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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웃의 깡패 혹은 선한 사마리안
[Cover Story∥]아시아의 새 빛
[9호] 2011년 01월 01일 (토) 박번순 economyinsight@hani.co.kr

박번순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아시아 시대’가 여기저기서 언급되고 있다. 돌이켜보면 아시아 시대가 온다는 주장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전반에 아시아가 고도성장할 때 많은 현인들이 아시아의 시대가 온다고 했다. 그리고 1990년대 말 아시아는 경제위기를 겪었고, 그 후유증을 아직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동아시아가 장밋빛 아시아 시대를 꿈꾸던 1994년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포린어페어스>에 실은 한 논문에서 ‘아시아의 시대는 허상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시아는 생산성이나 효율성은 도외시한 채 단지 노동투입 증대와 자본투자 확대를 통해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원투입에만 의존하는 아시아는 1950년대 역시 생산요소 투입 증가로 경제성장을 누렸던 옛 소련처럼 무너질 수 있다고 음울한 예언을 했다. 그 예언이 실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1997년 동남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는 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가 자원투입만으로 경제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기술적 기반이 취약한 가운데 대량생산형 조립제조업을 중심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2009년 6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아세안 FTA 투자협정 서명식에서 각국의 통상장관들이 서명하고 있다.

 
‘아시아 시대’에 대한 폴 크루그먼의 음울한 예언

그렇다면 이제 다시 한번 아시아 시대를 기대하는 것은 아시아가 성장 모델을 요소 투입보다는 생산성이나 효율성의 증대로 바꿨기 때문인가? 아시아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효율을 증진시킨 것은 분명하다. 아시아는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년 이상 살아남기 위해 정부·기업·가계까지 모두 절약을 했다. 그 결과 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위기 이전의 막대한 무역수지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켰고, 금고에 막대한 달러를 쌓아두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시아는 여전히 수출을 강조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대량생산 제조업을 육성하고 있다. 중국은 수출보다 내수 주도로 성장을 전환하겠다고 공언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투자율은 40% 이상이고, 이런 투자율 속에서 생산된 제품이 저가로 서방세계로 수출된다. 그래서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이나 상하이에서 1시간만 차를 타고 나가면 여전히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일본이나 한국 정부는 여전히 기업에 투자를 권유하고 있고, 1990년대 전반 고투자로 고도성장을 한 동남아 국가들은 투자율이 하락하자 개발도상국임에도 5%대 성장률을 달성하는 데도 힘겨워한다. 즉, 현재의 아시아는 생산효율은 증가했지만 여전히 자원투입 의존형 경제체제가 계속되고 있다.
지금 아시아의 시대는 절반쯤 서구 선진국이 무너진 데 기원하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의 통합과 함께 위기 이후 구조조정으로 얻은 동아시아의 무역수지 흑자 대부분은 다시 미국에 흘러 들어갔고, 이는 미국 저금리 기조와 소비 호조의 배경이 되었다. 노쇠한 서방 선진국은 실물생산은 취약하지만 금융의 힘으로 소비를 누렸다. 선진국은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 경쟁으로 싸진 공산품을 저가에 소비하고 금융 서비스는 고가에 판매하는 일종의 부등가교환 경제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원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이른바 ‘글로벌 불균형’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 금융위기였다.
문제는 서방 선진국의 고초를 아시아가 그저 즐길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고통이 그동안 과분한 소비를 누렸던 그들이 받은 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세계경제는 하나로 통합돼 있다. 지금 어느 국가도 손해 보지 않고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1980년대 미국의 적자와 일본의 흑자는 그 절대적·상대적 크기가 오늘날보다 훨씬 적었음에도 해소 과정에서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90년대’를 잉태했다. 미국도 적자 크기가 감소해 1991년 간신히 흑자로 돌아섰지만 이는 경기후퇴와 함께 온 것이었고, 클린턴 정부의 경기호조가 다시 불균형을 축적하게 되었다.
결국 향후 세계경제, 특히 아시아는 수출환경의 악화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정부와 가계는 채무 조정을 할 수밖에 없다. 경기진작을 위해 국채를 발행해 정부 지출을 확대한 국가들은 이자를 갚기 위해 조세 수입의 상당 부분을 따로 떼어놓아야 하고, 높은 실업률 아래 고용 기회가 쉽게 확대될 것 같지 않다. 일자리를 보호하고 무역수지를 개선하기 위해 선진국은 보호주의의 힘을 빌리려 할 것이다. 이제 아시아는 새로운 시장과 돈을 투자할 곳을 찾아야 한다.
아시아 내에서 새로운 시장과 투자처를 찾아야 한다는 의식은 이미 1990년대 말 동남아의 외환위기와 함께 싹텄다. 위기 이후 아세안과 한국·중국·일본은 ‘아세안+3’ 체제를 만들었고, 장기적으로 동아시아공동체(East Asia Community)를 지향하기 위해 동아시아자유무역지대(EAFTA), 동아시아통화기금(EAMF), 동아시아투자지대(EAIA), 동아시아정상회의(EAS) 등 다양한 협력 방안을 만들었다. 자유무역지대가 되면 무역장벽이 해소되면서 아시아 역내무역이 증가하고, 통화기금은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를 방지해줄 것이었다. 외환보유고를 필요 이상 쌓아둘 필요가 없어지는 가운데 동아시아가 투자자유지대가 된다면 실물경제에 역내 자금이 더 많이 소화돼 수익률이 낮은 미국 채권시장에 투자할 필요성이 감소하기 마련이다.
 
서구 선진국 붕괴와 아시아의 고뇌
그러나 아시아의 협력사업들은 순조롭게 추진되지 않았다. EAS 사업이 가장 먼저 변질됐다. EAS는 아시아 협력의 기본 골격이던 아세안+3 정상회의가 동아시아 13개국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문제 때문에 한국이 주도해 제안한 것으로, 아세안+3 체제를 13개국이 동등한 자격을 가진 정상회의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동아시아 협력의 정치적·제도적 기반이 EAS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인도·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가 참여하는 ‘신EAS’로 만들었고, 당초 소멸하기로 한 아세안+3 정상회의는 살아남았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은 EAFTA에 대한 연구가 끝나기 전에 새로운 자유무역지대인 ‘아시아 포괄적 경제파트너십(CEPEA)’을 제안했다. 이 2개의 대안은 아직도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EAIA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진전이 없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EAMF만 아세안+3 국가들이 공동의 자금을 마련하는 등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
희망에 부풀었던 동아시아 공동체의 꿈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외환위기를 겪은 아시아 경제가 불완전하나마 살아나면서 아세안+3 국가들이 협력의 필요성에 대해 긴장감을 잃은 것이 하나의 이유다. 그렇지만 더 큰 이유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21세기 들어 아시아에서는 1960년대 이후 아시아의 경제적 주도자였던 일본의 영향력이 급속히 쇠락한 대신 중국이 떠올랐다. 일본의 정계나 보수층에서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그만큼의 일본의 쇠퇴에 두려워했다. 여기에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미국도 나섰다. 미국은 아시아 문제에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일본과 연계해 인도·오스트레일리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아세안은 아세안대로 작은 경제규모임에도 동북아 3국의 갈등을 이용해 아세안+3 체제에서 혜택을 누렸지만 동아시아가 통합될 때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될 것으로 생각했다. 아세안은 동아시아 공동체보다는 기존에 체결한 아세안과 한국·중국·일본의 개별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FTA의 허브 역할에 만족하기로 했다. 아시아의 경제적 통합이 실질적으로 아시아의 번영에 도움이 되고 세계경제의 안정에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지만, 국제적 정치 게임 속에서 10여 년이란 아까운 시간을 보내버린 것이다.
단기적으로 동아시아의 통합은 더욱 멀어진 것 같다. 오바마 정부의 미국은 부시 정부보다 아시아에 더 깊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기존에 태평양 연안 소국들의 자유무역지대였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가입하기로 하고, 기존 회원국뿐만 아니라 신규로 가입하기로 한 오스트레일리아·베트남·페루·말레이시아 등과 아태 지역을 대표하는 자유무역지대를 만들고 싶어한다. 2010년 말 일본도 TPP에 가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취약한 정치적 리더십, 낮은 농업경쟁력을 고려할 때 농산물을 포함한 완전한 자유화를 추진하는 TPP에 일본이 가입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동아시아가 추진한 EAFTA 등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고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협력이나 통합의 필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동아시아의 협력 확대는 선진국 시장에서 동아시아의 제살깎기식의 과도한 경쟁을 어느 정도 막아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원은 더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수출주도형 경제체질인 동아시아에 시장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아시아의 협력과 통합에 가장 소극적인 일본의 대중국 수출은 2001년 7.7%에서 2010년 10월 누계 기준 19.2%로 증가했고, 동아시아에 대한 수출 비중은 이 기간에 39.2%에서 50.0%로 증가했다. 일본의 대미 수출 비중은 2001년 30.4%에서 2010년 그 절반인 15.3%로 감소했다. 일본이 아시아에 대한 수출 비중이 전체의 과반이 된 것은 지난 수십 년 내 최초의 사건이다. 아세안 시장도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고, 한국과 대만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중국이 최대 시장이 되었다. 선진국에 대한 수출 환경이 악화되고 동아시아 국가들이 단기에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버릴 수 없다는 점에서 시장이 중국과 아시아에 존재하는 한, 그리고 아시아의 무역장벽이 미국이나 유럽의 장벽보다 높은 상황에서 대안은 별로 없다. 자유무역지대를 통해 거래비용을 줄이고, 금융 및 투자 협력을 통해 동아시아가 동반 성장하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아시아 지역을 둘러싸고 기대와 달리 경제협력이 부진한 이유는 아시아 역내 국가 간 이해상충과 미국 등의 개입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갈등과 개입의 기저에는 ‘중국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베트남과 말레이시아가 TPP에 가입하기로 하고, 일본 역시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TPP 가입을 추진하는 이유는 ‘중국이 없는 세상’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금 미국을 대신해 동아시아에 시장을 제공하고 있다. 일부 중국에 수출되는 상품의 최종 목적지가 미국이기 때문에 미국이 아직도 중요하다고 하지만, 중국에 미국이 중요한 것이지 중국에 수출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런 경유무역까지 고려해서 미국과 FTA를 하는 것은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분명하다. 최근의 고도성장을 바탕으로 중국이 보여준 자신감과 오만함 때문이다. 중국 경제가 아시아 경제를 압도할 때 절제되지 않는 패권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동아시아 국가들은 불안한 것이다.
 
문제는 ‘중국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다
동아시아는 중국을 ‘이웃의 깡패’가 아닌 ‘선한 사마리안’으로 남도록 해야 한다. 중국의 오만함과 패권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의존한다는 것은 하책에 지나지 않는다. 동아시아는 싫든 좋든 세계경제 환경의 변화 속에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중국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잊어버린 공동체의 꿈을 되살려 동아시아가 협력을 확대하고 중국을 전체 속의 하나, 즉 ‘n분의 1’로 만들어 견제해야 한다. 동아시아 국가는 현실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동안의 협력사업을 재점검해 하루속히 EAFTA를 추진해야 한다. 이제 미국과 러시아까지 가입하게 된 신EAS를 광의의 정치, 안보 차원의 지역협력체로 발전시키고, 경제적으로는 아세안+3에 기반한 국가들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경제그룹정상회의(EAEGS·East Asia Economic Group Summit) 같은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내의 금융·투자·무역 협력을 확대시켜야 한다. 분명한 길을 앞에 두고 후퇴하거나 우회한다면 이는 동아시아 리더들이 의무를 방기하는 것과 같다. pbs21@se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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