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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게임·브래지어 창의성 ‘반짝’
[PEOPLE] 경제를 바꾼 세기의 여성
[126호] 2020년 10월 01일 (목) 크리스티앙 샤바뇌 economyinsight@hani.co.kr

크리스티앙 샤바뇌 Christian Chavagneux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기자

   
▲ 1922년 프랑스 신문사 <뫼리스>가 찍은 잔 부비예. 위키피디아

노동운동과 함께한
잔 부비예(Jeanne Bouvier)

산업혁명은 노동자에게 가혹했다. 남성보다 임금이 적고 대우가 안 좋았던 여성 노동자에게는 더 그랬다. 19세기 말 노조운동이 생겨나고 몇몇 여성도 참여했다. 잔 부비예는 그중 하나였다.
잔은 1868년 프랑스 동남부 드롬 지역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농장일을 도우며 자랐다. 첫 영성체 준비를 위해 10살 때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공부는 그때 배운 것이 전부였다. 술통 제조공인 아버지는 포도나무를 죽이는 진디병(포도나무뿌리진디병)이 유행하면서 벌이가 급격히 줄었다.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돈이 필요했다.
11살 잔이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누에고치 실 뽑는 일을 했다. 1840년부터 아동은 하루 8시간 넘게 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자리를 얻으려면 고용주가 제시하는 조건에 동의해야 했다. 1시간씩 두 번 식사 시간을 빼고 아침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했다. 그래도 돈은 충분하지 않았다. 밤에 삯바느질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를 떠났다. 잔을 데리고 파리에서 같이 가정부로 일했다.
잔은 이집 저집을 돌았다. 한번은 철학·경제학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의 딸 집에서 일하다 빅토르 위고를 보기도 했다. 가정부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공장으로 돌아갔다. 그 뒤 모자상점에서 일하다 바느질을 다시 시작했다. 잔의 손님인 한 부인과 이야기하다 당시 막 떠오르던 페미니즘 사상을 알게 됐다. 이 부인은 잔에게 노조 가입을 권했다.

노동조합원·페미니스트
그렇게 노동총연맹(CGT) 소속 여성운동가의 삶이 시작됐다. 잔은 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위원회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귀갓길에는 <인터내셔널가>를 흥얼거렸다. 이제 잔에게 노조는 배움의 터전이었다. 여러 재봉실에서 일하며 바느질 솜씨도 좋아졌다. 하지만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일터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럴수록 잔은 더 열성적으로 노조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그런 여성은 드물었다. 잔은 ‘1910년 노동자 연금법’에 찬성했다. 이 법을 알맹이 빠진 개혁이라고 치부하던 CGT와 달랐다. 작은 한 걸음이지만, 법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전국여성노동연맹은 국제여성노동위원회를 소집했다.
잔은 1919년 12월 대표로 위원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국제여성노동기구 창설이 결정됐다. 잔은 부총장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됐다. 이후 잔은 여성노동자가 출산 전후 6주씩 휴가 낼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기구 회원에게 적극 알렸다. 프랑스에서는 가내(집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싸웠다.
잔과 CGT 지도부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노조 산하 여성운동부 설립을 문제로 마찰이 있었다. 지도부는 부서 독립성이 강해질 것을 우려해 설립을 반대했다. 여기에 잔의 ‘모독죄’까지 더해졌다. CGT 사무총장 레옹 주오가 조합원 돈을 정부와의 여행 경비로 쓴 사실을 잔은 묻어둘 수 없었다. 노조에 횡령 사실을 알렸다. 서서히 문밖으로 밀려나던 잔은 1925년 스스로 노조를 나왔다.
프랑스 국립공예원의 조지 르나르 교수가 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직업공공백과전서>를 편찬하는데 ‘내의와 내의 여직공’ 부분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한 시골 출신 여공은 그렇게 1928년 국가적 자료를 남겼다. 잔이 쓴 첫 책이었다. 그 뒤 여성 역사를 다룬 책만 4권 더 냈다. 책은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양로원에서 18년을 외롭게 보내던 잔은 1964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 1997년 개봉한 클로드 베리 감독의 영화 <뤼시 오브라크> 포스터. 알로시네

영원한 레지스탕스
뤼시 오브라크(Lucie Aubrac)

프랑스 레지스탕스운동 80주년인 2020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여성 레지스탕스다. 대부분이 ‘부수적’ 임무를 맡긴 했어도 여성은 레지스탕스운동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모임을 계획하고, 정보를 전달했다. 레지스탕스운동을 전쟁 전 시작된 정치적 노동자 해방전략의 연장선으로 보는 여성도 있었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은 레지스탕스 여성 지도자 가운데 뤼시 오브라크가 있었다.
뤼시는 역사·지리교육학을 공부했다. 프랑스 청년공산주의자운동(JC) 일원으로 활동하다, 1939년 12월 레몽 사뮈엘과 결혼했다. 1940월 6월 레몽이 독일군에게 포로로 붙잡히자 탈주 계획을 세웠다. 탈주에 성공한 레몽과 뤼시는 서남부 도시 리옹에 정착해 레지스탕스단체 리베라시옹쉬드를 조직했다.
레몽은 오브라크라는 가명으로 비밀군에서 활동했다. 비밀군은 당시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을 상대로 기습 공격을 벌이던 단체였다. 1943년 3월 다시 체포된 레몽은 밀수업자로 신분을 속였다. 밀수는 반체제 운동보다 죄목이 가벼웠다. 그래도 투옥은 피할 수 없었다. 뤼시는 화려한 말솜씨로 검사에게 겁을 줘 단번에 남편의 출소 허가를 받아냈다. 정보요원이자 행동대원 뤼시는 레지스탕스운동 핵심 인물이 됐다.

끝나지 않은 투쟁
1943년 6월21일 리옹시 북부 칼리르 지역에서 레몽은 레지스탕스 지휘자 장 물랭 등과 다시 체포됐다. 밀고가 있었다. 모진 고문을 견디며 비밀을 지킨 물랭은 끝내 목숨을 잃었다. 레몽도 나치 독일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손을 피해갈 수 없었다. 뤼시는 레몽이 이송될 때를 노려 레몽을 탈주시키는 데 성공했다. 1944년 2월 둘은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8월26일 파리 해방 이후 샹젤리제 거리를 행렬하는 샤를 드골 옆에는 뤼시가 있었다.
뤼시의 투쟁은 계속됐다. 그는 세계평화주의자, 반식민주의자, 여권신장운동가, 레지스탕스운동 기억 전달자로 활동했다. 뤼시의 삶은 여러 영화로 제작됐다.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그림자 군단>(1969)이 대표적이다. 영화에서 뤼시를 본뜬 인물인 마틸드는 시몬 시뇨레가 연기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시몬의 역사지리학 선생님이 놀랍게도 뤼시였다.

   
▲ 엘리자베스 매기가 만든 <지주 게임>. 위키미디어

모노폴리 게임 창시자
엘리자베스 매기(Elizabeth Magie)

<모노폴리>는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은 미국인 찰스 대로가 1935년 발명한 보드게임이라는 이야기는 <모노폴리> 판권을 가진 회사 파커브러더스가 지어낸 것이다. <모노폴리>의 탄생을 둘러싼 진실은 긴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밝혀졌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랠프 앤스패크 교수가 1974년 <안티모노폴리>라는 게임을 출시했다. 부의 독점을 비판하는 게임이었다. 파커브러더스는 앤스패크 교수에게 상표권 침해라며 게임 이름 변경을 요구했다. 앤스패크 교수는 거절했다. 끈질긴 법적 공방이 시작됐다. 앤스패크 교수는 <모노폴리>가 탄생한 배경을 추적했다. 자신이 만든 게임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게임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변론했다.
앤스패크 교수가 말한 게임은 엘리자베스 매기라는 여성이 정치적 소망을 담아 만든 것이었다. 매기는 미국의 석학 헨리 조지가 대표 저서 <진보와 빈곤>에서 다룬 사상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 했다. 그런 매기는 20세기 초 <지주 게임>을 만들었다. 땅을 사고 소유한 부에 따라 세금을 내면서 독점을 막는 게임이었다. 1904년 매기는 <지주 게임> 특허권을 얻은 뒤 시장에 내놓았다.
이후 기가 막힌 세기적 게임 도용 사건이 아든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됐다. 아든은 퀘이커 교도들이 미국 동부 델라웨어주 애틀랜틱시티에 세운 ‘이상 공동체’였다. 주민은 게임판을 만들고 놀이 이름을 <모노폴리>로 바꿔 부르며 규칙을 발전시켰다. 게임은 여러 손을 거쳐 필라델피아에도 알려졌다. 한 부부가 필라델피아 친구에게 게임을 알려줬는데, 그 친구가 대로 가족이었다.
찰스 대로는 화가를 시켜 만든 새 게임판을 넣어 게임을 팔더니, 나중에는 파커브러더스에 판권을 팔아넘겼다. 몇 주 뒤 1935년 12월 파커브러더스는 <모노폴리> 특허권을 따냈다. 그러고는 단돈 500달러에 <지주 게임> 특허권을 샀다. 회사는 <모노폴리> 원작자가 누구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앤스패크 교수와 파커브러더스의 상표권 분쟁에서 미국 대법원은 결국 앤스패크 교수 편을 들어줬다. 빚더미에 앉은 이혼남이던 앤스패크 교수는 엄청난 돈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법정에서 싸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매기가 게임으로 전하려던 생각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었다. ‘안티모노폴리’는 지금도 있다.

   
▲ 멜리타 벤츠가 개발한 커피여과지. 위키피디아

사회적 경영자
멜리타 벤츠(Melitta Bentz)

모닝커피를 내리려 초록 바탕에 빨간 띠를 두른 상자에서 여과지를 꺼낸다. 1908년 6월 독일 드레스덴 출신 멜리타 벤츠가 특허 낸 커피여과지다. 멜리타는 신물이 났다. 커피찌꺼기가 잔 바닥에 가라앉아 맛을 해치고 커피를 우린 병에 들러붙어 닦기 힘들었다.
밀리타는 금속 용기 바닥에 못으로 구멍을 낸 뒤 아들 책가방에서 종이를 찾아 끼웠다. 원두를 갈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쓴맛이 덜하고 부드러웠다. 커피를 내린 다음 종이만 버리면 돼 훨씬 깔끔했다. 여러 친구에게 같은 방식으로 커피를 내려주고 확신을 가졌다. 멜리타는 특허 출원 6개월 뒤 회사를 차렸다.
아버지는 서점, 할아버지는 맥주양조장을 운영했다. 사업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태어날 때 이름은 아멜리 멜리타 립셔였고, 후고 벤츠와 결혼했다. 1909년 독일 라이프치히 산업박람회가 끝나고 주문이 크게 늘어 온 가족이 달라붙어 여과지를 만들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22년부터 상자에 빨강과 초록을 대비해 유사 상품과 차별화했다.
멜리타는 사회적 경영자였다. 일주일에 5일로 근무를 제한하고, 3주 유급휴가와 크리스마스 상여금 제도를 도입했다. 지금 멜리타 커피여과지는 세계에서 매년 1천억 장씩 팔린다.

   
▲ 1960년대 메이든폼의 속옷 광고. 스미소니언박물관

브래지어 사업가
이다 로젠탈(Ida Rosenthal)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 일곱 자식을 둔 집안 맏딸이라면 일찍부터 돈 버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다 카가노비치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는 이다를 양재 수습생으로 폴란드에 보냈다. 이다는 기술을 배우다 윌리엄 로젠탈을 만나 결혼했다.
1906년 둘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윌리엄은 결핵에 걸려 요양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다는 영어를 할 줄 몰랐지만, 패션잡지를 보는 안목이 있었다. 이다는 원피스를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 가게를 운영하던 에니드 비셋은 독특한 원피스를 입은 이다와 함께 사업을 하기로 했다.
1914년 장차 유명 작가가 될 학생 커레스 크로즈비는 코르셋에 불만이 많았다. 코르셋 틀이 새로 산 원피스에서 삐져나와 옷매무새를 망쳤다. 커레스는 손수건에 어깨끈을 달아놓고 등 뒤로 고리를 걸어 가슴을 감싸게 했다. 지금의 브래지어와 비슷한 속옷을 만든 것이다. 커레스 발명품은 작은 가슴에만 어울렸다. 사람들은 이다와 에니드를 찾아왔다. 다양한 크기에 맞는 속옷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처음 만든 제품은 원피스에 부착된 형태였다. 손님들은 다시 가게를 찾았다. 원피스 없이 착용할 수 있는 속옷이 없을까.
그즈음 윌리엄의 병이 나았다. 이제 셋이 업무를 나눠 맡았다. 에니드는 판매, 이다는 영업과 재무관리, 윌리엄은 디자인을 담당했다.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윌리엄은 임신, 모유 수유 등 브래지어 사용 목적에 따라 여러 디자인을 만들었다. 브래지어 크기를 에이(A)컵, 비(B)컵, 시(C)컵 등으로 나눠 표준화한 사람도 윌리엄이었다.
1930년 대공황 이후 이다와 윌리엄은 대표 상품인 브래지어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세계적인 속옷 브랜드 메이든폼은 그렇게 탄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두 가지 변화가 맞물려 매출이 급증했다. 몸매가 풍만한 여배우 인기가 높아진데다, 광고 기술이 좋아지면서 대량 판매가 가능해졌다. 메이든폼은 광고판에 속옷을 입힌 모델을 내세운 첫 회사였다.

ⓒ Alternatives Economiques 2020년 7월호(제403호)
Ces femmes qui ont transformé l’économie et ont été oubliées
번역 최혜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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