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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일군 여성 사업 수완가들
[PEOPLE] 경제를 바꾼 세기의 여성 ②
[125호] 2020년 09월 01일 (화) 크리스티앙 샤바뇌 economyinsight@hani.co.kr

크리스티앙 샤바뇌 Christian Chavagneux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기자

   
▲ 프랑스 화가 외젠 베르제가 그린 <1898년의 샤토 마고>. 샤를 콕스와 에두아르 페레가 1898년 발간한 <보르도와 보르도 와인>에 실린 그림이다.

올리브 드레스토낙
Olive de Lestonnac

드레스토낙 부인은 역사가 기억하는 최초의 여성 사업가다. 보통 사업가가 아니었다. 한때 그는 수도원을 설립하고 보존하는 자선사업가로만 알려졌다. 그의 참모습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드레스토낙 부인은 1572년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592년 결혼하기까지 그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아차, 첫 결혼까지 말이다. 세 번 결혼해 세 번 남편을 잃었다. 아이는 없었고, 다음 남편은 항상 돈이 더 많았다.

귀족들의 대부업자
그녀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포도밭에서 시작했다. 아버지가 정성스레 가꾸고 모은 밭이었다. 이곳이 제대로 된 와인 생산지 모습을 갖춘 것은 1610년 라모트마고 성을 사들인 다음이었다. 라모트마고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보르도 지역 최고급 상품으로 거듭났다. ‘샤토 마고’다.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과정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익혔다. 술통을 늘리고, 포도 가격을 흥정하고, 토지 용도에 따라 임대계약을 달리했다. 하루가 꽉 찼다.
드레스토낙 부인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전기작가 카롤린 르마오 표현을 빌려 말하면, 그는 “돈의 여성”이었다. 돈을 빌려주고 받은 차용증이 200개 가까이 됐다. 총액이 어마어마했다. 그의 손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역 소작농은 쌈짓돈을, 도시와 지방 지도층은 큰돈을 빌려 썼다. 드레스토낙 부인은 귀족이 찾는 은행이나 다름없었다. 주 고객은 같은 지역의 부유한 판·검사였다. 그는 법조계 출신 남편을 둘씩이나 둔 덕에 그 계층 사람을 잘 알았다.
돈은 가족에게도 빌려줬다. 마음을 쓴 것이 아니라 순전히 돈놀이였다. 드레스토낙 부인의 엄청난 재산을 다른 이에게 넘길 때 그에게 빚진 이가 누구누구인지 안 것이다. 차명으로 돈을 빌려줄 때도 있었다. 채무 장부는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로 이용됐다. 필요하면, 가족 재산을 저당 잡아서라도 이자를 몽땅 받아냈다. 공은 공, 사는 사였다.
드레스토낙 부인은 당대 여느 권세가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서기직, 세무직 할 것 없이 무수히 많은 관직과 국채를 서슴없이 사들였다. 쓴 돈보다 많은 돈을 버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드레스토낙 부인의 수완은 보통이 아니었다.
1652년 12월22일 보르도에서 80년 삶의 여정이 끝났다. 드레스토낙 부인의 주검은 보르도 샤르트롱 항구까지 먼 바닷길을 수십 일 달렸다. 항구는 관대한 후원자였던 그를 추모하려는 성직자로 가득했다. 카롤린 르마오는 말했다. “모두가 기억하는 성실한 아내 모습 뒤에 큰 사업가의 배포가 감춰져 있었다.”

   
▲ 2019년 출간된 책 <마르그리트 블래키: 18세기 여성 사업가>의 표지. 아마존 누리집

마르그리트 블래키
Marguerite Blakey

한 세기 이후로 가보자. 드레스토낙 부인보다 사회적으로 덜 ‘핫’해도 사업가로는 으뜸인 여성이 있었다. 1727년 3월16일 파리에서 태어난 마르그리트 엘리자베트 오메를이다. 19살에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35살 기욤 블래키와 결혼했다. 기욤은 파리6구의 같은 거리에 사는 영국인 발명가이자 상인이었다.
기욤은 실용과 편리를 모두 따지는 절충주의자였다. 가발 제조업 집안 딸로 장사에 능하고 가족 인맥이 넓은 아내의 덕을 보려 했다. 가게 관리는 아내에게 맡겨두고 발명에 집중하기 원했다. 의료용 붕대를 만들어 군병원에 납품하기도 했다. 기욤의 진짜 직업은 시계부품 제조 전문가였다. 시계추와 용수철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서른 명 남짓 직원을 둔 가족회사를 경영한 것은 기욤이 아니라 마르그리트였다. 남편이 에손 지역 왕립주조공장 대표로 임명되면서 회사가 문을 닫기까지 10년 동안 일했다. 이후에도 마르그리트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파리에 머물면서 남편 회사를 운영하고, 붕대와 시계부품을 꾸준히 팔았다.

마가쟁 앙글레
첫 번째 균열은 1762년에 생겼다. 남편은 집에 있는 날이 없었다. 한꺼번에 여러 일을 벌이며 빚만 늘리고 다녔다. 뒷수습에 이골이 난 마르그리트는 남편과 재산을 분할했다. 마르그리트의 사업은 계속됐다. 그는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할지 한발 앞서 알았다. 1763년 (프랑스·오스트리아·스페인·러시아 동맹과 영국·프러시아 연합이 싸운) 7년 전쟁이 끝나고 영국제가 유행할 조짐이 보였다. 마르그리트는 영국에서 철물과 (부채, 담배쌈지, 병따개, 병마개 등) 수예품을 들여와 팔았다. 1767년 ‘마가쟁 앙글레’(영국 가게) 상호 사용권을 얻었다.
두 번째 균열이 생겼다. 상품 일부가 세관에 압류되면서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했다. 1771년 4월 마르그리트는 회사 자산을 모두 처분했다. 남편은 이때를 노렸다. 채권자를 앞세워 마르그리트를 사기파산 혐의로 고소했다. 같은 해 5월5일, 프티샤틀레에서 억울한 옥살이가 시작됐다. 마르그리트는 긴 변론서를 준비했다. 자신은 정직하게 회사를 경영하고, 채무 변제를 성실히 이행했다고 주장했다. 무죄가 입증돼, 1772년 1월16일 다시 자유를 얻었다. 1년 뒤 남편과의 신체·거주지 분리를 요청해 받아들여졌다. 남편이 결혼 전에 가정부와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가진 사실을 감옥에서 알게 됐다.
숱한 굴곡을 지나며 좌절할 법도 했지만 마르그리트는 꿈쩍하지 않았다. 새 출발을 했다. 마가쟁 앙글레가 파리1구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마르그리트는 남편과 따로 살았지만 남편이 영국 출신임을 거리낌 없이 내세우며 장사했다. 이미 비슷한 가게가 많이 생긴 것을 본 그는 ‘원조’ 마가쟁 앙글레를 내걸어 차별화했다. ‘장사의 신’이 따로 없었다. 귀족들이 꾸준히 찾아와 매출을 올려주면서 가게가 유명해졌다. 1777년 이후 그의 행적은 미궁 속에 남았다. 그가 다시 소송에 휘말리거나 도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굿럭, 마르그리트!

   
▲ 프랑스 파리 남쪽 주이앙조사의 왕립 직물공장에서 오베르캄프가 인쇄한 직물. 마리 드마레즈는 이 공장의 유능한 관리자였다 위키미디어

마리 드마레즈
Marie de Maraise

크리스토프-필리프 오베르캄프의 이름을 딴 거리와 지하철역이 있다. 하지만 파리 남쪽 주이앙조사에 자리한 왕립 직물공장의 성공은 오베르캄프 혼자 이끈 것이 아니었다. 사업 초기부터 함께한 사라쟁 드마레즈라는 동업자가 있었다. 돈벌이가 시원치 않던 투자가 사라쟁은 47살에 마리 카트린 르네 다르셀과 결혼하며 살길을 찾았다. 30살 마리는 파리 서쪽 도시 루앙에 있는 직물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결혼 뒤 마리는 오베르캄프 직물공장의 최고재무관리자(CFO)가 되었다. 이제 성공 가도를 달릴 일만 남은 것이다.
마리 드마레즈는 음악 등 교양이 깊은 지식인이었다. 말의 고삐를 잡은 그는 자신 있게 역할을 해냈다. 상인 아버지를 둔 덕에 회계용어와 숫자를 잘 다뤘다. 영어와 독일어도 유창했다. 먼저 허술한 회계장부부터 정리했다. 경영지원부 우두머리로서, 안에서는 회사 살림을 책임지고 밖에서는 회사를 대표했다. 거래처 재무 사정이 나빠져 도산할 낌새가 보이면 그전에 압박해 모든 돈을 받아냈다. 금융거래 비용을 아끼고 환율 변동 추이를 꼼꼼히 살폈다.

훌륭한 관리자
얼마나 일을 잘했는지, 자크 네케르 전 재무장관이 사라쟁 드마레즈에게 만나자고 했을 때 약속 장소에 아내 마리가 대신 나갔다. 역사학자 세르주 샤사뉴의 표현을 빌리면, 마리는 “의무의 여성”이었다. 30살 늦은 나이에 결혼해 터울 없이 아이 여덟(둘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죽었지만)을 낳았다. 출산하고도 2주 넘게 일을 비운 적이 없었다. 오베르캄프가 남편과의 동업을 그만두지 않을까 우려해 오베르캄프를 아예 아이의 대부(후견인)로 지정했다.

자유주의자
일은 마리의 삶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나랏법은 뇌물을 써서 손보게 했다. 납인장 사건에서 그랬다. 왕립기관 지위를 얻은 회사는 상품의 외부 감사를 받지 않는 특권이 있었다. 1785년 11월~1786년 1월 모든 상품에 감사 증표로 납인장을 받도록 하는 명령이 떨어지자, 마리는 거세게 반발하며 다음과 같은 탄원을 올렸다.
“절대적 원칙이 있습니다. 교류와 재능, 기술, 기예를 이끄는 가장 위대한 힘이자 큰 활력은 자유라는 원칙입니다. … 왕립 직물공장은 이렇게 귀중한 자유를 잘 이용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의 탄원을 두고 역사학자 샤사뉴는 “경제적 자유주의 논리”라고 말했다. 오늘날 프랑스 경영인연합이 들으면 적잖이 반겼을 주장이었다. 결과적으로 탄원은 통했다.
1787년 마리가 우려한 일이 생겼다. 오베르캄프와 드마레즈의 동업관계가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둘이 합의해 내린 결론이었다. 1789년 드마레즈 부부는 오베르캄프에게 받은 회사 지분으로 큰 부자가 됐다. 마침 적절한 시기였다. 곧 좋은 사업이 생길 참이었다. 프랑스혁명 때 교회와 귀족에게 몰수한 재산이 1791년부터 팔리기 시작했다. 남는 게 많은 투자거리였다.
시골로 간 남편은 1794년 부유한 ‘자작농’으로 생을 마감했다. 자식들도 부모가 번 돈으로 먹고살았다. 마리는 파리에 남았다. 85살까지 장수했다는 것 빼고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마리의 지인이 말했듯이, 그는 “대단한 여성”이었다.

   
▲ 아멜리 드디트리히가 진짜 주인이 돼 번창하게 한 디트리히 가문 회사의 제품들. 드디트리히 그룹 누리집

아멜리 드디트리히
Amélie de Dietrich

17세기 말 탄생한 메종 디트리히는 금속업으로 크게 성공한 회사다. 1789년 프랑스혁명과 전쟁을 거치며 심각한 경영난을 겪었다. 아니, 사장 목이 단두대에 잘려나갔다. 군인이었던 아들 프리츠가 1795년 일을 그만두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회사를 살리려면 돈이 필요했다. 집과 성을 팔고, 스트라스부르 지역 프리메이슨단(평화사회 건설을 위한 비밀결사조직)에 자금을 구했다. 회사 사정은 서서히 나아졌지만, 허약한 프리츠는 1806년 2월 33살에 세상을 떠났다. 아내와 네 아이를 남겨둔 채였다.

전략가
프리츠의 아내 아멜리는 알자스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다른 딸과 마찬가지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경영보다는 문학과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남편이 파리로 오래 떠나 있을 때 아멜리가 경영을 맡았다. 남편이 죽고 6개월 뒤 열린 이사회에서 최고경영자로 지명됐다. 아멜리는 회사를 살릴 인물이었다.
시작은 부드러웠다. 남편이 모은 투자자에게 1815년 처음 배당해준 다음, 그가 직접 찾은 투자자들 몫까지 챙겨주었다. 1827년을 기점으로 디트리히 가문 회사의 진짜 주인이 됐다. ‘뵈브 디트리히 데 피스’(미망인 디트리히와 아들들)가 탄생했다. 아멜리는 여러 전략을 썼다. 먼저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으로 생산 방향을 전환했다. 금속 가공에서 기계공업품 생산으로 주력 분야를 옮겼다. 섬유와 철도 등 서서히 커지는 새 시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아멜리는 혁신으로 생산력을 높이려 했다. 고도의 기술자를 고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게 했다. 1843~55년 뵈브 디트리히 데 피스가 등록한 특허는 5개였다. 아멜리는 분석회계를 바탕으로 생산을 관리했다. 상품마다 내는 이익이 얼마인지 파악해 채산성 좋은 상품에 생산력을 집중했다.
아멜리는 미래를 준비했다. 경영권을 이어받을 두 아들, 알베르와 외젠을 교육했다. 높은 지식과 기술을 갖추고 경영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더해 두 아들 결혼으로 사업 인맥을 다졌다. 금융가 집안 자제와 결혼시킨 누이도 마찬가지였다. 사위 덕을 톡톡히 보았다.

진짜 주인
회사 경영자는 아멜리와 두 아들, 사위까지 넷이었지만 진짜 주인은 아멜리였다. 회사 전체 지분의 절반을 보유한 최대주주이자, 나머지 셋의 임금을 합한 것보다 두 배 많이 받는 ‘성차별주의자’였다. 아멜리의 존재감은 끝까지 선명했다. 자녀들에게 ‘신중 경영’을 강조하며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던 그는 1855년에 세상을 떠났다. 회사는 지금도 남아 있다.

ⓒ Alternatives Economiques 2020년 7월호(제403호)
Ces femmes qui ont transformé l’économie et ont été oubliées
번역 최혜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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