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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국수주의 사이의 새 길”
[COVER STORY] 알랭 쉬피오 교수 인터뷰
[122호] 2020년 06월 01일 (월) 카트린 앙드레 economyinsight@hani.co.kr

 프랑스 법학자 알랭 쉬피오는 노동법 분야 권위자다. 콜레주드프랑스 석좌교수로 ‘사회국가와 세계화: 연대에 관한 법학적 분석’이라는 강좌를 맡았다. <필라델피아 정신> <숫자에 의한 협치> 등 많은 저서가 있다.

카트린 앙드레 Catherine André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기자

   
▲ 노동법 분야 권위자인 알랭 쉬피오 석좌교수의 강의 동영상. 콜레주드프랑스 누리집 갈무리

코로나19 사태로 프랑스 보건의료 체계가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났다. 어떻게 평가하나.
사회를 기업처럼 ‘경영’할 수 있다는 믿음과 현실이 충돌한 것이다. 현실에는 수치화할 수 없는 위험이 넘쳐난다. 근대부터 국가가 전방위적으로 나서 수치화할 수 없는 영역을 보증하고 있다. 개인 정체성과 안전, 세대 연속, 시민 평화, 생명계 보호 문제까지 국가가 껴안는다. 사람 사이 교류, 무엇보다 상품 이동이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되려면 꼭 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사상이 법과 제도에 따른 질서를 뒤집는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는 ‘시장 자율질서’를 맹목적으로 믿으면서 국경을 초월한 지구를 무대로 움직이라고 말한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말한 ‘거대사회’다. 신자유주의는 법과 국가마저 경제 효용을 좇는 숫자의 지배 아래 놓는다.
20세기 전체주의의 또 다른 얼굴을 한 세계화는 시장을 ‘모든 것’으로 만든다. 그 흐름에서 개인은 계약에 따라 움직이는 먼지 한 톨로 전락한다. 자기 이익만 열심히 따라가면 되는 존재다. 국가는 경제학자가 내세우는 ‘자연법’을 집행하는 도구일 뿐이다. 자연법에서는 땅과 자원의 사유화가 첫째로 자리한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이런 믿음이 종교적 신념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일찍이 지적했다. 1944년 폴라니는 “이익 추구 동기가 과정을 흔든다면 종교적 열성이 역사에서 가장 폭력적으로 폭발했을 때와 같은 결과가 따르게 돼 있다”고 말했다. 종교적 열성은 합리적이고 온건한 비판이라도 모두 튕겨내려 한다. 현실과 충격만이 도그마(독단)의 깊은 잠을 깨울 수 있다.

도그마에 빠진 세계
그런 충격이 2008년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신자유주의 사상을 깨우는 자명종을 울려야 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이번 기회에 기어 1단 올리자”는 주장에 묻혔다. 그 구호를 앞장서 외친 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다. OECD는 2010년에도 ‘수년간 지켜온 원칙’을 깨서는 안 된다고 을러댔다. 외려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교육과 보건의료 부문을 중심으로 재정지출 효율을 높여라. 너무 무거운 세금을 매기지 말라”고 부추겼다.
그렇게 다시 도그마에 빠져 잠들었다. 하지만 자꾸만 뒤척인다. 애초 그런 식의 세계화는 자연과 사회가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재난에 등 떠밀려 조국을 떠나는 수많은 이민자, 불평등 심화와 삶과 일의 질 악화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는 사람들, ‘노란 조끼 운동’ 때처럼 무질서하게 터지는 분노 때문에 자꾸만 잠에서 깬다.
그런데도 사회국가를 해체하려는 신자유주의 목표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갈등은 뜻이 모호한 수사만 늘어놓는다고 가라앉지 않는다. 그 틈에 ‘신파시즘’이 세계 곳곳에서 세를 키운다. 민족·국가주의와 정체성에 대한 강박을 주재료로 하고, 지구환경에 대한 무관심으로 양념된 사상이다.
‘시장전체주의’ 시대에 사회정의와 인간다운 노동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나.
4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은 사회국가를 지탱하는 세 기둥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첫 번째 기둥은 노동법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처음 관련법을 제정할 때 이미 산업자본주의가 국민 건강에 치명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국민 노동력을 무한정 착취당한 끝에 국가가 가진 물적 자원까지 위협받았다. 그러면서 1841년 프랑스에서 어린이 노동시간 단축법, 이후 1892년 여성 노동시간 제한법이 제정됐다. 이들 노동법은 모든 노동계약에 노동자가 보호받을 권리를 명시하도록 했다. 노무 제공자로서 노동시장에 머무는 잠깐의 시간만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전 생애와 세대의 연속까지 고려한 법이었다.
두 번째 기둥은 사회보장제도다. 역시 시장경제 영역에 예속된 인간의 생애가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장치다. (1898년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산업국가에서 도입한 산업재해보호법이 그 밑돌이 되었다. 노동자가 경제활동 중 입은 피해를 기업이 책임지도록 해 사회 위험에 연대의 길을 열었다. 이게 발전해 사회보험을 거쳐 사회보장제도가 탄생할 수 있었다.
마지막 기둥은 공공서비스다. 보건의료, 교육, 우편, 에너지, 교통을 비롯한 특정 재화와 서비스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평등성, 연속성, 접근성을 고려해서 말이다. 이 세 기둥은 제2차 세계대전 뒤 헌법적 토대를 갖추었다. 미국 뉴딜정책과 달리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런데 노동법 뼈대가 약해졌다. 사회적 기본권이 기업협약에 자리를 내주고 뒷걸음질했다. 노동법 울타리도 작아졌다. 그 배경에는 ‘우버화’가 있다. 반갑게도 최근 파기원(프랑스 민형사소송 최고법원)은 플랫폼을 매개로 하는 고용 범위가 커지지 않도록 우버화에 급제동을 걸었다.
공공서비스도 비슷한 변화를 겪었다. 민영화와 시장화로 그 영역이 쪼그라들었다. 기업처럼 ‘경영’하고, 숫자가 안내하는 대로 ‘운전’하면서 공공서비스 뼈대가 앙상해졌다. 그 결과가 얼마나 파괴적인지는 모두가 잘 아는 대로다. ‘주변부’로 불리는 프랑스 지역의 사막화와 공공의료시설 오작동이다.

   
▲ 2020년 5월12일 코로나19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돼 다시 문을 연 프랑스 낭트 사립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수업을 받고 있다. REUTERS

위기에 던지는 질문
법적 형태가 저항할 힘은 어디에 있나.
저항이라는 표현은 아주 적절하다. 사회법을 헌법으로 보장한 덕에 프랑스가 사회국가 지위를 지키고 있다. 이때 법은 닻처럼 정책을 단단히 붙잡아주는 구실을 한다. 키를 돌려 방향을 바꾸어도 되지만, 너무 멀리 떠내려가지 않게 고정한다. 그렇다고 법이 수동적 기능만 하는 건 아니다. 잡아끌고 가기도 한다. 예가 1946년 도입된 프랑스 헌법 전문이다. 전문은 ‘레지스탕스’(저항) 운동 때 시작된 논의 결과였다.
남녀평등을 비롯해 노동자의 기업경영 참여, 건강권 보장 선언은 늦은 게 아니었다. 당시 현실을 보면 이른 편이었다. 그 선언이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 같은 위기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저 힘에 끌려다니는 부속 장난감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다. 지금 불행이 어디서 왔는지 과거 경험에 비춰 생각하고, 다 함께 어떤 미래를 건설하고 싶은지 고민한다. 이런 질문의 답은 반드시 적절한 법적 형태로 완성되기 마련이다.
사회국가가 무한 성장을 향한 환상을 부풀리면서 이런 중요한 질문에 무뎌졌다. 뉴딜정책과 영광의 30년 뒤 일단 부만 계속 늘리면 정의 문제는 다음으로 넘겨도 된다는 믿음이 언제부턴가 생겨났다. ‘결핍에서 자유까지’ 내재한 양면성이다. 케인스주의 시각에서 보면 ‘필요 해방’으로도, 시장의 ‘수요 해방’으로도 해석된다.
그런 믿음에 따라 사회국가는 민간 경영기법을 공공부문까지 끌고 왔다. “복종하라. 부가 늘고 물질적 삶의 조건이 좋아질 것이다”라면서 말이다. 노동 가치와 본질은 생산성과 단기 효용에 밀려 흐려졌다. 하지만 이대로는 점차 심각해지는 환경·보건 위기에 대처할 수 없다. 더구나 환경 위기와 보건 위기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나.
현재 전례 없는 보건 위기가 최악으로도, 최선으로도 끝날 수 있다. 국수주의 경향이 지금보다 더 짙어지는 게 최악이다. 모두가 모두의 적이 되도록 신자유주의가 개인을 전쟁터에 몰아넣었듯이, 국가와 공동체도 서로 적이 되는 것이다. 최선은, 이번 위기가 세계화 흐름을 반대로 돌려 ‘진정한 세계화’의 길을 여는 것이다. 진정한 세계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다. 모든 나라가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고 주권과 다양성을 잃지 않는 세계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국수주의도 마찬가지다. 국경을 넘어 모두가 기술·환경적으로 서로 의존하는 세상에서 국수주의는 환상에 불과하다. 앞이 막힌 신자유주의와 국수주의 사이에 새 길을 내야 한다. 이 길은 마르셀 모스(프랑스 사회학자)가 1920년 말한 ‘인터국가’(Internation)와도 비슷하다. 국가·언어·문화 다양성은 장애물이 아니다. 인류가 지닌 가장 좋은 패다. 지금이 인류세(인간활동의 영향력이 지구환경을 바꿀 만큼 강한 시대)라 하지 않나.
이런 좋은 패를 쓰려면 나라 간 연대를 꾸려야 한다. 다시 생각하고, 다시 세운 유럽연합이 해야 할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노동기구, 세계보건기구, 유네스코, 유엔 식량농업기구 등 국제기구에 주어진 일이기도 했다.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같은 경제기구에 견줘 힘없는 이들 기구에도 큰 변화와 법적 무기가 필요하다. 제구실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 Alternatives Economiques 2020년 5월호(제401호)
Entretien avec Alain Supiot
번역 최혜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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