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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받고 평가절하된 경제의 중심
[PEOPLE] 경제를 바꾼 세기의 여성 ①
[124호] 2020년 08월 01일 (토) 크리스티앙 샤바뇌 economyinsight@hani.co.kr

크리스티앙 샤바뇌 Christian Chavagneux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기자

   
▲ 1933년 미국 노동장관에 임명된 프랜시스 퍼킨스가 앤드루 카네기의 유에스스틸 철강공장을 찾아 노동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퍼킨스의 노력에 힘입어 1945년 미국 임금노동자의 노조 가입률이 35%까지 높아졌다. 루스벨트재단 누리집

올리브 드 레스토낙, 잔 부비예, 매기 레나 워커, 쉬잔 라코르. 이 가운데 한 명이라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업가, 노동운동가, 은행 총재, 장관이었던 이들 여성은 저마다 당대 경제의 중심에 있었다. 단지 지금껏 평가절하되고 덜 알려졌을 뿐이다. 그런 그들을 여기에 묶었다. 오랜 경제사를 아무리 멀리 거슬러 올라가봐도, 여성의 빈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가려져 보이지 않던 여성을 더 늦기 전에 무대 앞으로 끌고 나와야 한다. 수세기 동안 여성을 삼킨 거대한 침묵을 깰 때가 왔다. 16~20세기 경제를 바꾼 여성들을 이번호와 9월호에 나눠 소개한다.

이미 아는 것
여성의 경제 참여와 외면당한 노동을 이야기할 때 으레 집안일부터 떠올린다. 오래전부터 가사와 육아는 여성이 유일하게 소질 있는 일이고, ‘안사람’이 응당 해야 하는 의무로 여겨졌다. 진짜 노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여성의 역할은 집과 아이 돌보기에 그치지 않았다. 훨씬 광범위했다. 집 안부터 보자. 농경사회에서 가축을 돌보거나 작물을 기르는 일, 의복 등 수공예품을 만드는 일은 주로 여성이 맡았다.
“굳이 되짚을 필요가 있을까.” 역사학자 미셸 페로는 “여성은 줄곧 일해왔다”고 말한다. 가정뿐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여성은 늘 “빼놓을 수 없는 큰 자리”를 차지했다. 마르가레 마뤼아니와 모니크 므롱, 두 연구자의 조사가 이를 증명한다. 보수 없이 가게와 농장 일을 돕던 때가 지나고 점점 농업과 산업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지금은 여성 노동자 대부분이 서비스 분야에서 일한다.

알아가는 것
경제사에서 여성 자리를 온전히 찾아주려면 더 멀리 가야 한다. 경제학자들이 세계 역사를 바라보는 눈은 이제 막 커지고 있다. 서구 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가령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훨씬 먼저, 최소 1천 년 전에 위대한 발견이 시작됐다는 이야기처럼. 경제사도 마찬가지다. 남성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려면 접근법을 바꿔야 한다.
그러려고 보니 암초에 부딪힌다. 여성은 남편에게 예속된다는 법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938년에야 사라진 이 법은 여성이 주체적 개인으로서 계약하거나 돈을 빌릴 수 없게 가로막았다. 여성이 사업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예외는 있었다. 바로 남편이 죽고 없는 여성이었다. 지금 소개할 여성 사업가 가운데 그런 사람이 많다.
프랑스 샴페인 브랜드를 만든 ‘뵈브(미망인) 클리코’가 대표적이다. 죽은 남편을 대신해 경영에 나선 여성 덕에 가족경영회사가 맥을 이을 수 있었다. 그 발자취가 법률 기록으로 남았다. 남편이 살아 있지만 온전히 혼자 힘으로 성공한 여성도 있다. 가족도 채권자도 세금도 여자가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돈만 잘 벌어준다면 성별을 문제 삼지 않았다. 법은 뒷전이었다.

비즈니스 우먼
좋은 소식은,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기록이 모여 ‘여성 경제사’가 조금씩 모습을 갖춰간다는 점이다. 베아트리스 크레이그 캐나다 오타와대학 교수(역사학)는 6세기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활약한 여성의 역사를 종합했다. 오래전부터 일하는 여성을 찾을 때 가장 익숙한 장소는 시장과 봉제공장이었다. 하지만 실제 여성의 일터는 그보다 넓었다.
여성은 15세기에 출판업, 이후엔 맥주 생산 또는 국제무역에까지 나서 당대 세계화를 이끄는 데 한몫했다. 은행에서 일하거나 투자한 여성도 무수히 많았다. 이들은 산업혁명에 필요한 돈줄, 국채를 사서 나라 재정을 움직이는 큰손, 때로 끝 모르는 대범한 투기꾼이 되었다. 한마디로 성직자 프랑수아 페늘롱의 충고를 거스른 위인들이다. 페늘롱은 <여성교육론>(1987)에서 “여성이 사업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편이 숨진 뒤 엄청난 자본을 축적한 여성을 겨냥한 말이었다.
여성은 영리하고 짓궂었다. <불온한 철학사전>에서 “훌륭한 여성 석학도 있고 여전사도 있지만, 여성 발명가는 없다”고 주장한 볼테르를 대놓고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비록 18세기 통계는 없지만, 여성은 혁신적 업적을 이뤘다. 경제학자 조리나 칸은 1791~1855년 여성이 1천 개 넘는 특허를 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기간에 등록한 특허 비율도 1.5%에서 3%로 늘었다. 시민사회단체, 노조, 비정부기구 등에서 활동하며 경제사에 흔적을 남긴 여성도 있다. 안타깝게도 관련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들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6~20세기 경제를 바꾼 여성들, 억울하게 외면당한 여성들이다.

   
▲ 1935년 8월14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역사적인 사회보장법안에 서명하고 있다. 바로 뒤에 선 사람이 프랜시스 퍼킨스 노동장관이다. 루스벨트재단 누리집

미국 최초의 여성장관
프랜시스 퍼킨스(Frances Perkins)

1933년 2월22일, 퍼킨스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만났다. 루스벨트는 며칠 뒤면 미국 대통령이 된다. 루스벨트가 퍼킨스에게 말했다. “노동장관이 되어주시오.” 대단히 상징적인 일이었다. 퍼킨스도 훗날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무엇을 하려는지 대통령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최초로 여성을 내각에 기용해 선례를 만들려 했다.”
퍼킨스는 그저 상징으로만 남을 인물이 아니었다. 퍼킨스가 장관까지 된 것은 변화를 위해서였다. 장관직에 오르는 퍼킨스 손엔 긴 목록이 쥐였다. 놀라지 마라. 실업보험, 공공사업, 최저임금, 노동시간 단축, 아동노동 금지, 노동자 건강보험, 공적연금까지. “역대 그 무엇도 여기에 비할 수 없다”고 루스벨트가 말할 정도였다. 퍼킨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절로 얻어진 게 없었다. 퍼킨스가 생애 끝까지 끌고 간 질긴 투쟁의 산물이었다.

운명적 만남
퍼니 퍼킨스는 1880년 4월10일 미국 보스턴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상인이던 아버지는 딸이 고등학교까지 마치길 바랐다. 당시 여성에겐 드문 일이었다. 성적이 좋았던 퍼킨스는 주변의 강요로 물리와 화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정작 관심은 미국 경제사와 공장 견학에 있었다.
퍼킨스는 졸업 뒤 시카고에서 과학을 가르쳤다. 그즈음 프랜시스로 개명했다. 그에겐 아직 정해진 진로가 없었다. 일단 필라델피아 사회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러다 컬럼비아대학이 여학생 입학을 허가하자, 얼른 대학원에 진학해 정치학을 공부했다. 다시 사회단체로 돌아갔다. 공장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가난한 여성과 아이를 돕기 위해서였다.
퍼킨스는 ‘참여하는’ 페미니스트였다. 여성 투표권을 위해, 여성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싸웠다. 결혼 뒤에도 남편 성을 따르지 않고 퍼킨스로 남았다. 민주당과 관계를 맺은 뒤 뉴욕주지사 앨 스미스를 도와 노동환경 문제를 맡았다. 스미스는 1928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지만 당선되지 못했다. 퍼킨스의 정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미스를 이은 민주당 후보, 루스벨트라는 인물이 있었다. 퍼킨스와 루스벨트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퍼킨스가 1933년 노동장관으로 취임할 때, 미 행정부는 부패하고 비생산적이었으며 인종차별적이었다. 먼저 ‘청소’부터 해야 했다. 그다음 노동통계국을 설치했다. 노동통계국은 실업 자료를 제공하는 기관으로 빠르게 거듭났다. 1934년 출간한 저서 <피플 앳 워크>에는 퍼킨스의 신념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는 미국이 노동자를 더 잘 보호하고 더 많은 임금을 줄 만큼 충분히 부유한 나라라고 믿었다. 그러려면 사회보장의 통일된 기준을 마련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사회적 덤핑’(저임금으로 가격을 낮추는 행위)이라는 파괴적 경쟁을 막아야 했다.

노동운동 부활
장관 취임 초기, 노동운동은 사망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퍼킨스는 기업 노조가 성장하길 바랐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1945년 미국 임금노동자의 노조 가입률이 35%까지 높아졌다. 퍼킨스는 산업정책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산업별로 단체협약을 맺어 노동환경 기준을 마련하도록 했다.
그 결과 섬유산업에서 처음 아동노동이 금지됐다. 처음 맛본 승전의 기쁨이었다. 퍼킨스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투쟁이 남아 있었다. 경제안전위원장이 돼 그 유명한 ‘사회보장법’ 바탕을 다졌다. 1935년 8월 미국은 실업보험과 공적연금제를 갖추게 되었다. 1938년엔 최저임금법이 제정됐다. 뉴딜정책의 사회적 혁명은 퍼킨스, 그 자신이었다.
퍼킨스는 한 번도 내각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45년 루스벨트가 숨진 뒤 새 일을 찾아야 했다. 남편과 딸 간병에 많은 돈이 필요했다. 나이 들어 쇠약해질 때까지 대학에 머물렀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조언을 구하러 여러 번 퍼킨스를 불렀지만, 그는 이미 너무 연로했다. 1965년 5월14일 세상을 떠났다.
퍼킨스는 1946년 초 뉴딜정책 경험담을 담은 첫 저서 <내가 아는 루스벨트>를 펴냈다. 책에서 인간 루스벨트, 정치인 루스벨트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루스벨트는 그의 세대와 업적이 사라진 뒤에도 희망과 사회정의의 상징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퍼킨스 말대로 됐다. 그 공은 퍼킨스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

   
▲ 수전 스트레인지(왼쪽)와 그의 대표작 <카지노 자본주의>. 위키피디아


국제정치경제학 낳은
수전 스트레인지(Susan Strange)

수전 스트레인지는 원래 기자였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를 거쳐, <옵서버> 워싱턴 지부의 최연소 백악관 통신원으로 일하다 유엔 뉴욕지부에서 기자 생활을 마쳤다. 42살에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에서 학자로서 제2의 경력을 쌓았다.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첫 업적을 쌓은 것이 이때였다. 새로운 학문, 국제정치경제학을 탄생시켰다.
스트레인지는 다음 질문의 답을 구하려 했다. 세계화 시대에 권력은 누구에게 있는가? 모든 주체를 움직이는 게임 규칙은 누가 정하는가? 애플? 중국? 금융시장? 스트레인지는 이 질문들의 답을 찾기 위해 경제학과 정치학을 비롯해 긴 역사를 파고들었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 기둥 네 개가 있다고 보았다.

네 기둥
첫째 기둥은 안보 구조다. 안보 구조는 군사·테러·식량·환경 등 모든 종류의 위협에서 인간사회를 보호하는 조건을 결정한다. 다음은 생산 구조다. 어떤 기업이 어떤 방법으로 어떤 생산요소(땅, 노동, 자본, 기술)를 어떻게 결합해 어떤 조건에 따라 무엇을 생산할지 결정하는 합의로 이뤄졌다. 여기서 스트레인지는 다국적기업의 권력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셋째인 국제금융은 스트레인지의 주된 연구 분야였다. 1960~70년 그가 내놓은 수많은 논문이 국제금융 분야다. <카지노 자본주의>(1986)와 세상을 뜨기 직전인 1998년에 발표한 <매드 머니> 같은 저서도 마찬가지다. 1986년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주의 금융체제는 거대 카지노판과 별반 다르지 않게 급변할 것이다.” 보통의 카지노판이 아니라 아주 불안정한 카지노판이다.
마지막은 지식 구조다. 추상 영역에서 지식 구조는 사유 세계와 신념 체계를 뜻한다. 그 안에서 개인은 특정 순간에 세상을 보는 눈을 갖고, 스스로 발전할 기회와 한계를 세운다. 실질 영역에서 지식 구조는 정보를 찾아내 축적·저장·교환하는 요건을 결정한다. 스트레인지는 구글이나 페이스북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보 관리법을 고민할 필요성은 잊지 않았다.

무규제 영역
스트레인지가 이 네 기둥을 종합해 도출한 결론이 무엇일까. 그의 눈에 세계 최대 권력은 여전히 미국에 있었다. 미국이 패권을 잃었다는 말은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여러 번 비웃었다. 하지만 국가가 민간 주체에 행사하는 권력을 잃었다고 보았다. 여기서는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말한 민간 주체에는 다국적기업과 금융업계뿐 아니라 마피아, 비정부기구도 포함됐다.
끝으로 스트레인저는 세계경제가 무규제(언거버넌스) 영역으로 옮겨간다고 보았다. 무대에 있는 국가 주체와 비국가 주체 모두 제어력을 잃는, 현 체제의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그에게 세계금융이 바로 그런 무규제 영역이었다.
스트레인지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인간·학자로서 맺은 세상과의 관계는 많은 학자에게 깊은 자취를 남겨, 후대로 이어졌다. 그들 모두를 스트레인지는 ‘보이지 않는 동료’ ‘영혼의 동반자’라고 불렀다.

ⓒ Alternatives Economiques 2020년 7월호(제403호)
Ces femmes qui ont transformé l’économie et ont été oubliées
번역 최혜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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