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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지존, 역사의 순간마다 함께
[김미영의 브랜드읽어주는 여자]
[120호] 2020년 04월 01일 (수) 김미영 kimmy@hani.co.kr

 김미영

   
▲ 1954년 출시 이후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조터 컬렉션’의 파스텔 에디션(왼쪽). 소네트 출시 25주년을 기념해 2020년 1월 스페셜 에디션으로 출시한 ‘소네트 푸제르’. 파카 제공

뾰족한 펜촉 사이로 부드럽게 종이를 파고드는 잉크. 손놀림에 따라 굵기를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만년필은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품격과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예부터 성공한 남자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셔츠 주머니에 만년필 한 자루를 꽂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깨를 으쓱하게 한다. 이런 배경에는 13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만년필의 명가 ‘파카’(PARKER) 역할이 컸다.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에서 스타일과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겨지면서 오늘날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다.

조약과 협약 현장에
파카는 역사의 순간마다 함께했다. 세계적인 종전 및 평화 조약, 경제 협약이나 협정 등에 서명할 때 자주 사용됐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대표인 아이젠하워가 독일의 항복문서에 서명할 때, 같은 해 맥아더 장군이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할 때와 1951년 일본 평화협정 체결 때 파카 펜을 사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역대 대통령과 총리도 파카 만년필을 즐겨 썼다. 1990년 6월 미국 부시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사실상 냉전을 종식할 때 파카 만년필을 사용했다. “어린 시절 파카 펜을 갖는 것이 꿈”이었다고 공공연하게 밝힌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도 모든 서명을 파카 만년필로 했다. 우리나라 박정희 전 대통령, 중국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만년필도 파카였다.

132년 전통의 혁신 브랜드
파카 만년필은 미국에서 교사였던 위스콘신 출신 조지 새퍼드 파카가 창안한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1988년 당시 존 홀랜드 골드팬 컴퍼니의 판매 대리인으로 부업 삼아 만년필을 팔았던 그는, 잉크가 자주 샌다는 고객 불만이 이어지자 직접 만년필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듬해 만년필 관련 특허를 받은 파카는 1892년 3월 위스콘신주 제인스빌에 파카펜컴퍼니를 세운다.
파카는 잉크 양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기술에 심혈을 기울였다.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1894년 잉크가 많이 흘러나와 새거나 번지는 것을 막는 잉크 주입 기술 ‘럭키 커브’(Lucky Curve) 시스템을 발명해 특허를 받았다. 이 시스템은 만년필 사용자의 최대 고민을 해결해주었고, 이를 계기로 파카는 기술력과 실용성을 인정받았다.
모순적이게도 파카는 전쟁을 거치며 큰 성장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족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펜이 필요했던 군인에게 펜을 제공하면서 1921년 파카의 시그니처인 ‘듀오폴드’가 탄생했다. 이로써 본격적인 고급 만년필 시대가 열렸다. 이 성공에 힘입어 1923년 캐나다 토론토에 공장을 세웠다.
1931년 빨리 마르는 ‘퀸크 잉크’를 출시했고, 1941년 항공기가 창공을 가르는 모습에 영감을 받아 20세기 최고의 펜이라 불리는 ‘파카51’ 만년필을 선보였다. 이 만년필은 30년 동안 4억달러 이상 판매액을 기록하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만년필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 심플한 디자인까지 더해져 1990년대 출시된 ‘소네트’는 우아함의 상징으로 자리잡으며 현재 파카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파카의 뛰어난 장인정신
파카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비결은 뛰어난 기술력과 파카만의 장인정신이었다. 특히 파카 펜 제조에 중요한 부분으로 꼽히는 엔진과 잉크 피드 시스템(Ink Feed System)을 들 수 있다. 하이엔드 모델에 적용되는 18K 순금의 뾰족한 펜촉은 파카 펜의 엔진 역할을 하는데, 잉크 피드 시스템은 파카 펜에 흘러내리는 고품질 잉크의 양을 조절해준다. 정밀한 조각과 인각 기술로 펜촉과 캡, 몸체 등을 만든다.
파카는 자사 제품에 쓰는 은과 18K 순금 등 다양한 재료를 엄격하게 선정하며, 진귀한 보석과 코팅 기술로 특정한 촉감 효과를 자랑한다. 펜촉과 마감, 광택 등도 제조 과정에서 장인의 손길을 거쳐 완성된다. 파카는 1962년 최고급에만 부여되는 영국 왕실의 로열 워런트(Royal Warrent·왕실조달허가증)를 획득했고, 미국 백악관 공식 펜으로 지정됐다.
현재는 새로운 기술과 도전으로 고급 만년필뿐 아니라 펜, 샤프에 이르는 대중적인 제품으로 전통과 명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1954년 출시된 파카 최초의 볼펜 ‘조터’는 60여 년 동안 7억5천만 개 판매량을 자랑하며 필기구계에 한 획을 그은 제품으로 꼽힌다. 출시 때부터 고수한 유선형 총알 모양 디자인으로 큰 사랑을 받으며, 시대의 디자인 아이콘으로 명실상부하게 자리잡았다. 파카의 대표 모델로는 럭키커브, 조인트리스펜, 잭나이프 세이프티펜, 듀오폴드, 파카51, 인시그니아, 프런티어, 조터, 애로우, 파카100, 래티튜드, 소네트 등이 있다.

파카를 사랑한 인물들
파카는 예술계 인사들에게 사랑받았다. <셜록 홈스> 작가 아서 코넌 도일은 1920년대 “내가 평생 찾던 펜은 바로 파카”라고 할 만큼 파카 펜을 애용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푸치니가 오페라 <라보엠> 선율을 오선지에 옮길 때도 파카를 사용했다. 영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 역시 파카 만년필 끝에서 나온 작품이다.

* ‘94학번’으로 1990년대 중반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유분방하고 개성을 추구하던 동시대의 문화를 자신만의 개성으로 추구하던 ‘X세대’ 문화를 직접 겪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처럼 신세대의 마음가짐으로 젊고, 멋스럽게 나이 들기를 바란다. 뷰티와 패션에 관심이 많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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