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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이 전 국민에게 돈을 쏜다면?
[FINANCE] 달라지는 미국 연준
[127호] 2020년 11월 01일 (일) 윤석천 maporiver@gmail.com

윤석천 경제평론가

   
▲ 2019년 7월 영국 런던에서 로레타 메스터 미국 클리블랜드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연설하고 있다. 그는 최근 연준의 새로운 발상을 암시했다. REUTERS

“부자를 돕는 건 투자이고 가난한 자를 돕는 건 비용인가?” 브라질 대통령이었던 룰라가 한 유명한 말이다. 그만큼 부자가 아닌 서민을 위해 돈을 쓰는 게 금기시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코로나19 위기는 이런 금단의 선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 각국이 서민을 위해 돈을 풀고 있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초유의 재난 상황에 정치인과 관료의 생각이 바뀌고 있다. 물론 아직은 미약하다. 부자를 돕는 건 투자라는 명분으로 두 팔을 걷어붙이지만 서민을 돕는 건 여전히 시혜적 성격 혹은 비용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통화 발행이 비교적 자유로운 기축통화국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변화의 바람이 부는 건 분명하다.

변화의 조짐
2020년 9월20일, 로레타 메스터 클리브랜드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는 시카고 연은이 주최한 시카고결제시스템 20주년 심포지엄에서 의미 있는 연설을 했다. 미국의 수십 년 된 낡고 느린 결제시스템의 현대화가 주제였다. 연설은 대부분 결제시스템의 현대화가 갖는 의미와 작동 방식에 할애됐다.
연설 말미에 의외의 발언이 있었다. 연방준비제도(연준)가 계좌가 없는 사람을 포함해 모든 미국인에게 돈을 직접, 즉시 줄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신중하다. 아직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았고,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만만치 않다고 강조했다. 새 시스템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위험을 연구·측정하며, 무엇보다 연준이 디지털통화 채택을 결정했다는 신호는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연준이 이런 작업을 물밑에서 진행한다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8월1일, 전직 연준 관리 2명이 <블룸버그통신>과 인터뷰했다. 뉴욕 연은 시장그룹을 이끌었던 시몬 포터와 연준 이사회 이코노미스트였던 줄리아 코로나도였다. 이들은 인터뷰에서 연준이 직접 모든 미국인과 영주권자에게 돈을 보내는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금액은 국내총생산(GDP)의 일정 비율로 정하고, 그 액수를 동일하게 수령자 수로 나눈다. 애플리케이션(앱)에서도 이용 가능해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도 이 돈을 받아 소비할 수 있다. 거추장스러운 과정 없이 즉시 쓸 수 있게 한다. 이 방식이 거시경제적 관점에서 소비지출과 소비자 자신감을 높이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이들은 강조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은 실시간 소액결제시스템 페드나우(FedNow)를 구축하고 있다. 연준 이사회 기술위원회는 연준의 스태프, 소프트웨어 개발자와 머리를 맞댔다. 보스턴 연은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뉴욕 연은은 국제결제은행과 파트너십을 맺고 디지털달러가 포함된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이 새로운 시스템은 2023~2024년에 선보일 예정이다.
중앙은행이 새삼스레 소액결제시스템을 만드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 시스템이 가동되면 모든 미국인에게 즉시, 직접 돈을 보낼 수 있다. 연준은 특정한 액수의 달러를 발행해 보낸다. 이 돈을 기존 은행 계좌로 이체하거나 앱 등을 통해 쓸 수 있다. 이런 연준의 움직임을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모든 미국인에게 그냥 돈을 준다’는 개념을 연준의 고위직이 언급한 것은 의미 있다.
지금도 공짜 돈을 주고는 있다. 하지만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현재는 정부가 돈을 빌려 나눠 주는 형식이다. 새 방식은 연준이 ‘직접’ 준다는 것이다. 이 방식을 현실화하면 분명 혁신이다. 적어도 보수 색채가 짙은 중앙은행 내부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것 자체가 그렇다.

   
▲ 2020년 10월 코로나19로 손님이 크게 줄어 문을 닫은 미국 캔자스주 아빌레네 브룩빌 호텔 주인이 착잡한 표정으로 텅 빈 호텔 레스토랑을 둘러보고 있다. REUTERS

혁신의 배경
돈을 푸는 연준의 양적완화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한 상황이다. 몇조달러에 이르는 자산 구매에도 그 천문학적 돈은 다수 가계에 이득을 주지 못했다. 미국 경제에서 소비자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이른다. 미국 경제가 살아나려면 소비가 살아나야 한다. 하지만 유례없는 돈이 뿌려졌음에도 소비 주체인 다수 가계는 그 돈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소비자가격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못했다. 자산가격 인플레이션만 높였다. 결국 경기가 비교적 호황일 때도 연준은 금리를 충분히 올릴 수 없었다. 장기채와 단기채의 수익률 곡선이 서로 비슷한 상황만 연출된다. 호황 징후인, 장기채 수익률이 단기채 수익률보다 빠르게 상승하는 건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잃어버린 인플레이션 시대가 지속된다.
연준은 금리정책의 가용성을 잃고 말았다. 경기침체가 와도 쓸 수 있는 통화정책이 고갈된 상황이다. 실물경제를 살리고 소비자 수요를 창출하려면 금리를 낮춰야 하는데 제로금리 상황에서 금리 인하 폭 자체가 거의 사라져버렸다. 이제 통화정책에서 남은 대안은 ‘마이너스금리’밖에 없다. 그 자체가 이미 통화정책 실패를 뜻한다. 현재 정책금리는 인플레이션율보다 낮다. 실질금리가 이미 마이너스인 상황이다. 연준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연준이 마이너스금리를 채택하는 대신 지금까지 해왔던 것은 대규모로 자산을 매입하는 것이었다. 국채, 주택담보부증권에 이어 이제는 정크본드를 포함한 회사채, 채권 상장지수펀드(ETF), 정크본드 ETF를 매입하고 있다. 전방위적 자산 매입이다. 목적은 이들 자산 가격을 올리거나 유지하기 위해서다. 회사채와 채권 ETF를 사들여 기업 도산을 막고 국채와 주택담보부증권을 사 정부와 주택매입자의 신용 위험을 낮춘다. 채권가격이 오른다는 얘기는 해당 금리가 하락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장기금리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사상 초유의 실업 위기에도 주택과 땅 가격을 올리고 주식시장 붐을 만들어낸다. 무차별로 부채를 확대한 결과물이다.

사라진 낙수효과
자산가격을 올리는 건 ‘부의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의 효과는 낙수효과가 있을 때 의미 있다. 낙수효과는 거의 없었다. 돈은 부자들 주머니 안에 머물렀다. 중앙은행의 자산 구매는 자산 보유자를 구제하기 위해 계획됐다. 자산 보유자, 즉 최고 부자들이 그 혜택을 온전히 받았다. 이들은 더욱 부유해졌다. 억만장자들은 자산 구매 광풍 속에 10억달러 이상 이득을 얻었다.
반면 하위 가계 60%는 상대적으로 적은 이득을 얻었거나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했다. 구매 대상이 되는 자산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낮은 장기금리 혜택도 입을 수 없었다. 신용이 낮으니 돈을 빌리는 데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고, 빌리더라도 높은 금리를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철저히 자산시장 경주에서 소외됐다. 결국 이미 끔찍한 상황이었던 부의 불평등은 중앙은행의 인위적 수단으로 더 커졌다.
중앙은행은 이런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소한 부의 불평등을 키웠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연준 등이 행한 자산 구매는 경제와 사회, 경제 정신을 파괴했다. 경제사회적으로 불평등을 심화해 성장을 지체시켰고 사회불안을 야기했다. 무엇보다 경제주체를 온실 속 화초로 만들었다. 중앙은행이 개입하지 않으면 무너질 수많은 좀비기업을 양산했고, 어려움 속에서도 기회를 찾으려는 기업가정신 쇠퇴를 불러왔다. 이는 어쩌면 중앙은행이 행한 최악의 정책일 수 있다.
미국의 성인 인구는 2억1천만 명이다. 만약 연준이 3월 이후 시장에 푼 3조달러(약 3400조원)를 시장이 아닌 이들에게 줬다면 성인 1명당 1만4천달러, 2인 가구라면 약 2만8천달러를 받게 된다. 보편 지급이기 때문에 누구나 받는다. 당연히 부유한 사람은 이 돈을 거의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위 60~80% 가구는 대부분 혹은 전부를 쓰게 될 것이다. 이는 상품과 서비스의 수요를 만들어내고 소비자가격을 밀어 올릴 것이다.
연준의 새로운 발상은 자산 구매 프로그램의 대안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자산 구매나 마이너스금리보다는 덜 부정적이다. 소비자가 직접 돈을 받으면 침체의 깊이와 기간을 제한할 수 있다. 실질 인플레이션이 생김으로써 마이너스금리를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건강한 금리시장을 만들 수 있다. 장단기 금리차가 벌어지고, 경제가 호황일 때 단기금리는 오르게 될 것이다. 이는 침체기에 더 적극적으로 금리를 내리는 통화정책의 가용성을 확보해줄 수 있다.
자산 구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소비자에게 직접 돈을 보내는 정책으로 대체하면 연준이 그토록 바라던 건강한 인플레이션을 만들어낼 수 있다. 설사 소비자가 직업을 잃더라도 수요 기반이 파괴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용이 들고 위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산 구매도 마찬가지다. 새 정책에선 최소한 특정 소수가 아닌 모든 국민이 동일한 혜택을 본다. 재난은 특단의 대책을 요구한다. 아니, 자본주의 자체가 혁신적 사고를 필요로 한다. 중앙은행과 정치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야 할 때다.

* 윤석천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금융시장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금융 관련 책들을 썼으며, 특히 외환과 관련해 많은 강의를 해왔다. <한겨레> ‘세상읽기’를 연재했으며, 현재 팍스TV <이슈포커스>에 출연하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를 그리워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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