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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지명 대신 장기집권 시동
[ISSUE] 러시아 ‘포스트 푸틴’ 주목
[120호] 2020년 04월 01일 (수) 크리스티안 에슈 economyinsight@hani.co.kr

 2024년 임기가 끝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후계자 단속에 나서면서 모스크바 엘리트들이 최고 경계 상황에 들어갔다. 앞으로 이 나라 권력을 거머쥘 인물은 누구일까.

크리스티안 에슈 Christian Esch <슈피겔>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0년 3월10일 러시아 하원 의회에서 헌법 개정안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REUTERS

요즘 러시아 극장에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담긴, 진보 이념을 가진 귀족들의 1825년 봉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독재자가 후계자 결정을 잘못했을 때 닥칠 위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차르 황제가 서거하자 상트페테르부르크 귀족들은 너나없이 누가 뒤를 이을지 추측하기에 바쁘다. 후계자가 결정될 때까지 화면에선 두 시간 내내 음모와 투쟁이 난무하고, 폭동이 가열돼 목숨을 잃는 이가 생긴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는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 푸틴의 현실과 꼭 들어맞는다. 현재 러시아 엘리트층이 느끼는 긴장을 그대로 묘사했다. 러시아 정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재 양상을 띠었다. 대다수 국민에게 푸틴 대통령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모스크바 크렘린궁의 한 고위 관리는 “푸틴이 있는 한 러시아도 존재한다. 푸틴 없이는 러시아도 없다”고 말했다. 2024년 푸틴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어떤 상황이 일어날까? 여러 해 전부터 러시아 정계에 널리 퍼져 있던 의문이다.
푸틴이 1월15일 대통령 세 번 연임을 금지하고 총리 권한을 강화하는 개헌안을 공표한 뒤 후계 문제는 훨씬 더 급박한 현안이 됐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국정 연설에서 “개헌으로 총리와 내각을 임명하는 권한을 의회(State Duma·러시아 연방의회 하원)에 넘기려고 한다”고 밝혔다. 이날 푸틴의 개헌안 발표 직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를 비롯한 부처 장관들은 대통령에게 개헌 추진 여지를 주기 위해 전격 총사퇴를 선언했다. 흡사 여러 해에 걸친 정지 상태가 지나고 시간의 흐름이 가속화되는 모양새다.

푸틴, 국회 권한 강화 개헌안 제안
후계자 지정은 푸틴 몫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서두르는 걸까? 푸틴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모스크바 시민 역시 일련의 상황을 당황스럽게 받아들이며 긴장 속에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 여성학자는 “강력하지 않은 후계자가 나온다면 혼란한 시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면 모스크바 크렘린궁 전직 고위 관리에게 “푸틴의 이 술책을 사전에 알았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고 묻자, 손가락 딱 하나를 들어 올렸다.
푸틴이 1월15일 상·하원 의원 앞에서 “그동안 정당들이 많이 성숙해 의회에 전권을 더 이양해도 될 만하다”며 “총리와 장관 임명권을 국회가 행사하도록 하자”고 연설할 때, 공산당 소속 발레리 라슈킨 의원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푸틴이 20년 이상 고분고분하게 길들여 온순해진 정당들을 향해 권력을 더 많이 부여해줄 만큼 ‘성숙하다’고 공언한 것이 왠지 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독재 권력자는 늘 신하를 어린아이 다루듯 말한다. 그럼에도 푸틴이 헌법 내 불균형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로 러시아 정치사에서 진일보한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며칠 뒤 푸틴이 상정한 헌법 개정안 초안을 보고 라슈킨은 깜짝 놀랐다. 개헌안 상정 전 광범위한 토론을 하겠다는 공언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개헌안에는 의회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이 빠져 있었다. 총리와 각 부처 장관의 해임 권한이 이전과 다름없이 대통령에게만 부여돼 있었다.
라슈킨은 “뻔한 속임수”라고 분노했다. 푸틴이 헌법을 개정해 앞으로 수년간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450명 의원 중 푸틴 개헌안에 반대를 표명하는 거의 유일한 의원이다. 하지만 1월23일 열린 제1차 법안 심의회에서 통과된 헌법 개정안 투표 현장에서 ‘반대’ 스위치를 누를 만큼 용기는 없었다. 개헌안은 재적 의원 432명 전원 찬성으로 통과됐다.
라슈킨은 “크렘린궁에서 의원을 감시하기 때문에, 의원들은 항상 어마어마한 두려움에 짓눌려 있다”고 말했다. 크렘린궁은 텔레비전 시청 차단, 은행 계좌 압수, 의원 사무실 사용 금지 등 의원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막강한 권력이 있다.
푸틴이 크렘린궁 외부에서 통제하는 형태로 사전 작업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8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당시 푸틴은 헌법에 있는 ‘3선 연임 금지’ 조항에 묶여, 메드베데프 총리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자신은 총리로 배후에 머물다가, 2012년 다시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현 상황은 2008년과는 다르다. 푸틴은 벌써 68살이다. 만약 그가 크렘린궁을 떠난다면 영원한 작별이 될 것이다. 엘리트층과 관계도 달라졌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한 2014년 이래, 러시아 국민에게 푸틴은 역사적인 인물이 돼버렸다. 이전에는 선거에서 승리하고, 또 선거에서 자기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푸틴은 엘리트층의 지지를 얻어야 했지만, 2014년 이후 이 관계가 역전됐다. 오늘날 러시아 정치권에서 권력 서열 안에 들고, 이름도 널리 알려진 이들은 모두 푸틴 덕을 입은 사람이다.

   
▲ 대다수 러시아 국민은 푸틴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크렘린궁 한 고위 관리는 “푸틴이 있는 한 러시아도 존재한다. 푸틴 없이는 러시아도 없다”고 말했다. 2020년 3월6일 푸틴 대통령이 한 시민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REUTERS

대통령 배후 실세 총리 염두에 두나
라슈킨이 지적한 대로, 대통령 권한을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는 헌법 개정안으로 푸틴은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일까? 후계자를 감시하려는 것일까? 여러 추측이 나온다. 라슈킨은 푸틴이 계속 대통령 권좌에 눌러앉아 있으려는 계획이라고 본다. 푸틴은 대통령 임기를 두 번까지만 허용하는 규정 준수는 물론, 심지어 강화까지 촉구해왔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로부터 자신한테만 해당하는 예외 조항을 얻어내는 일이 푸틴에게는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될 만큼 쉬운 일이다.
푸틴의 계획은 그보다 훨씬 복합적인 것으로 보인다. 푸틴은 미리 무엇을 확정해놓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점을 고려하면 지금은 선택사항 몇 개를 마련해놓고 훗날 때가 됐을 때 이 중 하나를 실행하거나, 여러 개를 한꺼번에 작동하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이 경우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선택사항 중 하나가 ‘추밀원’이다. 대통령과 각 주지사의 정례회의인 추밀원은 지금까지 6개월에 한 번 열리는 화려한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1차 집권기 때 푸틴은 과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각 지방의 주지사를 상원, 즉 러시아 연방평의회에서 축출하고, 추밀원을 창설했다. 추밀원은 그렇게 축출된 주지사에게 작은 보상 성격의 모임이다. 정치학자 글레프 파블롭스키는 “그저 뭐 주지사 클럽, 그 이상은 아니다”라고 평했지만, 이 ‘클럽’이 헌법기관이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푸틴을 비롯한 전직 대통령을 이 추밀원의 평생회원으로 임명하자는 제안이 벌써 내부에 오가고 있다. 과연 어느 정도 전권을 가질지, 누가 이 기관의 수장이 될지 등은 모두 불투명하지만 말이다.
상원인 러시아 연방평의회 역시 위상이 높아질 전망이다. 앞으로 대통령과 함께 헌법재판소 재판관 해임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법률가들은 “사법부 권한이 대폭 약화됨을 의미한다”고 법리적 결함을 지적한다.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조직과 기능을 계승한 연방보안국(FSB)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보조직, 군대, 경찰 고위층, 상·하원 의장, 총리, 대통령 모두 이 위원회 소속이다. 연방보안국은 군사력을 나라 안팎에 배치하는 문제를 조언하는데, 지금은 대표적인 권력 행사 기관으로 우뚝 섰다. 실로비키 이사회장이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막강해졌다.
마지막으로, 푸틴이 소속된 통합러시아당이 있다. 푸틴은 이 정당을 통해 의회를 통제하고 있다. 머잖아 푸틴이 당수직을 다시 차지할 수도 있다.
푸틴은 최근까지 여러 개 컵을 탁자 위에 엎어놓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야바위꾼 같은 태도를 보였다. 대통령직, 추밀원, 러시아 연방평의회, 연방보안국 등의 컵 중 어디에 구슬을 놓는 게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될지 고심하는 것이다.(그 구슬은 3월10일 푸틴이 대통령 세 번 연임 제한 폐지를 담은 개헌안을 발의하면서 ‘대통령직’으로 일단락됐다. –편집자)

   
▲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러시아 정치는 독재 양상이 가속하고 있다. 푸틴은 행정부를 비롯해 입법부, 사법부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REUTERS

롤모델이 나자르바예프냐 덩샤오핑이냐
정치 전문가이자 통합러시아당 인사였던 올가 크리슈타노프스카야는 “푸틴이 선택한 곳으로 권력 중심이 옮겨갈 것”이라며 “추밀원이나 연방보안국이 된다면 카자흐스탄 버전의 시나리오를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자신의 사임 이후 시기를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1990년 카자흐스탄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집권 30년 만인 2019년 3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현재 그는 안전이사회 평생 회장, 집권당 당수 등의 직함을 갖고 대통령일 때와 마찬가지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마오쩌둥 후계자였던 덩샤오핑도 푸틴이 주목하는 모범 사례다. 크리슈타노프스카야는 “러시아 정보부는 공식적으로는 모습을 감추지만 중요한 결정권은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직함을 통해 지속해서 행사했던 덩샤오핑에 경외심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크렘린궁 고위 관리는 “모든 사람이 앞으로 권력 승계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단언컨대, 푸틴은 2024년 권력을 이양할 생각이 전혀 없다. 기껏해야 자신의 권력 일부를 다른 누군가와 나눌 뿐이고, 감시권을 끝까지 장악할 것이다.”
그런 푸틴의 욕망을 방해하는 요인은 저조한 경제성장률이다. 푸틴이 처음으로 크렘린궁에서 나왔던 2008년, 러시아 원유 붐이 끝났다. 현재 러시아에선 실질소득이 정체 현상을 보인다. 푸틴이 2018년 국가 차원의 거대한 사회기간산업 프로젝트를 발족했지만 실행이 지지부진하다. 그가 서툴고 인기도 없는 메드베데프 총리를 사퇴시키고, 연방보안국으로 밀어넣은 건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한 포석인 셈이다.
오늘날 푸틴이 두려워할 게 있다면 저항을 멈춘 모스크바 거주 중산층 시민이 아니다. 최하위층과 푸틴이 퇴임하고 나면 우수수 무너져내릴 엘리트 그룹에 속하는 최상위층이다. 경찰에 체포되는 고위급 공무원이 날로 늘어나는 현 상황은, 엘리트 계층 갈등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크렘린궁 비판자들만 정부 억압을 받는 단계는 지났다. 이제는 한 도시의 시장, 도지사, 연방 장관도 모두 억압 대상이다. 푸틴이 대통령직 권한을 약화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다. 설령 자신이 대통령직을 그만두더라도, 뒤에서 대통령을 조정해야 하니 말이다. 이 엘리트층을 통제할 방법이 대통령뿐이라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2020년 3월11일 푸틴 대통령이 2024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포함한 헌법 개정안이 러시아 의회를 통과하자, 모스크바 시민이 “푸틴을 끝내야 한다!”고 쓰인 펼침막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REUTERS

차기 러시아 대통령의 조건
‘포스트 푸틴’ 소식은 아마 푸틴 사임 직전에야 듣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바람직한 후보자 요건을 나름 상정해볼 수 있다. 크리슈타노프스카야는 “첫째, 러시아 인종으로 러시아 성을 가져야 한다. 둘째, 12년 임기를 채울 만큼 젊어야 한다. 셋째, 실로비키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분석했다.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한 건, 푸틴과 그의 주변 인물의 안전을 보장할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재산 몰수, 체포와 취조를 포함해 국내외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공격을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
푸틴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하려고 할수록 그가 지금껏 구축했던 정치 시스템이 와해된다는 사실은 모순적이다. 실제 그는 헌법에 절대 손대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맹세했지만 스스로 헌법을 구부러진 활로 바꿔버렸다. 이렇게 된 데는 헌법 개정 찬반 투표를 할 필요도 없고 관련 법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푸틴이 신의 개혁안을 굳이 국민 앞에 과시하려는 욕망이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1월 헌법 개정안에는 최저임금, 연금의 색인화 같은 조항이 새롭게 자리잡았다. 또 서문에는 새로운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대전쟁에서 획득한 러시아의 승리와 결혼 등에 관한 미문이 선택적으로 들어갔다. 세부 사항은 논의 중이지만, 국가 권리가 우선이라는 내용과 장기적으로 외국에 거주한 적 없는 러시아 시민만 대통령 피선거권이 있다는 항목도 포함됐다. 날마다 개정안의 새 제안이 쇄도하고 추가되고 있다.
헌법 개정 반대 캠페인을 주도한 여성 환경운동가 마리나 리트비노비치는 “푸틴이 갑자기 의견 개진의 길을 넓혀놓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 누구나 자기 생각을 견지하면서 널따랗게 열린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모든 것을 생각해볼 만하다. 푸틴은 정권 이양 과정에 시동을 건 게 아니라 정권 붕괴에 시동을 걸었다”고 덧붙였다.
(*2020년 3월10일 러시아 모스크바 하원에서 대통령 연임 제한 규정을 무력화하는 개헌안이 전격 발의됐다. 연임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세 번 연임할 수 없는 현행 헌법에 따라, 2024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하지만 개헌안이 통과되면 최장 2036년까지 집권이 가능해진다. 공교롭게도 이날 발의된 개헌안은 잘 짜인 각본처럼 일사천리로 의회를 통과했다. 발의 한 시간 만에 푸틴이 하원 공개 연설로 개헌안 지지를 표명했고, 상·하원 의원은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졌다. 개헌안은 4월22일 예정된 국민투표에서 과반 찬성을 얻으면 채택되고 곧바로 발효된다. –편집자)

ⓒ Der Spiegel 2020년 8호
Kugel der Macht
번역 장현숙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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