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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코와 키코
[영화로 보는 경제]
[9호] 2011년 01월 01일 (토) 이재성 San@hani.co.kr

이재성 <한겨레> 경제부 기자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는 가장 적확한 표현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아니라,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미국판 인클로저 현상이 벌어졌던 오클라호마의 한 농촌. 대농장주와 은행은 트랙터를 앞세워 소작농들을 고향에서 몰아냈다. 살던 집도 무참히 짓밟았다. 트랙터를 모는 윌리 필리는 같은 마을에 사는 청년이다. 백골단이 우리의 형이자 동생, 이웃이었듯. 일당 3달러를 버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 <분노의 포도>의 한 장면
“제가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저도 어쩔 수 없다고요. 그렇게 안 하면 목이 잘리니까.” 쫓겨나게 된 농부가 묻는다. “그래? 자네한테 명령을 내린 놈이 누구야? 그놈을 잡아야겠어. 그놈을 죽여야겠어.” “아저씨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그 사람도 은행에서 지시를 받은 거예요. 은행이 그 사람한테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면 그 사람이 쫓겨날 거라고 말했단 말이에요.” “그럼 은행 총재가 있을 거 아냐. 이사회도 있을 거고. 총알을 가득 채워서 은행으로 가야겠다.” “누가 그러는데 은행은 동부에서 지시를 받고 있대요. ‘땅에서 이윤을 내지 못하면 은행을 폐쇄해버리겠다’고 했대요.” “그럼 어디가 끝이야? 누굴 쏴야 되는 거냐고? 난 굶어죽기 전에 날 굶기는 놈을 죽일 거야.”
농부의 총구는 과녁을 찾지 못한다. 농부는 모르는 사실을 지주의 심부름꾼, 마름은 알고 있다. “미안해. 우리가 그러는 게 아니잖아. 괴물이 시킨 거야. 은행은 사람하고 달라.” 농부는 항변한다. “그렇지만 은행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거잖아.” “아니, 틀렸어. 은행은 사람하고 달라. 사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은행이 하는 일을 싫어하지만 은행은 상관 안 해. 은행은 사람보다 더 강해. 괴물이라고. 사람이 은행을 만들었지만, 은행을 통제하지는 못해.”
사람이 만들었지만 사람이 통제하지 못하는 괴물, 그것이 은행 혹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본질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월스트리트>(1987)와 최근 국내에 개봉한 속편 <월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2010)는 둘 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다룬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만든 두 영화 사이에는, 23년의 세월만큼이나 큰 격차가 존재한다.
41살의 패기만만한 올리버 스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말하고 싶어한다. 증권 브로커 버드 폭스(찰리 쉰)는 업계의 큰손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러스)를 어렵게 고객으로 유치한 뒤, 그가 시키는 일을 훌륭히 해내 점수를 딴다. 유명한 ‘기업사냥꾼’의 뒤를 밟는 일이었다. 게코는 폭스가 미행으로 얻어온 정보를 바탕으로 기업사냥꾼이 인수하려는 회사의 주식을 미리 사서 큰돈을 번다. 게코의 인정을 받은 폭스는 더 큰 건수를 올리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마틴 쉰·찰리 쉰의 실제 아버지가 아버지 역으로 나왔다)가 노조위원장으로 있는 지방의 조그만 항공사를 인수하자고 제안한다. 그깟 돈 필요 없다는 아버지를 설득해 겨우 인수에 성공했지만, 게코는 이 회사를 분야별로 찢어 매각하려 한다.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안중에 없고, 단지 ‘머니게임’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자본의 속성을 게코가 대표한다. 폭스는 게코를 상대로 싸운다. 다분히 낭만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월스트리트>의 이런 측면은, 게코의 돈과 폭스의 몸을 동시에 사랑하는 여인, 손에 잡힐 듯 달아나고 마는 안타까운 사랑이 있어 한층 증폭된다.

게코의 돈과 폭스의 몸을 사랑하다
금융자본의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최근 한국에도 있었다. 이른바 키코(KIKO) 사태다. 2007~2008년 세계 금융위기 직전까지 집중적으로 팔린 이 통화옵션상품은 수출 중소기업으로 구매자가 특정된 맞춤형 상품이었다. 당시 달러가치는 지속적으로 떨어졌고(미국의 경제위기를 알리는 신호였다!), 수출기업들은 1천원에 물건을 팔아놓고 900원밖에 건지지 못하는 상황이 왔다. 씨티은행을 비롯한 글로벌 은행들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단순 선물환보다 더 안전하고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게 설계된 상품이라며 키코를 선전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피해 기업들은 이 말을 보이스피싱 대하듯 의심했어야 한다.
약정환율 1달러당 1천원에 100만달러를 계약한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하한(Knock-out) 900원, 상한(Knock-in) 1100원으로 정한 경우, 만기가 됐을 때 환율이 900원으로 내려가더라도 900원이 아닌 1천원에 100만달러를 팔 수 있게 된다. 키코에 가입하지 않았을 때보다 1억원의 수익이 더 생기는 것이다. 만기시 환율이 1천∼1100원에서 움직일 때는 옵션계약을 이행하지 않고 시장가격에 매도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선 환상적인 계약이다.
문제는 하한선 이하로 환율이 떨어지면 계약은 무효가 되고, 상한선 이상으로 오를 때는 약정금액의 2배를 1천원에 팔아야 하는 불평등한 구조였다. 기업들의 이익은 한계가 있는 반면, 은행의 이익은 무한대로 열려 있는 것이다. 은행 영업사원들은 환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으니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했지만, 그런 일은 오고 말았다. 리먼브러더스와 베어스턴스 등 미국 굴지의 투자은행들이 망하면서 금융위기가 왔는데, 달러 가치가 폭락하기는커녕 되레 오르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특히 미국에 물건을 팔아 먹고사는 수출 중심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곤두박질쳤다. 수출기업들은 약정금액의 두 배를 물어내야 했다. 물론 은행들이 이런 사태가 올 것을 예측하고 일부러 키코를 팔았다는 수출기업들의 주장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온갖 감언이설로 불공정한 계약을 맺어놓고 기업들을 환투기 세력으로 매도하는 은행들의 행태는 <분노의 포도>의 은행들과 다를 바 없다. 아마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은행이 하는 일을 싫어”하겠지만 말이다.

부자의 적선에서 출구 찾는 씁쓸함
   
영화 <머니네버슬립스>의 한 장면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오자. <월스트리트>의 속편 <…머니 네버 슬립스>는 2007년 세계 금융위기의 일단을 다룬다. 1편에서 폭스의 고발로 철창 신세를 진 게코는 감옥에서 나온 뒤 세계 금융위기를 부른 금융자본의 추악한 탐욕을 고발하는 책을 써서 다시 유명해진다. 사상 유례없는 초저금리로 소비를 조장하고, CDO(부채담보부증권)니 CMO(대부·채권담보증권)니 하는 그럴듯한 이름을 갖다 붙이지만 그건 부채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며, 부채에 의존해 굴러가는 금융 시스템을 ‘스테로이드 뱅킹’이라고 조롱한다.
금융위기를 맞은 은행장들의 긴급 회동 장면도 인상적이다. 이들은 공적자금 투입을 요청하면서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모두 망하는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이들의 협박이 먹혔다. 천문학적인 구제금융 자금을 보라.)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의 탐욕이 싸놓은 똥을 공산주의적 방식으로 치운 미국의 금융위기 사태를 보며 “공산주의를 재발명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지만, 64살의 노회한 올리버 스톤은 그렇게 과격하게 나가지 않는다.
게코의 관심은 딸 위니 게코(캐리 멀리건)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한 1억달러의 상속재산이었다. 투자은행의 잘나가는 직원이자 위니 게코의 애인인 제이콥 무어(샤이아 라보프)는 이 돈을 대체에너지 개발회사에 투자해 대박을 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게코는 이 돈을 가로채 다시 옛날의 명성을 되찾으려 하고, 제이콥은 보기 좋게 속는다. 결론은? 딸의 뱃속에 든 아기의 초음파 동영상에 감동받은 게코가 선처를 베푼다. 부자의 적선이야말로, 한때의 맹장 올리버 스톤이 자본주의 모순을 타파하는 길이 된 것이다. 록펠러와 카네기, 빌 게이츠와 (최근 기부 대열에 합류한) 마크 주커버그의 나라, 미국의 신민(臣民)다운 결론이다. 혹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부자들이 적선이라도 하는 나라는 그나마 괜찮은 나라 아니냐고. 3대 세습을 하면서 세금 안 내려고 발버둥을 쳤던 글로벌 기업, 노동자에게 ‘빠따’ 때려놓고 맷값으로 수표를 던지는 재벌 2세가 있는 나라에 비하면.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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