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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머니’가 절실한 이유
[FINANCE] 통화정책의 뉴노멀
[121호] 2020년 05월 01일 (금) 윤석천 maporiver@gmail.com

 윤석천 경제평론가

   
▲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이 2018년 9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금융위기 10년 뒤’ 토론회에 참석해 보험회사 AIG 구제금융 자금 조달방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REUTERS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2020년 4월10일 2조3천억달러(약 2800조원) 규모의 추가 부양책을 발표했다. 투기등급 회사채를 매입하고, 직원 1만 명 이하 기업에 4년 만기로 대출해주기로 했다. 지방정부 유동성 기구를 만들어 5천억달러 규모 지방채도 매입한다.
‘헬리콥터 머니’의 전형이다. 오늘 경제는 신용의 바다에 떠 있는 돛단배다. 그 바다에 코로나19가 덮쳤다. 파고는 높아지고 폭풍이 몰아친다.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 비상식적이라 생각해왔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현대통화이론(MMT)과 그것의 형제라고 할 수 있는 헬리콥터 머니가 위기에 놓인 경제를 구하는 데 불가피한 수단이 됐다. 헬리콥터 머니란 중앙은행이 새로 찍어낸 돈을 헬리콥터에서 뿌리듯 시중에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국민에게 나눠주거나 중앙은행이 정부에 직접 돈을 줘 재정정책에 쓰게 할 수 있다.

돈이란 무엇인가
2010년 당시 연준 의장인 벤 버냉키는 미국 정부가 보험회사 AIG 구제금융 850억달러를 어떻게 조달했는지 인상적으로 설명했다. “은행에 돈을 빌려주는 건 간단하다. 은행 계좌에 컴퓨터로 금액을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 현대경제에서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간명하게 보여준다.
‘현대경제에서 돈의 창조’라는 영국은행 보고서를 처음 보는 사람은 놀라게 된다. 아무리 애써도 얻을 수 없는 돈이 쉽게 만들어지는 것에 경악한다. 오늘날 돈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경제학 교과서 설명과는 다르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낸다’고 생각하지만, 절반만 정답이다. 실제 현대경제에서 유통되는 돈은 그저 은행이 자신의 대차대조표를 바꾸면 만들어진다.
“현대경제에서 대부분 돈은 은행 예금 형태를 갖는다. 그러나 은행 예금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는 오해가 자주 발생한다. 누군가가 은행에 자신의 돈을 맡기는 것으로도 발생하는 예금은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이다. 경제시스템에서 유통되는 돈 대부분은 은행이 대출하는 순간 만들어진다. 대출을 하면 빌린 사람의 은행 계좌에 동일한 액수의 예금이 생성된다. 새로운 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은행은 가계나 기업의 저축을 바탕으로 하기보다 대출을 통해 예금, 즉 돈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언제나 본원통화를 웃도는 돈이 시중에 유통되는 이유다.”
은행은 돈을 창조해내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 돈은 ‘무’에서 만들어진다. 중앙은행도 같은 방식으로 돈을 만들어낸다. 물리적 화폐는 필요 없다. 버냉키가 말했듯이, 빌린 사람의 계좌에 단순히 표기만 하면 된다. 이론적으로 자국 통화를 가진 정부라면 무제한 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헬리콥터 머니 정책은 과연 금단의 열매일까? 연준이 기업을 위해 수조달러를 만들어내고 한국의 특정 은행이 거대 기업의 파산을 막기 위해 수조원을 투입하는 상황에서, 대체 왜 코로나19 확산으로 고통을 겪는 개인과 자영업자, 중소기업에 그런 일을 할 수 없단 말인가.

금단의 열매?
미국 컬럼비아대학 경제학자인 리처드 클라리다는 몇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내다봤다. “우린 앞으로 5년, 적어도 10년 안에 헬리콥터 머니의 변형을 보게 될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코로나19 습격에 각국은 속속 헬리콥터 머니라는 도구를 꺼내들었다.
문제는 그 필요성과 효과를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데 있다. 민간부채든 정부부채든 부담을 안은 정부가 코로나19 충격을 막으려면 헬리콥터 머니가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대기업을 구제하는 데 동의하면서도 가계와 중소기업을 수렁에서 건져내는 것엔 비판한다.
급한 것은 오히려 가계와 중소기업이다. 양적완화는 이런 문제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 10년 동안 중앙은행의 양적완화 정책은 주식을 포함한 금융자산 가격을 올렸다. 이익은 상위 10% 이상 가계와 대기업에 집중됐을 뿐이다. 하위 90% 가계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중앙은행이 창조한 돈은 은행시스템 벽에 막혀 가계로 흘러들지 못했다.
헬리콥터 머니는 이런 점에서 양적완화보다 더 민주적이다. 코로나19로 고통받는 경제주체에 직접 현금을 줄 수 있다. 가계와 중소기업은 이 돈을 소비나 부채 상환에 쓴다. 도로, 항만, 전력망, 의료시설, 운송시스템 등 인프라(기반시설) 건설과 개선에도 쓰인다. 실업자를 위한 안전망과 직업 제공도 가능하다.
이런 식의 투자는 빠르게 수요를 만들어낸다. 총수요를 급격히 늘려 침체에 빠진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자산시장 부양을 통한 부의 효과에 기댄 성장보다 훨씬 건강한 성장이 기대된다. 불평등을 심화한 양적완화와 달리 불평등 완화가 가능하다.
현재는 2008년 금융위기보다 더 지독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시간이 핵심이다. 코로나19 확산이 멈추면 위기는 빠르게 엷어질 것이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정부의 직접 지원이다. 이것은 전례 없는 사건이다. 금융위기는 몇 년에 걸쳐 생겼지만, 이번 위기는 몇 개월 혹은 몇 주 만에 경제를 파괴할 수 있다. 가계와 기업의 파산으로 신용경제 근간이 흔들릴 위험이 있다. 현금을 뿌리는 것은 시간을 벌려는 불가피한 수단이다. 신용시스템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방책이다.

우려가 있다면?
헬리콥터 머니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다. 금융시장이 아니라 하위 90%를 대상으로 하기에 수요가 급격히 늘 수 있다. 하지만 민간부문 부채 정도를 고려하면 다른 대안이 전무하다. 무엇보다 코로나19 후유증을 극복하는 게 먼저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은 생각보다 잘 억제될 수 있다. 특히 자금 공급 목표를 정교하게 설계한다면, 인플레이션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단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썼던 방식이 유효하다. 가격통제에 더해 한계세율을 올리는 것이다. 이런 정책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계획됐고 실제로 잘 작동했다. 1942~45년 연평균 인플레이션은 3% 정도였다. 종전 뒤 물가가 잠깐 크게 올랐지만, 억압된 수요 폭발 때문이었다. 그마저 정부의 적절한 통제로 수그러들었다.
높은 물가상승률은 분명히 극복해야 할 도전이지만 현 상황에서 절대악은 아니다. 중앙은행은 2008년 금융위기 뒤 10년 이상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려 애썼다. 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천문학적 유동성을 공급했음에도 그렇다. 헬리콥터 머니로 적정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면 실패가 아닌 성공일 수 있다. 디플레이션 압력이 거세지는 시대에 극복했다는 건 성장경제 체제의 회복을 뜻한다. 경제가 금융화에서 벗어나 생산성이 강화된 건강한 형태로 바뀐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중앙은행 독립성을 해칠 수 있다. 여기에는 중앙은행 독립성 보장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를 두고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다. 현재 중앙은행 체제는 금융산업 지원자라는 오명을 불러왔다. 중앙은행이 왜 금융산업 뒷배에 만족해야만 하는가? 가계와 중소기업을 위한 역할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일시적 독립성 약화가 반드시 악이 아닐 수 있다. 특정 위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민간부채는 성층권에 다다른 상황이고 하위 90% 가계는 부채에 신음한다. 헬리콥터 머니는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책이 될 수 있다.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이 아니었더라도 MMT나 헬리콥터 머니는 가계부채 급등과 싸우기 위한 도구로 등장할 가능성이 컸다.
방법은 간단하다. 정부부채를 중앙은행이 직접 사들이면 된다. 전례는 많다. 일본은 물론, 미국도 해오고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비를 이런 방식으로 조달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 재원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민간부문에서 매입하지 않는 채권을 중앙은행이 사거나 정부와 직거래하는 것이다. 이 방식으로 정부는 충분한 돈을 위기에 놓인 경제에 투입할 수 있다.
기축통화국만이 아니라 재정이 비교적 건전하고 경상 흑자가 나는 국가라면 가능하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다면 자국 통화를 빌리는 정부는 파산하지 않는다. 사실이다. 버냉키가 지적했듯이 통화는 자국 중앙은행이 창조할 수 있다. 대출이 예금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코로나19에 따른 경제 충격을 푸는 해법은 단순해질 수 있다.
관념을 바꿔야 한다. 신자유주의 금융화 실험은 약속한 장밋빛 미래를 선물해주지 못했다. 현대경제를 금융시장의 볼모로 만들었을 뿐이다. 이 위기를 돌파하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민간 자생력을 살려내는 것은 위기 극복 이후 해결해야 할 문제다. 헬리콥터 머니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지금은 분석보다 해결이 중요하다. 헬리콥터 머니가 해법이자 뉴노멀(새 표준)이 될 수 있다.

* 윤석천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금융시장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금융 관련 책들을 썼으며, 특히 외환과 관련해 많은 강의를 해왔다. <한겨레> ‘세상읽기’를 연재했으며, 현재 팍스TV <이슈포커스>에 출연하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를 그리워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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