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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 준비하는 케이맨 제도
[Market]
[10호] 2011년 02월 01일 (화) 하이케 부흐터 Heike Buchte economyinsight@hani.co.kr

하이케 부흐터 Heike Buchter <디 차이트> 뉴욕 특파원
 
에어버스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금융 중심지인 케이맨 제도의 수도 조지타운 공항 활주로에 착륙하자 카리브해의 분위기가 물씬 밀려왔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외국인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공항에서 울려퍼지는 활기찬 레게 음악이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남쪽으로 500해상마일(926km) 떨어진 영국령 케이맨 제도의 조지타운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 옆으로 청록빛 바닷 물결이 넘실대고, 파스텔톤의 가옥과 야자수가 길게 늘어서 있다. 조지타운의 항구는 배에서 막 잡아올린 팔뚝만 한 도미를 파는 어부들과, 비치 셔츠에 슬리퍼 차림으로 면세점 쇼핑 봉투를 들고 다니는 까맣게 그을린 크루즈 여행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조세회피 천국’ 케이맨 제도가 붐비는 것은 헤지펀드의 파티가 무르익었음을 말해준다.

해적과 헤지펀드의 은신처
케이맨 제도의 진면목은 평화롭게만 보이는 휴양지가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국제 금융 중심지라는 데 있다. 조지타운은 오늘날 전세계 금융 유령회사들의 중심지로, 절세 상품을 운용하는 수많은 금융기관의 공식 소재지이기도 하다. 또한 세계 유수 은행들의 지사가 있다.
케이맨 제도는 지난 20년간 세계적으로 가장 공격적이며 베일에 싸여 있는 헤지펀드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전체 헤지펀드의 약 80%가 열대섬의 천국 케이맨 제도에 등록됐고, 그 규모만도 1조달러에 육박한다.
케이맨 제도가 과거에 해적들의 은신처였다는 사실은 현재의 위상과 묘하게 들어맞는다. 케이맨 제도를 은신처로 삼고 있는 헤지펀드도 따지고 보면 해적과 다를 바 없다. 해적이나 헤지펀드의 유일한 목적은 대박 한 방에 있다. 헤지펀드는 기업을 인수한 뒤 돈이 될 만한 부문을 매각해 크게 한몫을 챙긴다. 헤지펀드가 기업만 사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 국채와 유로화는 물론 야자수 가격 상승이나 석유 수요 하락에 베팅한다. 부실 채권, 희귀 광물, 희귀 바이올린을 대량 매입하는 헤지펀드도 있다. 생명보험증권을 대량 매입해 보험 계약자의 사망에 투자하는 헤지펀드도 있다.
최악의 금융위기가 2년여 지난 지금, 독일의 대형 은행 대부분은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에 있다. 반면 헤지펀드는 밀려 들어오는 돈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헤지펀드의 진정한 붐은 이제야 비로소 시작됐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대형 투기 세력인 헤지펀드가 투자에 실패할 경우, 피해액은 천문학적 수준에 달할 수 있다. 4년 전 천연가스 투기 실패로 순식간에 60억달러의 손실을 입은 아마란스(Amaranth)가 대표적인 사례다. 도박성이 짙은 운용 구조를 가진 헤지펀드는 대부분 자기자본이 아닌 고객의 돈으로 투자한다. 투자자의 자본금을 상회하는 금액을 잃을 수도 있지만, 헤지펀드의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을 때가 더 많다. 헤지펀드는 ‘터보 자본주의’의 대가다. 천문학적인 자본으로 점령한 뉴욕의 교외에서 런던의 도심과 교외, 취리히, 홍콩 그리고 케이맨 제도에 걸친 헤지펀드 제국을 월가는 ‘헤지스턴’(Hedgistan)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케이맨 제도는 어떤 경로를 통해 헤지펀드 중심지로 부상하게 됐을까? 케이맨 제도의 금융감독기관은 ‘금융업 친화적 환경’을 조성했다. 케이맨 제도에서는 펀드 수익의 탈세를 컨설팅해주는 금융전문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 한 명이 마크 루이스다. 루이스는 역외거래 전문 대형 로펌(Walkers)의 파트너다. 어두운 목판과 순가죽 소파로 꾸며진 조지타운의 본사 사무실은 영국식 진지함이 배어나온다. 케임브리지대학 석사 출신인 루이스는 26년 전부터 역외거래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케이맨 제도를 찾는 고객이라면 출신 국가를 막론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바로 상담해줄 수 있다. 고객보다 내가 더 잘 알 때도 많다.”
루이스는 이곳에 상주하는 몇 안 되는 헤지펀드 업계 종사자 중 한 명이다.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주로 뉴욕이나 런던에 상주하며 정작 케이맨 제도에 체류하는 날은 며칠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운용하는 투자자들의 자본은 케이맨 제도에 있다. 자국에서 소득세 납부 의무가 있는 전세계 펀드 매니저들과 투자자들이 조세를 회피하기 위해 펀드 투자금을 케이맨 제도로 옮겨놓는 것이다.
어떤 경로로 이것이 가능할까? 루이스의 설명을 들어보자. “미국의 헤지펀드에 투자할 계획이 있는 독일의 연기금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의 헤지펀드는 독일 연기금에서 받은 투자금으로 브라질의 인프라 프로젝트에 투자한다. 금융거래를 통해 독일 연기금의 투자금은 국경을 여러 번 넘나든다. 최소한 독일과 미국, 그리고 브라질 국경을 거치게 된다. 투자금이 거쳐가는 국가들마다 세금을 징수하려고 하지만 투자자들은 자신의 수익을 법적으로 보장받으려 한다. 그래서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세금을 면제받으면서도 믿을 수 있는 법 체계가 갖춰진 케이맨 제도를 찾게 되는 것이다. 케이맨 제도 같은 곳에서 금융거래를 해야 각종 법적 부담을 피해갈 수 있다.”
케이맨 제도를 거점 삼아 세계 각국으로 헤지펀드 투자금 수십억달러가 흘러나가고 있다. 케이맨 제도에 상주한 로펌·은행·회계법인으로서는 절호의 사업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케이맨 제도는 카리브해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 되었다.
 
올 등록 펀드 수 최고치 경신할 듯
그런데 케이맨 제도를 정기적으로 지나가는 허리케인보다 더 위협적인 금융위기의 파고가 2년 전 이 조세회피 천국을 순식간에 덮쳤다. 이곳 헤지펀드도 그 파고를 비켜가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월가의 수익 제조기는 수천억달러의 손실을 입었으며, 투자자들은 도망치듯 케이맨 제도를 떠났다. 전염병이라도 창궐한 듯 금융업계는 헤지펀드의 종말을 외쳤다. 국가재정난으로 케이맨 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터부시되던 조세 도입까지 거론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케이맨 제도로 다시 수십억달러가 흘러 들어오고 있다. 지난 몇 달간 케이맨 제도에 새로 등록된 헤지펀드 수는 무려 수백 개에 달한다. 올해 신규 등록 헤지펀드 수는 사상 최고치였던 2008년의 1만 개를 상회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관투자자들도 다시 돌아왔다. 공격적인 펀드에 투자하는 개인 거부들의 수는 오히려 금융위기 전보다 늘어났다. 헤지펀드 정보제공기관에 의하면, 현재 헤지펀드 운용액은 지난해 운용한 1조2천억달러보다 훨씬 많은 약 1조8천억달러로, 이는 영국의 국민총생산(GNP)과 맞먹는 액수다.
리스크가 큰 운용 방식 때문에 국제 금융 시스템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되던 헤지펀드가 2008년 금융위기를 무사히 극복한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도입된 수많은 금융시장 규제법 중 일부는 헤지펀드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금융시장 규제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쪽은 오히려 은행이다. 미국 은행은 미국증권거래위원회의 신규 등록제 적용을 받게 됐다. 유럽에선 헤지펀드에 대해 대출금리 상한제와 자기자본비율 도입 등 극단적인 조치가 예상됐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유럽 대부분의 헤지펀드가 있는 런던과 브뤼셀이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원안보다 대폭 완화된 규제안에 합의했다. 덕분에 헤지펀드는 도박성이 농후한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을 수정할 필요가 없게 됐다.
뉴욕 파커 메르디앙 호텔의 펜트하우스 라운지에서 내려다보이는 맨해튼의 마천루는 가히 환상적이다. 하지만 라운지에서 열리는 회의 참석자들은 마천루의 전망을 즐길 여유 따위는 없다. 참석자들 모두 명함을 주고받으며 정보 교류에 여념이 없다. 이날 회의 주제는 ‘헤지펀드의 미래’였다.
회의에 참석한 한 뉴욕 헤지펀드의 상임고문은 “미국증권거래위원회 관계자들과 만나야 할 일이 최근 부쩍 늘어났다”고 볼멘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외에 불만사항은 거의 없는 듯했다. 글로벌 경영컨설팅 회사(Pricewaterhouse Coopers)의 파트너인 제임스 그레이그는 “헤지펀드는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컨설턴트도 고개를 끄덕이며 헤지펀드가 당면한 문제는 밀려 들어오는 수십억달러의 투자금을 잘 운용해 확실한 수익을 남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행복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헤지펀드에 날개 달아준 금융규제
최근 금융 규제기관이 은행들에 리스크가 큰 금융거래의 중단을 촉구하면서, 상대적으로 규제를 덜 받는 헤지펀드가 더 폭넓은 금융거래의 기회를 누리게 됐다. 미국 은행들은 헤지펀드 거래를 담당하는 내부 부서를 의무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이에 크게 실망한 수많은 월가의 펀드 매니저들은 독립해 나와 헤지펀드를 설립했다. 뉴욕의 론 게프너 헤지펀드 전문 변호사에 따르면, 헤지펀드를 창업하려는 젊은이들의 문의 전화가 매일 3~5통씩 걸려온다고 한다.
돈이 넘쳐나면서 헤지펀드는 은행의 핵심사업 부문으로 외연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물론 기존 은행보다 리스크를 더 많이 감수해야 하지만 감독은 훨씬 덜 받는다. 은행에서 대출을 거부당한 중소기업들에 대출을 해준 헤지펀드도 있다. 미치 에이클스 헤지펀드협회 이사는 “헤지펀드와 은행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게프너 변호사는 “새로 도입된 금융규제법의 적용으로 은행들은 상대적으로 규제를 덜 받는 사업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입이 무거워야 하는 헤지펀드 업계에서 앤서니 스카라무치 자산관리회사(Skybrdige Capital) 대표는 예외적인 인물이다. 40대 중반의 이탈리아 이민자 2세인 뉴요커 스카라무치는 스포트라이트 받는 것을 좋아한다. 라스베이거스 헤지펀드 업계의 연례 콘퍼런스를 주최해온 그는 헤지펀드 업계의 경험담을 집대성한 <굿바이 고든 게코>(Goodbye Gordon Gekko)라는 책을 최근 출간했다. 책 제목의 ‘고든 게코’는 피도 눈물도 없는 ‘기업사냥꾼’을 다룬 1980년대 할리우드의 히트작 <월스트리트>에 등장하는 업계의 큰손을 가리킨다.
   
홍콩상하이은행(HSBC)의 헤지펀드 매니저와 자산관리 매니저가 자선 이벤트로 열린 권투 경기에서 주먹을 맞댄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월스트리트>가 개봉된 1987년 스카라무치는 이 영화를 계기로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내가 그 영화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했던 셈”이라고 농담을 한다. 하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헤지펀드가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비난의 표적이 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 헤지펀드는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역설한다. 다른 금융기관들은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에 지원을 머뭇거린 반면, 헤지펀드는 과감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카라무치는 자신을 헤지펀드 업계에서 금융위기를 무사히 극복한 행운아라고 소개했다. 금융위기라는 큰 불을 끈 뒤 그의 야망은 커졌다. 그는 2010년 초 금융위기의 여파로 비틀거리는 미국 은행 시티그룹의 헤지펀드 사업부문을 40억달러에 인수했다. 헤지펀드에 투자하는 스카라무치 같은 사람을 업계에선 ‘시더’(Seeder)라고 부른다. 그들은 헤지펀드를 설립하려는 유능한 펀드 매니저와 투자자를 매칭하고 투자금 유치를 지원해주며, 그 대가로 신규 헤지펀드의 일정 지분을 받는다. 또 신규 펀드가 성공을 거두면 추가로 일정 수수료를 받는다. 스카라무치는 “헤지펀드의 전성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고 말한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은 듯하다. 전세계 인구와 노년층의 증가로 새로운 투자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민간 부자들의 투기상품이던 헤지펀드는 연기금의 투자대상으로 탈바꿈했다. 신흥국들의 경제성장으로 헤지펀드 투자상품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할 것이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 출신으로 헤지펀드 독립운용업체(HF Fund Services) 창업자인 션 플린은 “전통적인 투자 형태와 비교해 헤지펀드가 지금까지 운용한 투자액은 여전히 소규모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헤지펀드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설명한다. 월가의 한 헤지펀드 전문 매니저는 “운용 금액만 최소 500억달러인 독립 헤지펀드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500억달러는 벨라루스의 GNP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헤지펀드가 투자자들의 인정만 받게 된 것은 아니다. 미국 전체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 연방준비은행에서도 헤지펀드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는 듣기 힘들다. 심지어 미국의 정계와 학계에서도 헤지펀드에 대해 찬양 일색이다. 미 하원 공청회에서 월가 금융인 줄소환으로 유명해진 하원의원 헨리 왁스먼은 최근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금융위기 당시 모범적인 역할을 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보수적인 싱크탱크 ‘외교협회’의 세바스티안 맬러비 금융연구원은 금융상품의 리스크 부담에는 은행보다는 헤지펀드가 적합하며, 은행과 달리 헤지펀드는 파산하더라도 전체 금융 시스템을 파국으로 몰아넣을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정부 규제기관은 헤지펀드를 장려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했다.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의 파산을 아직 생생히 기억하는 마당에, 헤지펀드의 실책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자는 것은 무책임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노벨상 수상자 2명이 공동 설립한 LTCM은 러시아 금융위기가 불어닥친 1998년에 파산했다. LTCM에 대출해준 은행들도 벼랑 끝에 내몰렸다. 금융기관의 줄도산은 금융위기 동안 실제로 수없이 목도한 광경이 아니었던가. 월가가 금융 시스템에 수십억달러를 ‘펌프질’하며 공동 대응에 나선 뒤에야 전세계가 금융위기로 공멸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정·관계에 막강한 글로벌 네트워크
금융위기 이후 몸집이 불어난 헤지펀드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더욱 공고해졌다. LTCM에서 재직한 경력이 있는 데일 로젠탈 일리노이스대학 금융학 교수는 “헤지펀드를 국제적으로 규제하고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로젠탈 교수는 그럴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교통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자가용 운전을 막는 것과 같다. 그 자체는 좋은 생각이지만, 누구나 자신은 예외가 되기를 원한다.”
전세계 금융 중심지인 뉴욕과 런던의 치열한 경쟁으로 헤지펀드는 톡톡히 덕을 보고 있다. 그 사이에 아시아도 국제 금융 중심지 경쟁에 가세했다. 헤지펀드를 거부하는 금융 중심지는 이제 전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싱가포르는 최근 헤지펀드 규제를 완화했다. 미국과 영국은 헤지펀드 규제에는 찬성하지만, 이로 인해 자본과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반대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전세계에서 헤지펀드의 수혜를 가장 많이 보는 케이맨 제도 역시 같은 입장이다. 케이맨 제도 통화 당국의 본부는 식민지 시대 건축양식을 본떠 지은 베이비 블루 건물에 있다. 그 건물에는 미소짓는 엘리자베스 여왕 2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케이맨 제도 통화 당국의 랭스톤 시블리스 부총재는 조세회피와 돈세탁을 눈감아주고 있다는 끊임없는 비난을 변론하는 데 이골이 나 있는 듯했다.
시블리스 부총재는 부드러운 카리브해식 영어로 이를 근거 없는 비난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통화 당국의 관련 직원이 36명에 불과한데 수십억달러를 운용하는 헤지펀드 수천 개를 감독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단정하게 정리된 흰색 턱수염을 말없이 문질렀다. 이윽고 그는 적합한 대답을 찾아낸 듯 “통화 당국과 헤지펀드 간에 정기적으로 정보를 교류하고 있으며, 빈틈없는 전자신고 체계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금융위기의 재발을 막는 것이다. 케이맨 제도야말로 금융업으로 먹고사는 곳이 아닌가.”
케이맨 제도가 ‘헤지펀드 수도’로서의 아성을 지키고 싶어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케이맨 제도의 유명 레스토랑(Calypso Grill)의 저녁 메뉴는 카리브해산 가재 요리와 샴페인이었다. 레스토랑에는 빈 테이블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가득 차 있었다. 2년 전 금융위기로 암울했던 시기에 대한 기억은 카리브해의 미풍에 이미 씻겨 날아가버린 지 오래인 듯했다.
ⓒ Die Zeit·번역 김태영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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