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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인플레이션을 기다리며…
[FINANCE] 발목 잡힌 경제성장
[131호] 2021년 03월 01일 (월) 윤석천 maporiver@gmail.com

윤석천 경제평론가

   
▲ 미국 시카고의 교회에서 나이 든 사람들이 코로나19 백신을 맞고 있다. 세계적으로 백신 접종이 늘어나면서 코로나19 확진자 증가세는 약간 수그러들고 있다. REUTERS

21세기 들어 인플레이션은 역사의 유물이 됐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인플레이션이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하던 이들이 있었다.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한 각국의 유동성 공급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통화량과 물가는 비례한다’는 상식에 기반한 전망이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없었다.
이제 다시 인플레이션을 주장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실제 국제 농산물 가격은 2014년 이후 최고 수준이고 석유 가격도 최근 반등했다. 구리 등 산업재를 포함한 상품시장 전체 가격은 코로나19 사태의 충격이 본격화한 2020년 4월 저점을 딛고 오름세를 보인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 심해져 생산자물가를 밀어올릴 가능성이 있다.

바이러스 진정 국면
코로나19 확산세가 잠잠해지면 그동안 억눌렸던 수요가 폭발해 가격 오름세가 본격화할 수 있다. 게다가 주요국의 천문학적인 재정 확대 정책과 초저금리가 2021년에도 이어지며 이 추세를 더욱 가속할지 모른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거다.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다. 과연 이번엔 이 상식이 들어맞을까?
인플레이션 주장자들은 현재 인플레이션을 억압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따른 침체를 꼽는다. 바이러스 확산이 잠잠해지고 경기회복이 가시화하면 침체가 끝나고 인플레이션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럴 수 있을까?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에선 백신 접종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초기 혼란을 극복하고 문제점을 수정해가며 접종을 진행하고 있다. 2021년 2월4일 기준, 전세계의 코로나19 백신 접종자 수가 확진자 누계를 넘어섰다. 임상이 끝나면서 새로운 백신이 속속 사용 승인을 받은 것도 호재다. 그 덕분에 주요국의 확진자, 입원환자, 중증환자 수는 2021년 감소세로 돌아섰다.
이 정도면 충분해 보이기도 한다. 실제 겨울철 확산은 고비를 넘기고 있다. 문제는 변이 바이러스다. 확산세를 잡지 못하면 바이러스는 언제든 다시 퍼질 수 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현재 확진자 수는 여전히 2020년 여름 정점에 이르렀을 때보다 많다. 상황은 분명 좋아졌지만 인류는 여전히 바이러스에 포위돼 있다.
바이러스 확산세가 늦춰진다 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고 보장할 수 없다. 상황이 좋아져도 우리 대부분은 여전히 조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포심이 엷어지면서 타격을 가장 많이 받은 식당, 호텔, 항공 등 서비스업은 회복세를 약간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의 수요가 코로나19 이전만큼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연수요(과거에 실현되지 못하고 미래로 이연되는 수요)가 폭발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로 참았던 소비가 일시적으로 늘어날 수는 있다. 하지만 기대만큼 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큰 위기나 침체를 겪었던 사람들은 상황이 좋아져도 소비를 크게 늘리지 않는다. 외려 근검절약하는 태도를 가지는 게 일반적이다. 저축의 필요성을 절감했기에 소비를 쉽게 늘리지 못한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줄어도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을 거라고 보는 이유다.

유례없는 재정 확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요인은 또 있다. 2021년 2월5일(현지시각) 미국 상원은 1조9천억달러(약 2100조원)에 이르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경기부양안을 통과시켰다. 하원 통과 가능성도 크다. 주요국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만 해도 20조원 이상 추가 재난지원금을 논의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돈이 뿌려지고 있다. 이렇게 풀린 돈은 서민의 호주머니를 일시적이나마 든든하게 해줄 것이다. 일부에선 재정 확대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전소득 발생으로 수요가 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듯하다. 하지만 놓친 게 있다.
공공과 민간 부채 모두 임계점을 넘고 있다. 이렇게 폭증한 부채는 경제성장을 억누른다. 재정 확대로 아무리 많은 돈이 풀려도 그것이 부채라면 성장을 제약한다. 저성장은 필연적으로 돈의 유통 속도를 줄인다. 유통 속도가 빨라져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유지된다.
그러데 그 속도가 느려지니 통화 공급이 늘어봐야 인플레이션 유발에 한계가 있다. 국내총생산(GDP)은 돈의 유통 속도에 광의통화(M2)를 곱한 수치다. 광의통화를 늘려봐야 유통 속도가 하락하면 GDP는 크게 늘지 않는다. 물론 저성장 국면이라도 특정 부문에서 인플레이션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속되기는 매우 힘들다.
다른 생산요소와 마찬가지로 부채도 지나치게 이용되면 한계수익생산성이 하락한다. 단위 생산성을 높이려면 더 많은 부채 투입이 필요하다. 당국 노력에도 저성장이 지속되는 이유다. 연방준비제도(연준) 등 주요국 중앙은행은 경제를 자극하려 애쓰고 있다. 방식은 기존과 같다. 이미 많은 부채에 더 많은 부채를 더하는 것이다.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작동하는 곳은 자산시장이다. 주식, 주택 등 자산 가격을 올리기는 하지만 인플레이션 유발에는 실패하고 있다. 돈의 유통 속도를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계속 떨어지는 추세다. 팬데믹 이후 그 하락 속도는 더 빨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천문학적인 재정 확대를 한다 해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보장이 없다. 특히 재정 확대로 풀린 대부분의 돈은 재난지원금 성격을 띤다.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투자’에 쓰이지 않는다. 이전소득 증가가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단기적이다. 일시적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수는 있지만 지속될 수 없는 이유다.

   
▲ 2021년 2월1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백악관에서 양당 상원 의원들과 경기 활성화를 위한 사회기반시설 투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REUTERS

공급망 재편 영향
인플레이션은 생각지 못한 데서 올 수 있다. 30년 동안 세계를 감싼 디플레이션 위협의 한 요인은 중국이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면서 거의 모든 세계 기업은 중국을 아웃소싱 전진기지로 삼아 제품을 생산했다. 생산 단가가 낮은, 싼 중국산 제품이 세계에 뿌려졌다. 중국 제조업의 성장과 세계 물가 하락 압박은 비례했다.
현재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기존 글로벌 공급망이 해체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본격화하며 중국 압박을 가시화했기 때문이다. 2년 이상 미국은 중국 기술기업 화웨이를 망가뜨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중국 기업이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중국을 아웃소싱 기지로 선택했던 기업들이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기존 공급망이 가격을 중시했다면 현재는 운송과 배송에 대한 확신이 핵심이 되고 있다. 비록 조금 비싸더라도 확실한 공급이 중시되는 것이다. 극적인 패러다임 전환이다. 코로나19 유행이 여기에 불을 붙였다. 원활한 운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 부품의 부족도 이런 상황을 증폭했다. 각국은 되도록 자국에서 생산하려 애쓴다. 트럼프가 불붙인 ‘생산 민족주의’는 기술 발달과 함께 가속화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그것을 지속하려 한다. 자국 안에서 생산해 공급을 해결하려는 생산 민족주의적 경향이 갈수록 심해진다.
생산성 충격은 불가피하다. 각국의 △환경 등 규제 강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등장 △안보 중요성 강조 △생산 민족주의 등은 생산원가를 높이는 요인이 된다. 분명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건강한 수요가 살아나야 가능한 시나리오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려면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변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아내야 한다. 당분간 거리두기나 자영업 영업 제한 등이 불가피하다. 글로벌 집단면역도 필요하다. 특정 국가가 코로나19 청정국이라 해도 국경을 닫고 살 수는 없다. 수십억 명이 백신을 맞아야 끝난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전쟁 종식까지 몇 년이 걸릴 것이다. 여러 긍정적 요소가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수는 있지만 올해는 아닐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해도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우린 인플레이션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사상 유례없는 저금리가 계속되고 돈은 미친 듯 공급되고 있다. 이 정도면 인플레이션이 생겼어야 한다. 사라진 인플레이션 시대를 만들어낸 중앙은행에 박수를 보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적정한 인플레이션은 경제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신호다. 돈이 돌고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인플레이션이 사라졌다는 건 경제가 병들었다는 징후일 수 있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신화처럼 믿는 ‘신용팽창’ 경제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뜻한다.
수요가 만들어내는 건강한 인플레이션은 먼 과거의 일이 됐다. 인플레이션을 기다리는 건 ‘고도’를 기다리는 일이 돼버렸다. 이제 인플레이션은 ‘전망’이 아닌 ‘희망’의 영역이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 윤석천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금융시장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금융 관련 책들을 썼으며, 특히 외환과 관련해 많은 강의를 해왔다. <한겨레> ‘세상읽기’를 연재했으며, 현재 팍스TV <이슈포커스>에 출연하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를 그리워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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