝이 영화의 많은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의 주제의식에 대한 미국인들의 공감이 뜻 모를 제목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했다고 보면, 제목이 품은 영화적 미학에 찬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미나리>가 수상에 성공한다면 아카데미상 시상 목록에 등재되는 최초의 한국어 제목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 흔하디흔한 나물 미나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어가 될지도 모른다.

* 문동열 칼럼니스트는 업계 경력 20년 이상의 콘텐츠산업 전문가다. 글로벌 콘텐츠 제작자로 활동하며, 콘텐츠 제작과 금융이 전문이다. 일본 게이오대학원을 졸업하고 LG인터넷과 SBS콘텐츠허브 등에서 방송·게임·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의 기획과 제작을 맡았다. IBK기업은행에서는 콘텐츠 금융과 관련한 시스템 구축에 참여했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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